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첩조작 사건, 그로부터 40년
  • 도쿄∙이령경 편집위원
  • 호수 430
  • 승인 2015.12.11 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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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11월22일 중앙정보부는 재일동포 유학생·청년 십수명을 간첩이라고 발표했다. 조작 사건으로 여러 관련자들이 재심을 통해 무죄판결을 받았다. 최근 일본에서 ‘11·22 사건’ 피해자들이 모이는 행사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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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첩 조작’으로 옥살이한 재일동포 피해자들

 

 

2015년 11월22일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11·22 시민집회-재일 한국인 정치범과 재심 무죄판결의 의미를 생각하다’에 간첩 조작 사건 피해자와 재일 한국인·일본인 등 300여 명이 참석해 행사장을 가득 메웠다. “40년 전 재일동포 유학생이 간첩으로 몰렸을 때 저희는 항거하지 못하고 침묵했습니다. 한국인의 한 사람으로서 과거 한국 정부가 저지른 죄에 대해 피해자와 재일동포 여러분께 용서를 청하고 싶습니다.” 함세웅 신부가 축사를 통해 전한 사죄는 청중의 가슴을 울렸다.

1975년 11월22일 중앙정보부(중정)는 ‘학원침투 북괴간첩단’ 검거를 발표했다. 당시 수사 책임자였던 김기춘 중정 대공수사국 부장(박근혜 정부 두 번째 청와대 비서실장)은 ‘모국 유학생 북괴 간첩이 한국 사회의 자유화와 민주화에 편승해 대학가의 학생 데모를 배후조종해 사회불안을 조성하고 이른바 결정적 시기에 국가변란을 꾀했다’라고 밝혔다. 신문은 중정의 주장을 1면에 그대로 싣고 ‘학원침투 간첩 14명’을 사진과 함께 보도했다.

이 중 12명이 일본에서 나고 자란 재일동포(재일 한국인) 유학생이나 청년이었다(간첩 조작 피해자 구원활동 모임인 ‘일본 구원회’는 이후 오사카에 거주한다던 김삼랑이 가상인물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 밖에 재일동포 유학생들과 친했던 서울대·부산대·고려대 등의 재학생이 반공법 위반, 간첩방조죄 등으로 함께 체포되었다. 일본에서도 이 사건을 크게 보도하면서 연고자가 많았던 오사카와 교토 간사이 지역은 발칵 뒤집혔다. 끝이 아니었다. 같은 해 12월 재일동포 유학생 6명이 추가 검거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11·22 사건’의 피해자는 17명으로 늘었다(김삼랑 제외).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사진가〈/font〉〈/div〉일본 오사카 ‘11·22 시민집회’ 무대에 선 길음 판소리단.

보도조차 되지 않은 2차 검거에는 보안사령부도 가담해 이들을 고문하고 간첩으로 조작했다. 당시 대한민국 검찰은 1·2심 내내 재일동포 17명 중 5명에게 사형을, 12명에게 무기징역에서 10년을 구형했다. 몇몇은 법정에서 고문을 받았으며 간첩이 아니라고 호소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이들의 호소를 묵살하고 4명에 대해 사형을 확정하고, 11명에게 무기징역에서 5년을 선고했다. 대법원이 허경조·장영식에게 무죄판결을 내렸지만, 수년이 지난 1979년 1월의 일이었다.

2010년 7월 김동휘씨의 재심 청구를 시작으로 ‘11·22 사건’의 피해자가 잇달아 재심을 청구했다. 지난 11월26일 대법원은 사형수였던 이철씨의 무죄를 확정했다. 이로써 사법부는 피해자 15명(이미 무죄가 확정된 허경조·장영식 제외) 중 8명(김동휘·김원중·김종태·강종건·강종헌·조득훈·이동석·이철)이 불법체포와 구금, 고문으로 받아낸 허위 진술에 근거해 간첩으로 조작되었다고 인정했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 ‘11·22’ 40주년 행사는 지금까지의 재심 무죄판결의 의미를 짚어보고 축하하는 자리였다. 하지만 여전히 피해자는 남아 있다. 피해자 1명은 이미 사망했고, 2명은 죽었는지 살았는지 소식을 알 길이 없다. 그리고 지난 10월23일 서울고등법원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11·22 사건’의 여성 피해자(도쿄 거주)의 재심 재판은 검찰의 상고로 대법원에 계류 중이다.

