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 스토리


끝났다 뉘 말하는가


경로 이탈한 ‘막가파’ 외교의 결과


“돈을 내는 행위만으로 배상이라고 할 수 없다”


‘그 합의’에는 피해자들이 없다
 

눈치 볼 때 보더라도 ‘이것만은’…

 

 

일본 보수파 인사들이 한국 정부의 위안부 정책을 비판할 때 자주 쓰는 프레임이 있다. ‘골대 이동론’이다. 축구 경기에 빗대, 정권에 따라 골대(위안부 정책)가 움직인다는 것이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외무상은 ‘12·28 위안부 합의’ 직후 언론에 “이번 합의로 한국이 골대를 움직일 수 없게 만들었다”라고 평가했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도 “한국 외교장관이 TV 카메라 앞에서 불가역적이라고 했다. 지금까지 한국이 움직여온 골대를 고정시킨다는 의미다”라고 말한 것으로 일본 언론이 전했다. 이번 합의에 삽입된 ‘최종적이고 불가역적 해결’이라는 문구는 일본 쪽 골대 이동론 프레임이 강하게 작용한 것이다.

한국 정부가 어떤 정책과 노선을 밟아왔기에 골대 이동론 프레임에 말려든 것일까? 청와대와 윤병세 외교팀은 도대체 어떤 정책을 편 것일까? 노태우 정부부터 박근혜 정부까지 위안부 정책을 통사적으로 살펴보면, 그 답을 얻을 수 있다.

ⓒ연합뉴스1991년 8월 고 김학순 할머니(위)가 생존자 중 처음으로 일본군 위안부의 실상을 증언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1990년 1월4일 윤정옥 이화여대 교수가 〈한겨레신문〉에 ‘정신대 발자취 취재기’를 연재하면서 공론화했고, 이듬해 8월14일 고 김학순 할머니가 공개 증언에 나서면서 한·일 간 외교 현안으로 떠올랐다. 당시만 해도 일본 정부는 군의 관여를 부정했다. 노태우 정부는 진상 규명과 일본의 ‘성의 있는 조치’를 요구했다. 성의 있는 조치에는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도 포함되었다. 정부 차원에서 정신대 문제 실무대책반도 꾸렸다. 1992년 7월31일 ‘일제하 군대위안부 실태조사 보고서’를 발표했다.

하지만 일본은 군의 관여를 시인하면서도 모집 과정에서 강제성을 입증할 만한 자료는 발견되지 않았다고 버텼다. 또 ‘보상’은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에 나오는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되었다는 조항을 근거로 종결되었다고 밝혔다. 정부 차원 보상과는 별도로 기금을 조성하는 아이디어가 제시되었다. 1965년 한·일 협정을 방패막이로 삼은 일본은 위안부 문제 초기부터 지금까지 똑같은 논리로 ‘골대’를 철벽 수비하고 있다. 한·일 양국 정부 차원에서 ‘성의 있는’ 진전은 없었다.

김영삼 정부 들어서도 평행선을 달렸다. 진상 규명, 성의 있는 조치를 요구하는 한국 정부와 강제성을 인정하지 않고 보상은 종결되었다는 일본 정부의 입장이 팽팽히 맞섰다. 1993년 3월13일 김영삼 정부는 결단을 내렸다. ‘도덕적 우위에 입각한 자구조치’를 전격 발표했다. 일본 정부에 금전적인 보상이나 배상을 더 이상 요구하지 않고, 한국 정부가 직접 피해자를 지원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대신 일본 정부에는 진상 규명과 제대로 된 역사 교육을 하라고 요구했다. 위안부 정책의 패러다임을 바꾼 것이다.

외교부 동북아국장을 역임한 조세영 동서대 특임교수는 YS의 패러다임 전환을 ‘자주적 조치 노선’이라고 정의했다. 조 교수는 1984년 외교통상부에 들어간 뒤 10여 년을 주일 대사관에서 근무한 ‘일본통’이다. 김영삼-김대중 정부 때 대통령 일본어 통역을 담당하기도 했다. 외교부 동북아 국장을 끝으로 2013년 외교부를 떠났다. 현장에서 뛴 실무 경험을 토대로, 그는 역대 한국 정부의 위안부 정책을 두 갈래 개념으로 정의했다. 그는 지난해 발표한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외교적 대응 경위와 향후 대처 방향〉이라는 논문과 저서 〈한·일 관계 50년, 갈등과 협력의 발자취〉에서 우리 정부의 위안부 정책을 ‘외교적 협상 노선’과 ‘자주적 조치 노선’으로 구분했다. 한·일 당국자 교섭으로 위안부 현안을 해결하려 했던 노태우 정부의 정책을 외교적 협상 노선이라고 한다면, 김영삼 정부의 위안부 정책을 자주적 조치 노선으로 구분한 것이다(26~27쪽 표 참조). 조 교수는 “김영삼 정부의 자주적 조치 노선은 한·일 양국이 위안부 문제와 관련한 성의 있는 조치를 각자 하자는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 정부가 양보한 것은 아니다. 돈 문제는 언급하지 않는 대신 법적 책임이 일본에 있다는 입장에는 변함이 없었다”라고 설명했다.

