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은 욕을 먹고 자라나 봐요”
  • 김은지 기자
  • 호수 433
  • 승인 2016.01.05 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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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6월 말부터 두 달 동안 한 글자도 쓰지 못했다. 그 전해 ‘서울시민 인권헌장’이 제정되는 과정을 1년가량 아주 가까이에서 지켜봤지만, 정말 기억이 하나도 나지 않았다. “왜 트라우마라고 하잖아요. 살아남기 위해서 괴로웠던 기억을 지우는. 그런 경우였나 봐요.” 그만큼 문경란(56) 전 서울시 인권위원회 위원장에게도 무산된 인권헌장은 상처였다. 성 소수자 차별금지 조항으로 일부에서 반발이 일자 서울시는 인권헌장의 전원 합의를 요구했고, 합의가 이뤄지지 않자 이를 이유로 선포하지 않았다.

‘우리는 실패했나? 그럼 지난 1년은 뭘까’와 같은 질문을 안고 있을 때 이 구절이 눈에 확 들어왔다. “어떤 인권 문헌이 그 시대의 야만성으로 인해 휴지조각이 되었다고 하자. …인권의 역사는 폭풍이 인정사정없이 휘몰고 지나간 폐허를 몇 개밖에 남지 않은 등불에 의지해 사방을 더듬으며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역정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두 번 넘게 본 미셸린 이샤이의 〈세계인권사상사〉가 새롭게 읽혔다. 그 덕분에 글을 쓸 수 있었다.

인권헌장을 만들기 위해 치열하게 토론하고 고심하고 성찰한 127일간의 여정을 〈서울시민 인권헌장〉이라는 책에 담았다. 일종의 백서다. 기획부터 편집·출간까지 문경란 전 위원장이 직접 챙겼지만, 책의 주인공은 고3 수험생·택시 기사 등 인권헌장 시민위원 190명이라 여긴다. 무보수였지만 다들 열정적으로 인권헌장 만들기에 참여했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시사IN 신선영〈/font〉〈/div〉

찬찬히 되돌아보니, 혐오 발언이 표현의 자유로 둔갑한 악다구니의 현장에서도 얻을 수 있는 게 있었다(혐오 표현에 대한 고민은 세미나로 이어졌고 오는 1월28일에는 공개 토론회도 열 예정이다). 이에 대응하는 동성애 인권단체에 노동자·여성·시민사회 단체 등이 연대했다. 인권이 얼마나 어렵게 얻는 소중한 것인지를 몸소 깨달았다. 이웃의 고통을 외면하지 못하다 보니 어쩌다 그 연대의 가장 앞줄에 문 전 위원장이 서 있었다.

결국은 ‘이 방향’이 맞으니까

별의별 항의도 따라다녔다. 순간에는 무섭고 스트레스도 받았지만, 지나고 보면 코미디 같은 상황이었다. 문 전 위원장은 “후배 한 명이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데 인권은 욕을 먹고 자라나 봐요’라고 했다. ‘그럼 나 오래 살겠다’라고 말하며 웃었다. 결국 이쪽으로 가는 방향이 맞다고 보니까…”라고 말했다.

〈중앙일보〉에서 여성 전문 기자 생활을 했던 그녀는 동성애자 인권과 관련된 일련의 상황이 여성 인권 신장의 과정과 비슷한 길을 가고 있다고 느낀다. 그때도 힘든 고비가 많았지만 결국 한 걸음씩 나아갔다. 자신도 개신교도라는 문 전 위원장은 “동성애자 친구를 사귀어보면 그들도 별다를 게 없는 우리의 이웃이라는 점을 알게 된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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