“돈을 내는 행위만으로 배상이라고 할 수 없다”
  • 송지혜 기자
  • 호수 435
  • 승인 2016.01.18 2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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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위안부 연구자 쑤즈량 소장에 따르면 중국 내 위안부 피해자의 수는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의 위안부 피해자만큼이나 많다. 중국에도 24명의 피해자가 생존해 있다. 그에게 이번 한·일 간 합의에 대해 물었다.

커버 스토리


끝났다 뉘 말하는가


경로 이탈한 ‘막가파’ 외교의 결과


“돈을 내는 행위만으로 배상이라고 할 수 없다”


‘그 합의’에는 피해자들이 없다
 

눈치 볼 때 보더라도 ‘이것만은’…

 

 

1932년 1월, 일본군은 중국 상하이의 일본식 클럽 네 곳을 ‘위안소’로 지정했다. 아시아 최초의 일본군 위안소였다. 일본군이 여성을 강간해 성병이 퍼질 우려가 생기자 위안소를 기획했다.

위안소 수는 늘어났다. 1937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일본군이 점령한 중국 전 지역에 일반화되었다. 일부 지역에서 ‘위안부’와 일본군 비례는 1대29에 달했다. 쑤즈량(蘇智良) 중국 위안부문제연구센터 소장(상하이 사범대학 교수)은 중국인 피해자가 20만명에 달하고 상하이 지역에만 160곳 이상의 위안소가 설립됐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대로라면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의 위안부 피해자보다 많은 수치다.

쑤즈량 소장은 중국인 위안부 문제를 연구한 최초의 연구자다. 현재까지도 최고 권위자로 통한다. 저서 <일본군 성 노예> <위안부 연구> 등을 냈다. 그는 “일본이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는 일은 주변 국가와의 관계를 정상화하는 첫걸음이다”라고 말했다. 인터뷰는 이메일로 진행됐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연합뉴스</font></div>지난해 9월 강일출 할머니(왼쪽에서 두 번째)가 상하이 사범대에서 위안부와 관련해 증언하고 있다.

‘12·28 위안부 합의’가 이전에 비해 진전이 된 결과라고 보나?
일본 정부는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을 체결한 이후 배상 문제가 완전히 해결됐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이번엔 일본 정부가 10억 엔을 제공한다고 하지만, 일본 정부는 법률적 관점에서 책임을 지지 않았다. 아베 총리가 “마음으로부터 사과하고 반성한다”라는 표현을 썼는데, 모호하다. 가해행위를 누가 어떻게 했는가를 가해국이 정확하게 인정해야만 한다. 그러고 나서 후속 조치가 수반될 때 진정한 사죄로 피해자가 받아들일 수 있다. 일부 매체에서는 직접적으로 ‘배상금’이라고 표현하는데, 이 표현은 경솔하다. 돈을 내는 행위만 두고 배상금이라고 볼 순 없다. 배상금이란 법률적 효과와 이익이 수반되기 때문이다. 이번 10억 엔은 공포된 문건에 따라 ‘배상금’ ‘보상금’ 또는 ‘위문금’으로 다르게 표현돼 있다.

이번 합의가 중국에 어떤 영향을 줄까?
지난 20여 년간 일본은, 오늘 머리를 조아리고 내일은 이를 부정하는 패턴을 반복해왔다. 이번 한국과의 ‘합의’에서도 그랬다. 중국이 일본 정부와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려면, 배상이 아니라 전쟁범죄에 대한 법적 책임을 명확히 해야 할 것이다. 반드시 전 중국 위안부의 명예와 존엄 회복을 최우선적으로 명시해야 하며 정식으로 사과하고 정의의 원칙에 부합하는 배상, 전쟁 책임의 반성과 재발 방지를 명확히 해야 한다. 한국 정부는 지난 20년간 일본에 위안부 문제 해결을 요구했고 결국 성사시켰다. 위안부 생존자 연령을 감안해 중국 정부도 전면에서 협상을 벌일 필요가 있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연합뉴스</font></div>쑤즈량 중국 위안부문제연구센터 소장은 상하이에 160곳 이상의 위안소가 설립됐다고 주장한다.

