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 겨울, 송년회를 마친 후 전철을 타고 동작대교를 지나던 길이었다. 창문 너머 검은 강을 보면서 〈하우스키핑〉(메릴린 로빈슨 지음, 마로니에북스 펴냄)의 마지막 부분을 떠올렸다. 주인공 루스가 타오르는 집을 뒤로하고 다리를 건너는 장면이다.

“…나는 나를 영원히 바꾸어놓았던 사건이 바로 이 다리를 건넌 일이라고 믿고 있다. 다리를 건널 때 두려움은 너무나도 컸다. 두 번이나 나는 비틀거리며 넘어졌다. 북쪽에서 바람이 불어와 바람이 미는 힘과 물살이 끄는 힘이 똑같았고 둘 다 서로에게 지지 않겠다는 듯 팽팽했다. 게다가 캄캄하기까지 했다.

그 순간 무언가가 일어난 것이다. 그 일은 내 뇌리에서 떠나지 않을 만큼 강렬해서, 내가 그 다리를 건너던 것을 떠올릴 때면 한순간만이 렌즈의 볼록한 면처럼 불쑥 튀어나오고 나머지 부분들은 가장자리로 물러나며 점차 작아져만 갔다….”(본문 중에서)

그 후로 12월마다 이 부분을 떠올린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듯 낡은 해에서 새해로 넘어가는 우리.

〈뉴요커〉지 편집자였던 윌리엄 맥스웰이 쓴 짧은 장편 〈안녕, 내일 또 만나〉에는 앨리스 먼로, 도나 타트, 앤 패쳇 등 미국 문단의 대가 이름이 추천자로 붙어 있다. 그렇다 해도 배경이 일리노이 주 링컨이 아니었더라면, 선뜻 첫 장을 열어보지 않았을 것 같다. 그곳은 내가 과거에 한동안 살았던 동네 부근이다. 끝없이 펼쳐지는 옥수수밭, 간간이 선 사일로(저장탑), 지평선 위로 물감 퍼지듯 내리는 석양. 내가 건너온 어떤 다리의 뒤편에 있는 풍경들이다. 이 책 또한 과거에 놓아두고 온 어떤 기억과 죄책감에 관한 이야기이다.

소설은 1920년대 링컨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으로부터 시작된다. 로이드 윌슨이라는 소작농이 총에 맞아 죽었고, 살인범으로는 이웃의 클래런스 스미스가 지목된다. 클래런스는 화자의 친구인 클레터스의 아버지였고, 그 시절 어린 나 또한 어머니를 잃은 상실에 시달리고 있었기에 두 사건은 하나로 모여 소년 시절의 기억을 이룬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 〈/font〉〈/div〉뉴욕 현대미술관에 전시된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새벽 4시의 궁전〉.

이 모든 사건을 맥스웰은 50년 후 어느 날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새벽 4시의 궁전〉을 보면서 재생해낸다. 이 작품은 나무 막대 비계와 유리판, 탑 형태의 골조와 그에 매달린 익룡 형체, 동물의 등뼈 조각, 여자 형체의 추상적 나무 입상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안에서는 한 방에서 다른 방으로 갈 수 있고, 그사이 문은 언제나 열려 있다. 그렇기에 언제든 돌아올 수도 있다. 내가 다시 몸을 돌리면 거기서 클레터스 스미스를 만날 수 있다.

기억의 흔적을 찾아 돌아가는 게 허용되는 순간

맥스웰이 클레터스를 잊지 못한 것은 사건 후 학교 복도에서 마주쳤을 때 가벼운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하고 그저 스쳐 지났기 때문이다. 그 뒤로는 되돌릴 수 없었다. 우리는 헤어질 때 “안녕, 내일 또 만나”라고 인사하지만 그것이 마지막 말이 될 거라고는 절대 알지 못한다.

후회와 죄책감이 크리스마스의 유령처럼 찾아오는 12월 말, 한 해의 끝이다. 다리를 건너야 할 때이지만 ‘새벽 4시의 궁전’의 문이 잠깐 열리는 때이기도 하다. 잃어버렸던 기억의 흔적을 찾아 돌아가는 것이 허용되는 순간이 있다. 그러나 돌아간다고 용서받을 수 있을까? 혹은 그 과거는 정말 존재했을까? 맥스웰은 말한다. “어쨌든 과거에 관한 한 우리는 입만 열면 거짓말을 한다”(55쪽). 혹은 결국엔 거짓말이 될 때까지 과거가 옅어지기를 바라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한 실수에, 혹은 저지르지 않은 잘못에 파괴되지 않고 앞으로 나갈 수 있도록.

기자명 박현주 (번역가·에세이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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