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핀란드발 기본소득 뉴스로 난처해진 핀란드 정부


핀란드 노총은 왜 기본소득을 반대하나


마틴 루터 킹 암살도 기본소득 때문

 

 

12월7일 핀란드 정부가 월 800유로(약 103만원)의 ‘기본소득’ 지급을 검토 중이라는 기사가 전 세계를 강타했다. 기본소득이란, 국가가 ‘모든’ 국민에게 같은 액수의 현금을 매달 지급하는 일종의 ‘시민 월급’이다. 부유하든 가난하든(보편성), 노동을 하든 하지 않든(무조건성), 시민이라면 기본소득을 받을 수 있다. 대신 다른 유형의 복지 급여는 물론 최저임금까지 줄이거나 폐지하는 방식이다. 핀란드 정부 역시 ‘기본소득으로 복지의 일원화’를 시사하고 있다.

그런데 ‘핀란드의 기본소득 추진’은 뉴스, 즉 ‘새로운 소식’이 아니다. 이미 지난 4월 총선에서 집권한 중도우파 세력이 ‘기본소득의 실험(basic income experiment)’을 약속한 뒤 관련 프로젝트를 추진해왔다. 1970년대 이후 미국 등 세계 곳곳에서 기본소득 제도가 실험되거나 국가정책으로 채택될 뻔하기도 했다(30쪽 상자 기사 참조).

핀란드 정부는 세계적 관심의 대상이 된 뒤 오히려 곤혹스러워하는 눈치다. 기본소득 주무부서인 핀란드 사회보험국(KELA)은 관련 보도가 세계를 휘몰아친 다음 날(12월8일) 성명서를 통해 “보도 내용(‘핀란드가 가까운 시일 내에 기본소득제를 시행한다’)과 반대로, 현 시점에서는 기본소득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예비적 연구가 막 시작되었을 뿐이다”라고 밝혔다.

ⓒAP Photo유하 시필라 핀란드 총리(위)는 “나에게 기본소득의 의미는 사회보장체계의 단순화다”라고 말했다.

핀란드 정부가 난처해할 만하다. ‘기본소득’이란 용어로 떠올리게 되는 복지 내용(보편적이고 무조건적인 ‘시민 월급’)과 핀란드 정부의 계획이 크게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기본소득은 ‘어떻게 시행하느냐’에 따라 엄청나게 다른 사회경제적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기본소득이 그 파격적인 내용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으로 좌파와 우파의 고른 지지를 받을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기본소득 주창자가 ‘시장 자유주의자’라고?

기본소득의 주창자 중 한 사람이 ‘시장자유와 국가개입 반대’를 슬로건으로 내걸었던 미국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이란 사실은 의외로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1960년대 초, 모든 시민에게 최저 생계비를 보장하는 내용의 ‘마이너스 소득세제(negative income tax)’를 주장했다. 정해진 최저 생계비보다 적게 버는 사람에게는 그 차액을 국가 보조금으로 메워주는 제도다. 모든 시민이 최소한의 금액을 소득으로 확보할 수 있는 기본소득제다. 대신 다른 사회보장금이나 최저임금제는 폐지한다. 재원은, 모든 계층의 시민들이 동일한 세율(부자일수록 더 많은 세율을 부담하는 누진세가 아니라)로 낸 세금으로 조달한다.

프리드먼은 최저 생계비는 대체로 낮은 수준으로 설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야 다른 사회보장 급여를 받지 못하게 된 시민들이 아주 낮은 임금을 주는 직장에라도 취업하려 할 것이다. 더욱이 부자와 기업 처지에서는 누진세율을 적용받지 않을 뿐 아니라 사회보험료 분담금 등 추가 부담을 질 필요가 없어진다. 우파 버전의 기본소득론이다. 여기서 기본소득은 저임금 일자리를 확산시키는 사회적 장치다.

