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 대통령이 재임 중이던 1994년 ‘문민정부’ 때 일이다. 당시 검찰은 기소와 동시에 수사기록 전체를 법원에 제출하고, 변호인은 법원에서 모든 수사기록을 복사한 후 재판 준비를 했다. 그런데 변론기일도 열지 않고 증거조사도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수사기록 일체를 법원에 제출하고, 법관이 미리 수사기록을 다 읽어본 다음 재판을 하는 것은 공소장일본주의(公訴狀一本主義) 원칙(공소를 제기하는 단계에서는 공소장 한 장만 법원에 제출한다는 원칙)에 위배되는 것이었다. 법관이 재판도 시작하기 전에 증거능력 여부가 확인되지 않은 수사기록을 모두 읽어 유죄 심증을 미리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이는 공판중심주의적 심리에 정면으로 반하는 관행이었다.

변호사 단체에서는 이런 불합리한 관행에 문제를 제기했다. 그러자 검찰은 ‘꼼수’를 부렸다. 일반 형사사건은 기소하면서 수사기록 일체를 관행대로 법원에 함께 제출했다. 다만 시국공안 사건은 공소장일본주의 원칙을 엄격하게 준수한다는 핑계로 수사기록을 법원에 제출하지 않고 첫 변론기일에 가서야 법정에 냈다. 당시 형사소송법 제35조에는 “변호인은 소송계속 중의 관계 서류 또는 증거물을 열람 또는 등사할 수 있다”라고 규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검찰은 기소 후에 수사기록을 복사해달라고 신청해도 들어주지 않았다. 첫 기일이 공전되고 재판 절차가 지연되어 구속 피고인에게 상당한 불이익이 초래되는 사태가 빈번했다. 한마디로 시국공안 피고인을 물 먹이는 것이었다.

ⓒ시사IN 조남진황교안 국무총리는 검사 시절 수사기록의 열람과 등사를 거부했다.

전관 변호사들은 ‘우회로’를 찾았다. 검사와의 개인적 관계를 이용해 비공식으로 수사기록을 복사하거나, 또는 보석 신청을 해서 수사기록을 법원에 제출하게 한 뒤 복사하는 등 편법을 활용하기도 했다. 그때만 해도 기소 후 공판기일 전에 검찰에서 수사기록을 복사하는 것이 피고인의 권리로 인식되지 못했다. 수사기록을 복사하는 것 자체가 변호인의 능력으로 여겨졌고, 경우에 따라서는 복사를 둘러싸고 불투명한 거래가 있다는 오해도 있었다.

서울지방변호사회 인권위원회(위원장 박재승·부위원장 안상수)에서 검찰의 업무 처리에 문제를 제기하기로 하고, 그에 적합한 사건을 발굴하려 했다. 때마침 내가 수임한 국가보안법 사건이 있었다. 검사가 1994년 3월21일 피고인을 기소하자마자 바로 다음 날인 3월22일 서면으로 검사에게 경찰 및 검찰에서의 피고인 자술서 및 피의자 신문조서, 참고인들의 진술조서 등이 포함된 수사기록 일체를 열람·등사하겠다고 신청했다. 담당 검사는 며칠간 결정을 하지 않더니 친절하게도(?) 3월26일자 서면으로 이유를 전혀 밝히지 않은 채 열람·등사 신청을 거부한다고 통지해주었다. ‘친절한’ 담당 검사가 현재 국무총리를 맡고 있는 황교안 검사다. 검사가 서면으로 통지해주는 사례는 드문데, 당시 전형적인 공안검사였던 황교안 검사는 소신이 있었던지 서면으로 통지해주었다.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우리가 헌법소원을 제기하는 데는 오히려 도움이 되었다(황교안 검사의 등사 거부는 대한변협이 발행한 1994년 〈인권보고서〉에도 기록되었고, 2013년 2월 황교안 법무부 장관 후보자 인사청문회, 2015년 5월 국무총리 후보자 인사청문회 때도 지적되었다).

나는 의뢰인인 피고인을 청구인으로 해서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 심판 청구를 제기했다. 변호인의 열람·등사를 거부한 피청구인(검사)의 행위는 헌법 제12조 제4항이 보장하는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 및 헌법 제27조 제1항·제3항이 보장하는 신속하고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 등 헌법상 보장된 기본권을 침해한다는 이유를 들어 헌법재판소법 제68조 제1항에 따라 헌법소원 심판을 청구한 것이다.

ⓒ시사IN 자료2009년 5월14일 서울중앙지검 앞에서 용산 참사 유가족들이 검찰의 수사자료 공개를 요구하고 있다.