YS의 선제적인 자주적 조치 노선 발표는 일본을 움직였다. 일본은 5개월 뒤인 1993년 8월4일 고노 담화를 발표했다. 고노 요헤이 관방장관은 “위안소 설치와 관리에 일본군이 관여했으며 일본군 위안부 모집과 이송이 본인의 의사에 반해 이뤄졌다”라고 밝혔다. 일본은 후속 조치로 아시아여성기금 사업을 민간 주도로 시작했다. 국민 모금으로 조성한 기금과 함께 일본 총리의 사과 편지를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보냈다.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와 위안부 피해자들은 반발했다. 첫째, 민간 차원에서 주도한 아시아여성기금은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위안부 문제가 종결되어 법적 책임이 없다는 일본 정부의 입장을 전제했기 때문이다. 둘째, 일본 총리의 사과 편지에 ‘도의적 책임’이라고만 언급되어 법적 책임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위안부 할머니들이 반대하자, 한국 정부도 아시아여성기금 집행에 대해 공식 반대했다. 김대중 정부는 1998년 4월21일 아시아여성기금에 맞불 성격으로 피해자에 대한 2차 지원을 했다(아시아여성기금은 61명의 한국 피해자에게 ‘위로금’과 ‘의료복지 지원금’을 지원한 뒤 2002년 5월 종료했다). 김대중 정부 역시 김영삼 정부의 자주적 조치 노선을 유지한 것이다. 자주적 조치 노선은 이후 노무현-이명박 정부 때까지 지속되었다. 김영삼 정부 이후 골대는 움직이지 않은 셈이다.

ⓒ연합뉴스박정희 대통령이 1965년 청와대에서 한·일 청구권 협정문에 서명하고 있다.

법적 변수가 불거졌다. 2005년 1월과 8월 노무현 정부는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 교섭 관련 문서를 전면 공개했다. 노무현 정부는 당시 이해찬 국무총리와 이용훈 변호사(2005년 9월 대법원장에 취임)를 대표로 한·일 회담 문서공개 민관공동위원회를 꾸렸다. 위원회는 문서 검토 결과 일본군 위안부, 사할린 동포, 원폭 피해자 등은 1965년 청구권 협정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에 나온 ‘완전하고 최종적인’ 해결 조항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한국 정부가 처음으로 공식화한 것이다. 하지만 노무현 정부도 김영삼 정부의 자주적 조치 노선을 따라, 일본에 배상 문제를 외교 현안으로 제기하지는 않았다. 법적 책임은 일본에 남아 있다고 밝혔지만, 정부 차원에서 법적 책임을 따지지 않는 모순이 발생했다. 정대협과 피해자 할머니들이 모순 상황을 법적으로 문제 삼았다.

헌법재판소 판결이 만든 ‘법적 트랙’

이용수 할머니를 비롯한 피해자 할머니 109명은 2006년 7월5일 한국 정부(외교통상부 장관)를 상대로 헌법재판소에 위헌 청구 소송을 냈다. 청구 취지는 “한·일 협정 해석과 실시에 따른 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행위를 하지 않은 정부의 부작위(不作爲)는 할머니들의 재산권, 행복추구권, 외교적 보호권 등을 침해한다”라는 것이다. 한·일 청구권 협정 제3조에 따르면, 협정의 해석이나 실시에 따른 분쟁은 외교상의 경로를 통해 해결(1항)하거나, 외교적으로 해결되지 않으면 국제 중재위원회에 회부(2항)하게 되어 있다. 일본 정부는 위안부 문제는 1965년 청구권 협정으로 해결되었다고 주장했고, 노무현 정부는 해결되지 않았다고 밝혔으니 해석상 분쟁이 발생한 셈이다. 한·일 청구권 협정 제3조가 규정한 절차를 밟아달라는 것이 할머니들의 핵심 주장이었다.

5년 뒤인 2011년 8월30일 헌법재판소는 할머니들 손을 들어주었다. 한·일 양국 간 해석의 분쟁이 있는데도, 외교 경로를 밟거나 중재위에 회부하지 않는 부작위는 할머니들의 기본권 침해라고 판시했다. 헌재는 한국 정부가 그동안의 피해자 지원과 별개로, 분쟁 발생 시 한·일 청구권 협정 3조에 규정된 절차를 따라야 한다고 분명하게 명시했다. 헌재는 “(중재위에서) 일본 정부에 대한 배상 청구가 부인되는 결론이 나올 위험성도 감수하겠다고 하면 정부는 피해자들의 의사를 고려해야 한다”라고 명시했다. 외교적으로 해결되지 않으면 피해자들의 견해를 존중해 중재위에 회부하라는 뜻이다. 조세영 교수는 “헌재 판결로 이명박 정부 때 ‘정치 외교적 트랙’에서 ‘법적 트랙’으로 변화가 불가피했다”라고 설명했다. 외교적 협상 노선이나 자주적 조치 노선이 ‘정치 외교적 트랙’에 속한다면, 헌재 판결로 ‘법적 트랙’이 생긴 것이다.