범좌파의 기본소득론은 매우 다양하다. 우파와 가장 큰 차이는 ‘기본소득의 액수가 충분히 높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생계를 걱정할 필요가 없는 노동자들은 기업 측과 노동조건을 다투는 협상에서 훨씬 유리한 지위에 설 수 있다. 단지 생존하기 위해 열악한 일자리를 덮어놓고 받아들일 필요가 없어진다. 창업자들은 생계 걱정 없이 과감하게 위험을 감수하면서 창업에 나설 수 있다. 국가 차원에서도 행정 비용을 대폭 줄일 수 있다. 지금처럼 국가 공무원들이 국민 개개인의 재산 상태를 조사한 뒤 빈곤한 사람을 선별해서 복지급여를 주는 방식에서는, 그 조사와 선별에만 엄청난 비용이 들어간다. 그러나 기본소득제에서는 해당 국적의 시민이기만 하면 보편적이고 무조건적으로 돈을 주면 된다. 또한 핀란드 같은 복지 선진국의 빈곤층은 스스로 돈을 벌게 되는 경우, ‘기초생활보장금’ 등 복지급여를 받을 자격이 사라진다. 그래서 취업을 포기하는 경향이 있다. 매달 100만원을 받고 있는데, 120만원 월급을 받으려 고생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런 빈곤층들도 소득 유무를 따지지 않는 기본소득 체계에서는 저임금 일자리에라도 취업해 더 많은 소득을 올리려 할 것이다.

ⓒLehtikuva핀란드 언론에 따르면 월 800유로로는 수도 헬싱키에서 주거·식량 등 기본적인 삶을 유지할 수 없다. 위는 헬싱키에서 쇼핑하고 있는 핀란드 사람들.

훨씬 급진적인 논리도 있다. 이른바 ‘노동 거부’다. 따지고 보면 ‘노동(임금을 받기 위해 하는 일)’은 인간의 활동 중 ‘일부’에 불과하다. 예컨대 집에서 요리하거나, 홀로 그림을 그리고 노래 부르는 행위 등은 ‘대가를 받는 일(노동)’은 아니지만 인간의 삶에 지극히 중요한 부분일 수 있다. 그런데도 왜 인간의 모든 활동 중 ‘노동’에만 특권을 부여하고, ‘노동하지 않는 자(실업자)’는 경멸한단 말인가? 이런 논리에서 기본소득은, ‘노동의 특권화’를 거부하고 ‘노동 이외의 활동’에까지 사회적 인정(소득 제공)을 추구하는 수단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좌·우파를 막론하고, 기본소득론은 ‘노동(과 그 소득에서 갹출되는 사회보험료)’에 기반한 기존 복지국가 시스템을 공격하는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점도 있다. 우파가 기본소득으로 각종 ‘귀찮은’ 복지제도와 ‘노동시장에 대한 국가개입’을 ‘한 큐’에 제거하려 한다면, 좌파는 노동자·시민들의 체제에 대한 자율성을 높일 수 있는 계기로 간주한다. 기본소득론은 동상이몽의 공간이며, 이는 핀란드 정부의 모호한 태도로 이어지는 것이다.

핀란드 기본소득 제도의 세부 내역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논의 과정을 보면, 적어도 ‘좌파들의 희망’과는 상당히 다른 정책이 시행될 가능성이 크다.

우파 버전에 가까운 핀란드 기본소득 제도

우선 기본소득 액수가 1인당 800유로에 불과하다. 핀란드 관련 전문지인 〈핀란드 정치(Finlan Politics)〉(11월5일자)에 따르면, 800유로로는 수도 헬싱키에서 주거·식량 등 기본적인 삶을 유지할 수 없다. 만약 기본소득 수혜자인 ‘모든 국민’에 어린이까지 포함된다면, 4인 이상 가구는 그럭저럭 기본 삶을 유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수혜 연령 역시 아직 논의 중인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기본소득의 필수 요소 중 하나인 ‘무조건성’도 위태롭다. ‘사회적으로 유익한 활동(socially useful activity)’을 하는 시민에게만 기본소득을 제공하자는 주장이 강력히 제기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은둔자나 한량(원칙적 기본소득론에서는 수혜 대상)은 물론이고 무명 예술가, 시민단체 활동가 등까지 기본소득을 받게 될지 불투명하다는 이야기다.

더욱이 이런 추측을 뒷받침할 만한 정황도 많다. 핀란드 정부의 기본소득 프로젝트를 주도하는 사회보험국 올리 캉가스 박사는 “정부로부터 비용 증가 없는 개혁을 지시받았다”라고 한 언론 인터뷰에서 말했다. 총책임자인 리사 휘셀레 사회보험국 국장 역시 “새로운 계획이 시행되면 공공재정에서 수백만 유로가 오히려 절약될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유하 시필라 핀란드 총리도 “나에게 기본소득의 의미는 사회보장체계의 단순화다”라고 말한 바 있다. 핀란드 정부의 기본소득에는 많은 예산이 필요 없다는 의미다. 산술적으로 봐도 그렇다. 핀란드 정부의 내년 재정수입 추정치는 491억 유로다. 그런데 성인 인구(490만명)에게만 월 800유로씩 지급해도 그 총액이 연간 467억 유로다. 그런데도 ‘예산 문제가 없다’면, 수혜 자격을 엄격히 제한한다는 의미로밖에 해석되지 않는다. 원론적 의미의 기본소득과는 거리가 멀다. 좌파 버전의 기본소득이 효과를 발휘하려면 그 액수가 충분해야 한다.

