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을 그 작가의 전기적 사실과 무관한 독립적 텍스트로 대하는 것은 현대 비평의 큰 원칙이야. 그렇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작품과 작가가 완전히 단절돼 있을 수는 없지. “이것은 내 자전적 소설이다”라고 작가가 선언한 작품이 아니더라도 작품에는 어떤 식으로든 작가의 체험이 녹아 있을 거라고 나는 생각해. 사실 모든 소설은 기억의 변형이 아닐까? 상상력이라는 것도 기억 위에서 구축되는 것 아닐까?

최근에 로맹 가리의 〈내 삶의 의미〉라는 얄팍한 책을 읽었어. 내용이 얄팍하다는 게 아니라 책 두께가 얇다는 말이야. 문학과지성사에서 나왔어. 이 책은 1980년에 작가가 권총 자살하기 몇 달 전 ‘라디오 캐나다’라는 방송사의 〈말과 고백〉이라는 프로그램을 위해 구술한 자기 삶 얘기야. 로맹 가리는 한국에서도 널리 읽히는 작가이니만큼, 지금부터 할 얘기는 알고 있는 사람이 많을 거야. 그래도 〈내 삶의 의미〉를 읽고 나니, 작가의 유명한 에피소드를 얘기하고 싶네. 프랑스 사람들이 노벨문학상 버금가게 떠받드는 문학상이 공쿠르상이야. 공쿠르상은 한 사람에게 두 번 주지 않아. 그런데 프랑스 문학사에서 공쿠르상을 두 번 받은 사람이 딱 한 명 있어. 로맹 가리지.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 로맹 가리는 외교관이던 1956년, 42세에 〈하늘의 뿌리〉라는 작품으로 공쿠르상을 타. 이 작품은 사라져가는 코끼리를 소재로 삼아서 프랑스 최초의 생태주의 소설이라는 평가를 받지. 작가는 거기에 동의하면서, 자신에게 코끼리는 인권이기도 했다고 말해. “서툴고, 거추장스럽고, 성가셔서 우리가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르는 존재, 진보에 방해가 되는 존재―진보가 곧 문화와 동일시되니까요, 전신주를 쓰러뜨리기나 하는 등 그저 쓸모없게만 보이는 존재, 하지만 무슨 수를 써서라도 보호해야 하는 그런 존재였습니다. 그러니까 나는 우의적으로 코끼리를 인권의 상징적 가치로 만든 겁니다.”(〈내 삶의 의미〉, 61쪽)

ⓒ이지영 그림

그리고 그는 61세였던 1975년, 〈자기 앞의 생〉이라는 작품으로 또 공쿠르상을 타. 〈자기 앞의 생〉은 파리 벨빌 구역을 배경으로 아랍인 사생아와 유대인 창녀 사이에서 피어오르는 짙디짙은 사랑 얘기야. 아, 여기서 사랑이라는 건 연애가 아니라 말 그대로 사랑이란 뜻이야. 보다 근원적인 무상(無償)의 사랑, 어머니와 자식 사이에 배어나는 그 징글징글 순수한 사랑 같은 거 말이야.

그러면 수상작을 결정하는 공쿠르 아카데미가 이 상을 한 사람에게 두 번 주지 않는다는 원칙을 버린 걸까? 그게 아니야. 〈자기 앞의 생〉이 에밀 아자르라는 이름을 달고 출판됐기 때문이야. 출판사 사람들을 포함해 그 누구도 에밀 아자르가 로맹 가리인 줄 몰랐어. 사람들은 에밀 아자르라는 얼굴 없는 작가에 대해 궁금해하기 시작했어. 그러자 로맹 가리는 종조카 폴 파블로비치를 대역으로 내세웠고, 폴은 당숙의 뜻에 따라 에밀 아자르 역을 훌륭히 해내지. 로맹 가리는 제 이름으로만이 아니라 에밀 아자르라는 이름으로도 계속 소설을 발표해. 로맹 가리가 굳이 에밀 아자르라는 유령 작가를 만들어낸 것은 자신의 초기 작품에 열광하던 비평가들이 언젠가부터 그를 한물간 작가로 취급하고 헐뜯는 데 열중했기 때문이야.

그런데 바로 그 비평가들이 〈자기 앞의 생〉만이 아니라 그 뒤 에밀 아자르라는 이름으로 나오는 소설들에 열광하면서, 로맹 가리라는 이름으로 나오는 소설은 계속 폄훼하는 거야. 종조카보다 못한 당숙, 종조카를 따라 하는 당숙이라고 이죽거린 거지. 에밀 아자르와 로맹 가리가 동일 인물이라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을 때도, 이 비평가들은 그걸 어림없는 소리라고 여겼어. 이렇게 싱그럽고 뛰어난 에밀 아자르가, 시든 재능으로 보잘것없는 소설을 쓰는 로맹 가리일 수는 없다는 거지. 로맹 가리는 이 비평가들을 얼마나 비웃었을까? 사실 약간의 감수성이 있는 비평가라면, 로맹 가리와 에밀 아자르의 작품들을 꼼꼼히 비교해 읽어가며, 둘이 동일인이라는 것을 눈치챘을 거야. 그러나 그 잘난 파리 평단에는 그 정도의 비평가도 없었어. 한국의 어떤 작가가 로맹 가리 같은 연극을 한다면, 한국 비평가들 역시 바보 노릇을 하기 십상일 거야.