이명박 정부는 헌재 결정 직후인 2011년 9월 외교부에 ‘일본군 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한 태스크포스’를 구성했다. 헌재 결정 취지대로 일본에 한·일 청구권 협정 제3조 1항에 근거해 외교 협의를 요청했다. 11월에도 재차 요구했다. 이때 협의는 ‘정치 외교적 트랙’에 속한 외교적 협상 노선이 아닌, 헌재 취지대로 법적 트랙을 밟는 차원이었다. 일본은 청구권 협정 제3조에 따른 협의에는 응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법적 트랙에 따른다면 남은 카드는 한·일 청구권 협정 제3조 2항에 따라 국제 중재위에 회부해야 했다. 당시 외교부 당국자 사이에서 중재위 회부 카드를 두고 찬반이 엇갈렸다. 헌재 결정에 따라 중재위에 회부해야 한다는 ‘원칙론’과 한·일 관계 악화가 우려된다는 ‘현실론’이 맞섰다. 이명박 정부는 현실론으로 기울었다. 법적 트랙과 별개로 물밑에서 정치 외교적 트랙을 슬그머니 밟았다. 2012년 10월 이동관 전 청와대 홍보수석-사이토 쓰요시 관방 부장관 사이에 비공식 물밑 협상이 벌어졌다. 투 트랙을 구사한 것이다. 하지만 협상은 결실을 맺지 못한 채 박근혜 정부로 넘어갔다.

박근혜 정부의 최장수 장관인 윤병세 외교팀은 2014년 4월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한·일 국장급 회담을 시작했다. 이 회담은 한·일 청구권 협약 제3조 1항에 해당하지 않는, 조 교수의 개념을 빌리면 정치 외교적 트랙 차원이었다. 중재위 카드 등 법적 트랙을 밟을 경우, 한·일 관계가 악화된다는 현실적 판단에 따른 것이다. 게다가 국장급 회담을 진행하면서 한국 정부는 일본에 ‘성의 있는 조치’를 요구했다. 다름 아닌 돈 문제를 다시 꺼낸 것이다. 조세영 교수는 “1993년 김영삼 정부 이래 유지된 ‘자주적 조치 노선’을 이탈해 ‘외교적 협상 노선’을 추구한 것이다”라고 평가했다.

ⓒ연합뉴스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2015년 11월2일 청와대를 방문해 방명록에 서명하고 있다.

한국 정부의 경로 이탈의 대가는 컸다. 일본 보수파 사이에 퍼진 ‘골대가 움직인다’는 프레임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갔고, ‘최종적이고 불가역적’ 해결 문구를 삽입한 것으로 귀결되었다. 박근혜 정부는 피해자와 국익 차원에서 최선의 합의였다고 입을 모은다. 하지만 위안부 문제와 관련한 국익이 무엇인지 2011년 헌재는 그 해법까지 결정문에 담았다. ‘정부는 (중재위 회부를 통해) 분쟁 해결 조치를 취하면 한·일 외교 관계의 불편을 초래한다고 주장하지만, 외교 행위 특성을 고려해도 국익이라고 보기 힘들다. 일본 정부가 피해자에 대한 법적 책임을 다하도록 하는 것이 진정으로 중요한 국익에 부합한다.’

‘12·28 위안부 합의’ 뒤에도 법적 후폭풍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헌재 판결로 생긴 법적 트랙을 박근혜 정부가 한 발짝도 밟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일 당국자 설명을 들어보면, 이번 합의는 한·일 청구권 협정 제3조 1항에 따른 ‘해결’에 해당하지 않는다. 2011년 9월 이명박 정부 때처럼 한·일 청구권 협정에 근거한 협의를 요청하지 않았다. 형식뿐 아니라 내용상 분쟁도 여전하다. 아베 총리는 합의 뒤에도 위안부 문제는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끝났다는 입장에는 변함이 없다고 밝혔다. 한·일 청구권 협정 제3조에서 밝힌 해석상 분쟁이 지속되고 있는 셈이다. 김창록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아베 총리 발언을 보면 한·일 청구권 협정에 규정한 해석의 분쟁이 지속되는데, 한국 정부는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으로 문제를 삼지 않는다고 한다. 헌재 판결문 취지대로라면 정부는 다시 위헌 상태로 진입했다”라고 말했다. 김동희 정신대문제책협의회 사무총장은 “법률 전문가와 협의를 거쳐 법적 문제를 다시 다투겠다”라고 말했다.

기자명 고제규 기자 다른기사 보기 unjusa@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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