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미국. 레이건을 대통령으로 선출하면서 미국 사회는 ‘새로운 보수화’의 길로 들어선다. 이와 함께 제도적·문화적으로 다양한 성(性)에 대한 공격이 시작되고, 이는 성적 소수에 대한 대대적인 청소 작업으로 이어졌다. 동성애자 인권조례 폐지 캠페인, 게이 유흥가 정화사업, 아동의 성에 대한 히스테리컬한 반응, 반포르노그래피·반(反)성노동 선동 등은 퇴행의 시대와 성 보수화의 관계를 보여준다. 게일 루빈은 이론과 실천의 최전선에서 이런 성 보수화와 치열하게 싸웠던 페미니스트다. 그 40여 년간의 작업을 한 권의 책으로 모은 〈일탈〉은 당대의 현실에 개입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한 학자의 이론적 궤적에 대한 기록이자 그가 미국 사회에 견고하게 뿌리내린 성적 고정관념과 벌여온 ‘혈전(血戰)’에 대한 증언이다.

2015년 한국. 900페이지가 넘는 이 방대한 책이 출간되자마자 ‘완판’됐다. 1980년대 미국과 2010년대 한국이 공명하고 있기 때문일 터다. 전교조 법외노조 통보, 합법적 정당의 강제 해산, 평화집회 운운에 국정교과서 추진을 비롯한 다양한 ‘역사 재인식’ 작업에 이르기까지. 지금 한국은 보수화의 물결을 타고 있다. 그러나 이게 다가 아니다. ‘김치녀’ ‘맘충’과 같은 각종 여성 혐오 표현의 난무, 기독교 우파를 중심으로 한 동성애 공격, 사문화되었던 낙태죄의 부상, ‘양성평등’을 내세워 여성 성소수자는 배제하겠다는 여성가족부 등의 사건이 동시다발로 펼쳐지고 있다. 한 사회의 보수화는 〈일탈〉이 보여주는 것처럼 성에 대한 공격과 맞물려 진행된다. 공적 영역에 대한 통제는 사적 영역에 대한 통제에 기대고 있고, 사적 영역은 남녀 성 역할의 분리, 이성애 중심 가족, 정상·비정상을 가르는 성 규범과 같은 일련의 성적 체계를 그 바탕으로 하기 때문이다. 기실 공과 사의 구분은 임의적이고 ‘사적’이라고 상상되는 것들, 특히 성을 둘러싼 문제야말로 정치적이다.

〈일탈〉게일 루빈 지음임옥희 외 옮김현실문화 펴냄

〈일탈〉은 다양한 성적 실천에 대한 공격이 성 규범 외부와 성 위계 말단에 존재하는 사람들에 대한 제도적 배제와 실존적 위협을 야기한다는 문제의식 위에서 쓰였다. 그런 의미에서 그가 ‘성을 새롭게 사유할 것’을 요청하는 것은 그야말로 죽음을 양산하는 사회를 넘어 새로운 사회로 나아가자는 요청이나 마찬가지다. 성에 대한 사유를 급진화하는 것은 이 사회가 갇혀 있는 보수화의 회로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이기도 하다.

1980년대 미국에는 ‘람보’의 시대가 열렸다. 2010년대 대한민국에서는 늙고 지친 아버지들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 이런 퇴행의 시대에 맞서기 위해 우리도 성을 새롭게 사유하기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루빈의 말처럼 “섹스의 르네상스”가 우리에게도 도래하기를.

기자명 손희정 (페미니스트 비평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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