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욕심이 많은 나라다. 전자·자동차 등 세계를 선도하는 산업에서 확보한 경쟁력을 지키고, 플랜트·토목·화학 등의 부문에서 선진국을 따라잡는 동시에, 소프트웨어·바이오 등 엄두를 내지 못했던 분야에도 진출했으면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이제까지 세상에 없었던 ‘만능 산업국가’가 되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이 질문에 대한 서울대 공대 교수 26명의 답변을 모은 것이 바로 이 책이다.

올해 산업계에 가장 큰 충격을 준 사건은 바로 해양플랜트 및 엔지니어링 분야의 주요 기업들이 각각 조 단위가 넘는 손실을 기록한 것이다. 서울대 공대 교수들은 그 원인이 ‘개념설계’ 역량의 부족이었으며, 이 역량을 채우기 위해서는 시행착오의 경험을 축적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 책의 제목이 ‘축적의 시간’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축적의 시간’은 비단 해양 플랜트나 엔지니어링뿐만 아니라 정밀화학, 금속소재 등 많은 산업 분야에서 선진국과의 기술 격차를 줄이고 중국의 추격을 뿌리치기 위한 오직 하나의 조건이기도 하다.

<축적의 시간>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지음지식노마드 펴냄

기업에 대해서는 무엇보다 수직계열화 체제에서 탈피할 것을 강력히 주문하고 있다. 한국의 중소·중견 기업이 경험을 축적해 ‘히든 챔피언’이 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 바로 수직계열화, 즉 납품 대기업에 대한 지나친 의존이라는 것이다. 단일 고객만 상대하다 보니 적극적 기술 개발이나 해외시장 개척에 소홀하게 되고, 대기업의 ‘단가 후려치기’로 인해 재무적 자본 축적도 어려워진다.

한국이 우위를 지키고 있는 전자 및 자동차 부문은 서로 다르게 염려한다. 전자 산업의 경우 현 상황에 안주해 정부·기업·학교가 서로 미루는 사이 중국에 따라잡힐 수 있다는 걱정이다. 전자 쪽이 상대적으로 축적의 시간이 덜 필요한 분야여서 한국이 선진국을 앞설 수 있었기 때문에, 중국의 거센 도전을 받는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정부·기업·학교 모두 정신을 바짝 차려 계속 기술 개발을 하는 것 말고 다른 해법이 없을 듯하다. 자동차 산업은 자율주행·친환경 자동차 등의 개발 속도가 빨라지면서 산업의 패러다임 자체가 바뀔 수 있다는 더욱 근본적인 우려를 하고 있다. 이러한 미래 자동차의 핵심 기술에서 한국이 선진국에 비해 많이 뒤져 있고, 이를 따라잡기 위해 역시 축적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위의 결론으로 돌아간다.

한국이 세계시장에서 뒤처진 세 가지 산업 분야

한국이 세계시장에서 명함도 못 내미는 세 가지 산업 분야가 바로 소프트웨어·바이오·항공우주다. 이 세 분야에서 우선순위를 잡아본다면 소프트웨어-바이오-항공우주의 순서라고 생각한다. 소프트웨어는 제조업 분야와는 달리 축적하는 시간보다는 발 빠른 선점이 필요하며, 활발한 M&A로 경험과 지식을 살 수도 있는 분야라고 본다. 반면 바이오와 항공우주는 대규모 투자와 축적의 시간이 모두 필요한, 정말 쉽지 않은 분야다. ‘한국의 대표적인 모 기업’이 바이오산업에 ‘밑 빠진 독에 물 붓듯 긴 안목으로’ 투자하기를 나도 바라지만, 어차피 그 기업의 주주와 경영자들이 결정할 사항일 것이다.

이렇게 욕심이 많은 나라의 정부는 당연히 고민에 빠지게 된다. 올해 R&D 예산은 18.9조원으로 전체 예산의 5%, 국방비의 절반이다. 나노기술 같은 첨단 분야부터 섬유산업 같은 전통 분야까지 모두 정부의 지원을 바란다. 당장 복지 지출 수요를 맞추기도 부담스러운데 어떻게 해야 하나?

정부의 R&D 지원은 기초과학과 첨단기술, 현재 한국이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분야의 기술 등 축적의 시간이 크게 필요하지 않은 곳에 집중되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축적할 시간이 필요한 개념설계 역량의 확보에 정부의 직접적 개입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물론 중국의 추격은 무섭다. ‘시간도 아니고 공간도 아닌 제3의 길’을 찾는 고민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하지만 급할수록 돌아가라고 했다. 정부의 과감한 지원이 ‘제3의 길’이 될 수는 없다. 축적의 시간을 묵묵히 버티면서 바른 길을 걸었을 때, 설사 중간에 중국이 앞서 나갔다 할지라도 우리는 결국 최고의 자리에 이를 것이다.

ⓒ연합뉴스해양 플랜트의 주요 기업은 2015년 조 단위가 넘는 손실을 기록했다.

 

기자명 오석태 (한국SG증권 이코노미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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