헌법소원 심판 청구와는 별개로 원래의 형사사건에 대한 공판 절차는 그대로 진행되었다. 황교안 검사는 제1회 공판기일 후인 5월10일에야 수사기록을 법원에 제출했다. 나는 그때서야 수사기록을 복사할 수 있었다. 치열하게 다툴 만한 사건이 아니어서 2회 기일에 증거 대부분에 동의하고 6월3일 1심 판결이 선고되었다. 유죄로 인정하고 집행유예를 선고해 피고인은 석방되었다.

‘위헌’ 결정 났지만… 용산 참사 재판이 남긴 과제

헌법소원 심판 청구 사건은 형사사건 재판이 끝나고 거의 3년이 지난 후인 1997년 11월27일자로 결정(94헌마60)이 선고되었다. 7대2로 위헌 결정이 났다. 당시 김문희·이재화·조승형·정경식·고중석·이영모·한대현 재판관이 “국가 기밀의 누설이나 증거인멸, 증인 협박, 사생활 침해의 우려 등 정당한 사유를 밝히지 아니한 채 전부 거부한 것은 청구인의 신속하고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와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를 침해한 것이다”라며 위헌이라고 밝혔다. 김용준 헌법재판소장과 신창언 재판관은 기소 후 피고인과 변호인의 수사기록 열람·등사권을 인정할 수 없다는 이유로 소수 의견을 개진했다.

당시 검찰은 형사사건이 종결된 상태이기 때문에 열람·등사 거부로 인한 기본권 침해 행위는 이미 종료되었고 헌법소원 심판 청구가 인용된다 하더라도 청구인의 주관적 권리 구제에는 도움이 되지 않기에 헌법소원 심판은 권리 보호의 이익이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헌법재판소는 청구인의 주관적 권리 구제에는 도움이 되지 않더라도 같은 유형의 침해 행위가 앞으로도 반복될 위험이 있다며 검찰 쪽 주장을 일축했다. 헌법재판소는 각국의 입법 예도 살폈다. 그 결과 각국은 직권주의 소송구조(법원이 실체 진실을 발견하기 위해 사건의 심리에 적극 관여해 피고인 신문·증거조사 등을 주도한다)를 취하는 나라든, 당사자주의 소송구조(검사나 피고인 등 소송 당사자에게 주도적 지위를 인정해 당사자 상호 간 공격·방어로 심리가 진행되고 법원은 제3자적 입장에서 판단한다)를 취하는 나라든 공소 제기 후 공판 전 단계에서 그 범위에 차이는 있을지라도 변호인에게 수사기록의 열람·등사를 허용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헌법재판소의 이 같은 결정은 수사기록에 대한 열람·등사가 단순히 수사기관의 시혜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헌법이 기본권으로 보장한 신속하고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헌법 제27조 제1항·제3항)와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헌법 제12조 제4항)를 실현하는 장치라는 것을 확인한 점에서 그 의의가 컸다. 다만 헌법재판소 결정이 수사기록 열람·등사권을 구체적으로 보장하는 장치를 마련하기에는 취약했다. 헌법재판소는 당사자주의에서 출발해 실질적 당사자 대등의 관점을 강조하고, 이 논리를 근거로 검사에게 수사기록 열람·등사 허용 여부를 판단하게 했다. 실천 불가능한 사항을 요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노무현 정부가 들어선 뒤에야 사법제도 개혁 차원에서 증거개시 제도를 도입하면서 입법으로 해결했다. 공소 제기 후의 수사기록에 대해 변호인 또는 피고인이 검사에게 열람·등사를 신청할 권리를 가지고, 검사가 열람·등사를 거부할 경우 법원에 신청해 법원의 결정을 받아 열람·등사할 수 있도록 했다(형사소송법 제266조의 3, 4).

그런데 용산 참사 형사사건에서 검사가 법원의 수사기록 열람·등사 명령을 이행하지 않아 재판이 파행을 거듭한 바 있다. 현행 형사소송법은 검찰이 법원의 명령에 따르지 않을 경우 당해 기록을 증거로 제출할 수 없다고만 규정하고 있다. 검찰이 피고인에게 유리한 증거를 수집하고도 이를 제출하지 않을 경우 피고인으로서는 이를 활용할 수 없다. 검사가 피고인에게 유리한 증거를 제출하지 않는 것은 검사의 객관 의무에 반할 뿐만 아니라 피고인의 방어권을 정면으로 침해하는 행위다. 검사가 법원의 증거개시 명령에 불응할 경우 그 자체로 공소를 기각하거나 재판 절차를 중지하는 등의 실효성 있는 대책이 마련되어야 한다는 과제가 확인되었다.

기자명 김선수 (변호사)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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