위안부 문제에 대한 중국 정부의 공식 입장은 무엇인가?
중국 정부는 지난 20년간 일본 정부가 피해자에 대한 사죄와 배상을 직시해야 한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현재 중국에는 24명의 피해자가 생존해 있다(편집자 주:2013년 일본 <아사히 신문>은 1992년 2월19일자 외교 비밀문서를 공개했다. 문서에 따르면 중국과 일본은 위안부 문제를 더 이상 거론하지 않기로 비공개 합의했다. 당시 일본은 “위안부 문제가 한국에서 중국으로 번져 골머리를 앓고 있다. 중·일 관계의 대세에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위안부 문제를 거론하지 않도록 하고 싶다”라고 중국에 전했다. 이에 대해 중국은 “사안이 커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라며 합의했다. 이후 ‘아시아여성기금’ 지급 대상에서 중국 위안부 피해자는 제외되었다. 중국과 일본 간 ‘뒷거래’가 있었다는 설이 나왔다).

일본군이 위안부를 동원하는 데 직접 관여한 공문서가 2014년 발굴되었다.
상하이 당안관(국가기록보관소)에 소장된 공문서 ‘시민(중국인) 양수이창(楊水長)이 푸상(浦上)로 6번지에 개설한 위안소 상황에 대한 안건’이 대표적이다. 1939년 2월25일 상하이 경찰국장이 상하이 시장에게 보고한 문서인데, 일본군 헌병대와 육군경비대에 위안소 개설을 행정적으로 허가한 내용이다. 일본군이 괴뢰정부를 이용해 위안소를 개설하고 관리하는 제도를 만들었다는 증거다. 이 밖에도 일본 위생국이 작성한 위안부 정기 신체검사 문서 등도 발굴되었다. 위안소는 1945년 8월 일본군이 항복할 때까지 존재했다.

그럼에도 1972년 중·일 공동성명에서 중국은 일본에 대한 배상청구권을 파기했다.
분명히 중국 정부는 전쟁배상 요구를 포기했다. 다만 피해자 개인의 배상권을 포기한 게 아니라고 중국 정부는 해석하고 있다. 일본은 인도네시아·필리핀·소련 등과 평화조약을 체결하면서 청구권과 관련해 ‘국가 및 국민’이라고 명시했다. 정부와 국민의 권리를 분리시켰다. 1995년 중국 외무장관은 “중국 정부는 개인의 배상 청구를 저지하지 않는다”라고 공식 발표한 바 있다.

 

 

박스 기사

눈치 볼 때 보더라도 ‘이것만은’…

 

‘12·28 위안부 합의’ 이후 국제사회의 초점은 타이완으로 옮아갔다. 타이완 외교부가 ‘일본이 위안부 피해자에게 사죄·배상해야 한다’고 강조하며 일본 정부에 압박을 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1월6일 린융러(林永樂) 타이완 외교부장은 “일본군 위안부로 내몰린 여성들의 존엄성을 회복하기 위해 일본 정부와 계속 협상할 것이다. 일본 측에 조기 회담 개최를 요구했다”라고 말했다.

하루 앞서 타이완 외교부는 위안부 피해자를 지원하는 단체 ‘부녀구원 사회복리사업 기금회(부녀구원회)’ 관계자들과 만나 협상 전략을 논의했다. 이들은 일본 정부 차원의 공식 사과와 명예 회복을 요구하기로 입을 모았다. 협상을 앞두고 자국의 위안부 생존자나 지원 단체와 소통하지 않았던 한국 정부와 대비되는 모양새다. 부녀구원회는 ‘12·28 위안부 합의’ 이후 성명을 발표하고 양국 정부를 이렇게 비판했다. “모호하고 기만적인 협상 결과가 상당히 포함되어 있다. 금전 보상에만 치중하면서 일본 정부의 역사적 책임에 대한 반성은 보이지 않는다.”

캉수화 부녀구원회 대표(마이크 든 이)가 타이완 위안부 문제 해결을 촉구하고 있다.

최근 1∼2년 사이 타이완은 위안부 문제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일본군 위안부 역사박물관이 건립되는가 하면 마잉주 타이완 총통은 직접 위안부 할머니를 찾아가거나 총통부에 초대해 만찬을 나누었다. 그는 1월1일 신년사에서도 “일본에 타이완 국적 위안부에게 배상과 공식 사죄를 하라는 요구를 강화할 것이다”라고 밝혔다.

타이완은 국가로 인정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중국에 귀속될 수 있다는 두려움을 안고 있다. 일본과 미국과의 관계 강화에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처지인데도 위안부 문제만은 직시하고 있다. 부녀구원회는 1992년부터 위안부 생존자에게 생활비·의료비 등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해왔다. 캉수화(康淑華) 대표는 “할머니가 돌아가시면 일본은 압력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부녀구원회가 파악한 위안부 피해자는 총 58명이다. 이 가운데 타이완 원주민은 12명이고, 현재 4명이 생존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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