이날 행사장에는 또 다른 여성 피해자인 김오자씨가 참석했다. 그녀는 한국 사회의 민주화에 도움이 될 공부를 하고 싶어서 부산대학교로 유학을 갔다가 간첩으로 조작되었다. 영장 없이 중정 지하실에 끌려간 그녀는 수사관들의 폭력과 협박 그리고 성고문 끝에 결국 간첩이라고 거짓 자백을 할 수밖에 없었다. 김씨는 1심에서 사형, 2심에서 무기형을 선고받고 감옥살이 9년 후 가석방되었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연합뉴스〈/font〉〈/div〉10월19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11·22 사건’ 관련 토론회가 열렸다. 오른쪽 두 번째가 김원중씨.

2010∼2011년, 한국에서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올 때는 두려움에 몇 달 동안 착신 거부를 설정했을 정도로 후유증은 컸다(나중에 알고 보니 서울에서 걸려온 전화 발신자는 부산대 재학 당시 김오자씨와 연루되어 간첩 조작 사건 피해자가 된 노승일씨였다). 2011년 3월에는 부산대 동기로 같이 잡혀갔던 박준건씨가 사건 이후 처음으로 김씨를 찾아갔다. 함께 재심을 청구해서 명예회복을 하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그녀는 마음을 열지 못했다.

재일동포인 박씨가 자기에게 친절하게 대하면서 쓴 누명인 만큼 무죄를 받아 명예회복을 하길 바라긴 했지만, 김씨 스스로 재심을 할 생각은 없었다. 일본으로 돌아온 그녀는 사건을 잊어야 살 수 있을 것 같아 세상과 인연을 끊고 살았다. 그랬던 김씨가 이번 행사에 참여했을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행사를 기획하고 준비한 것이다. 김오자씨는 일본의 피해자가 재심에서 싸우는 모습과 주위의 조언 덕분에 용기를 얻었다고 했다. 김씨는 “중정 직원에 대한 원망과 후유증, 어머니와 형제·친척·친구에게 준 괴로움과 걱정으로 힘들어했던 나날을 생각하면서 재심을 통해 명예회복을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재심을 결심했다.

한국에서 온 ‘길음 판소리단’의 공연은 청중을 울렸다. 길음 판소리단은 고문 피해를 당한 당사자와 가족이 자기 치유를 위해 서울 길음동에서 판소리를 익히는 모임이다. 1982년 조총련으로부터 공작금과 지령을 받고 대한민국에 잠입해 간첩 활동을 벌였다는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아 9년 가까이 억울한 옥살이를 한 최양준씨는 공연 내내 눈물을 흘렸다. 그는 “보안사령부 서빙고 분실에서 조사를 받을 때만 해도 ‘이러다 죽겠다’ 싶었는데, 재심에서 무죄를 받고 일본에 와서 같은 피해자들 앞에 서니 가슴이 벅차다”라고 말했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사진가〈/font〉〈/div〉통역을 맡은 김오자씨(왼쪽).

집회나 모임 때마다 교가처럼 불렸던 ‘재회’

행사 마지막에 다 함께 부른 노래는 ‘재회’다. 이 노래는 간첩 조작 사건의 피해자 허경조씨의 여동생이 오빠를 기리며 만든 곡이다. 집회나 모임 때마다 ‘재회’는 구원운동의 교가처럼 불렸다. 1975년 사건 발표 사흘 후인 11월25일, 간사이 지역을 중심으로 ‘11·22 재일한국인 유학생, 청년 부당 체포자를 구원하는 모임’이 결성되었다. 그날부터 매일 밤, 간첩 조작을 폭로하는 가두선전을 펼쳤다. 전국 각지에서 30개가 넘은 개별 구원회도 결성되었다. 우리말을 모르는 일본인 구원회 지원자는 재판 방청은 물론 전국의 형무소를 돌며 피해자들을 면회하고 영치금을 넣었다. 구원회는 먼저 기소 내용에 나오는 범죄 사실의 알리바이를 증명하면서 ‘11·22 사건’은 사실무근으로 피해자들은 중형에 해당되는 행위를 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알려 나갔다. 당사자들이 가족의 품으로 돌아올 때까지 집회를 열었고 100만명 서명운동도 펼쳤다.

김오자씨가 1심에서 사형선고를 받자 교토의 청년그룹은 그녀의 무죄 석방을 위한 다큐멘터리를 직접 제작해 전국 상영회를 했다. 영문 팸플릿을 만들어 국제앰네스티, 유엔인권위원회 등 국제사회에도 ‘11·22 사건’을 알리고 피해자들의 구명을 호소했다. 이런 일본의 구원운동 덕분에 사형수까지 모두 무사히 일본으로 돌아왔다고 할 수 있다. 행사 마지막에 간첩 조작 피해자로 인사말을 하던 김원중씨는 ‘구원회’라는 단어를 꺼내다 울컥해 말을 잇지 못했다. 피해자가 구원회에 갖는 감사함이 백 마디 말보다 더 진하게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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