핀란드 기본소득 네트워크 오토 레흐토 의장은 한 인터뷰에서 새로운 중도 우파 정부가 기본소득을 실험하기로 약속했지만, ‘순수한’ 의미의 기본소득 제도(보편성·무조건성)가 시행될 것 같지는 않다고 말했다. “정부는 기본소득을 추진하면서 복지비용을 줄이겠다고 한다.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는 자격을 강화하는 것으로 말이다. 양립할 수 없는 목표들 사이를 종횡무진하는 일종의 정신분열증으로 볼 수밖에 없다.”

이런 증언들로 미루어볼 때, 2017년 이후 언젠가 시행될 핀란드 기본소득 제도는 좌파 버전보다 우파 버전에 가까울 가능성이 높다. 급진 좌파의 꿈(‘노동시장으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저임금 일자리로의 토끼몰이’ 말이다.

ⓒLehtikuva여러 정황을 미루어볼 때 핀란드의 기본소득 제도는 ‘저임금 일자리’를 확산시킬 가능성이 높다. 위는 핀란드 반타의 철도 건설 현장.

그러나 기본소득론 자체가 기존 복지국가 시스템에 대한 강력한 비판이라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한동안 서구 선진국들은 표준화된 소비재를 대량으로 생산해 저렴한 가격에 공급하는 산업 시스템을 유지해왔다. 노동자들은 지루한 노동에도 불구하고 가족을 부양할 수 있는 규모의 임금을 지급받으며 고용 안정성을 누렸다. 이들이 내는 세금과 사회보험료가 복지국가의 경제적 기반이었다.

이 같은 사회적 틀을 짜는 데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던 주체가 바로 노총과 사회민주당이다. 기본소득론에도 2000년대 중반부터 반대 의사를 표시해왔다. 핀란드 탐페레 대학의 요한나 페르키에 박사가 쓴 논문 〈해석의 투쟁:핀란드 공공 담론에서 기본소득〉에 따르면, 노총과 사민당은 높은 수준의 기본소득이 가능하다고 보지 않는다. “모든 이에게 조건 없이 지급되는 급여 수준은 높을 수 없다. 기본소득이 너무 낮으면 빈곤층이 최대 피해자로 전락하고, 너무 높으면 경제 시스템 자체가 지속 가능하지 않다”라는 것이다. 노총의 우려는 낮은 기본소득 때문에 다수의 핀란드인들이 저임금 일자리로 쇄도하는 사태다. 이에 따라 사회 전반적인 임금 수준이 하락하고 노조의 협상력을 떨어뜨릴 수 있다. 그래서 노총과 사회민주당은 복지체계의 급진적 변혁(기본소득)보다 ‘교육 및 직업훈련 강화’ 등을 통한 노동자 숙련화로 좋은 고용을 창출하자고 주장해왔다.

고용불안이 가져온 기본소득이라는 해결책

하지만 이후에도 상황은 개선되지 않았다. 일자리는 계속 줄어들면서 불안정해졌다. 이에 따라 프레카리아트(비정규직·파견직·실업자 집단 등을 가리킨다)가 하나의 집단으로 등장하면서 기존 복지 시스템의 해체와 기본소득을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더 큰 문제는, 이런 경향이 정보통신 혁명에 따른 자동화와 로봇의 도입으로 더욱 격화될 것이라는 점이다.

이처럼 노동시장 진입 자체가 특권이 되고, 일하는 소수의 고소득자와 일할 수 없는 다수의 저소득자로 분할된다면 어떤 대안이 가능할까? 어쩌면 현실성과 별개로 ‘노동과 소득의 분리’라는 기본소득의 원리가 점점 더 설득력을 가지게 될 수도 있다. 세계 최고의 복지국가 핀란드의 젊은 프레카리아트들이 기본소득을 주장하는 주체로 나선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기자명 이종태 기자 다른기사 보기 peek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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