로맹 가리와 에밀 아자르가 동일인이라는 게 확실히 밝혀진 것은 그가 죽은 이듬해야. 에밀 아자르 노릇을 해온 종조카 폴 파블로비치가 〈우리가 알았던 그 사람〉이라는 책, 그리고 프랑스 텔레비전의 책 프로그램 〈아포스트로프〉를 통해 에밀 아자르가 로맹 가리였음을 밝히지. 그 직후, 로맹 가리가 죽기 직전 갈리마르 출판사와 자기 변호사에게 보낸 〈에밀 아자르의 삶과 죽음〉이 출간돼. 그렇게 7년간의 미스터리가 풀리고 파리 문단을 쥐락펴락하던 평론가들은 멍청이들이었음이 밝혀져.

‘발가벗은’ 로맹 가리를 볼 수 있는 책 두 권

〈내 삶의 의미〉는 로맹 가리의 삶을 대체로 시간순으로 알려줘. 작가는 거기서 자신의 자전적 소설은 〈새벽의 약속〉과 〈밤은 고요하리라〉 그리고 〈흰 개〉 셋이라고 말하지만, 그의 다른 소설들에도 분명히 작가의 경험이 단편적으로 반영됐을 거라고 나는 생각해. 그래도 소설을 읽는 것과 작가가 육성으로 들려주는 자기 삶의 얘기를 듣는 것은 또 다른 체험이지.

로맹 가리가 러시아(정확히는 지금의 리투아니아)에서 사생아로 태어나 폴란드에서 성장하다 프랑스 니스에 정착해 프랑스인이 됐다는 건 두루 알려져 있는 전기적 사실이지. 작가의 어머니는 프랑스라는 나라를 끔찍이도 사랑했고, 자기 아들이 언젠가 외국에서 프랑스를 대표하는 외교관이 될 거라고 믿었어. 실제로 로맹 가리는 2차 세계대전 중에 드골의 자유프랑스군에 소속돼 공군 장교로 폭격기를 몰았고, 해방 뒤에는 외교부에 들어가. 슬픈 것은, 이 모든 것을 그의 어머니가 보지 못했다는 거지. 독일군과 맞서 아프리카에서, 영국에서 싸우는 아들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죽음에 임박해 아들에게 쓴 편지 200여 통을 스위스에 사는 지인에게 맡기고, 순차적으로 보내라고 부탁한 어머니를 상상해봐. 정기적으로 받아보는 편지 덕에 어머니가 건강하게 살아 계시다고 믿고 있다가, 중령 계급장에 훈장까지 달고, 작가로서의 명성과 외교관 초빙 문서까지 들고, 해방된 조국에 돌아와서야 어머니가 이미 3년 전에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알게 된 아들의 심정이 어땠을까…. 〈내 삶의 의미〉에서 나를 가장 울컥하게 했던 것은 이 정황을 회고하는 대목이었어.

이 책에 꼭 나를 대변하는 것 같은 부분이 있어. 옮겨볼게. “나의 관심사는 오로지 여성입니다. 주의하세요, 여자들이 아니라 여성, 여성성 말입니다. 여성을 향한 사랑이야말로 내 삶의 큰 동기이자 큰 기쁨이었습니다. 이 점에 대해 사람들은 온갖 얘기를 떠들어댔습니다만, 사실 나는 바람둥이와는 정반대되는 사람이었습니다. 나는 체질적으로, 그리고 심리적으로 여자를 유혹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 그러니까 나의 모든 책, 내가 어머니의 이미지에서 출발해 쓴 그 모든 것에 영감을 준 것은 여성성, 여성성에 대한 나의 열정입니다. 그래서 간혹 페미니스트들과 갈등을 빚기도 합니다. 내가 세상 최초의 여성적 목소리, 여성의 목소리로 말한 최초의 남자가 예수 그리스도였다고 주장하기 때문이죠. 다정함, 연민, 사랑 등은 여성적 가치들이지요. 그런데 많은 페미니스트는 내가 여성적 특징이라고 간주하는 이런 가치들을 거부합니다.”(114~115쪽)

〈내 삶의 의미〉와 더불어 발가벗은 로맹 가리를 볼 수 있는 책 두 권을 적을게. 하나는 산문과 인터뷰를 모은 〈인간의 문제〉야. 마음산책에서 나왔어. 또 하나는 위에서 말한 〈에밀 아자르의 삶과 죽음〉이야. 프랑스에선 독립된 팸플릿으로 출간된 모양인데 한국에서는 문학동네판 〈자기 앞의 생〉에 부록으로 붙어 있어. 이 책들은 로맹 가리 소설의 빈 구멍들을 채워줄 거야.

기자명 고종석 (작가·칼럼니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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