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했던 혁명이 아니다. ‘백성을 위하는 정치’라는 기치 아래 시도됐던 고려 말기의 역성혁명의 밑그림을 바라보는 시선이 본질을 꿰뚫지 못하고 주변을 맴돌기만 한다. 의도적으로 배치한 웃음과 무협이 혁명 담론을 뒷받침하지 못하면서 정의와 힘의 밀고 당기기가 제대로 구현되지 못하는 양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SBS 창사 25주년 특별기획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는 이렇게 지옥으로까지 묘사되는 한국 사회의 혁명 담론이 지니는 모순과 한계를 드러내면서 아슬아슬하게 갈지자 행보를 그리고 있다.

익히 알다시피 역사 드라마는 방영 당시의 현실정치 상황 속에서 해석되고 의미가 증폭된다. ‘지금·여기·우리’에게 왜 혁명을 이야기하는지, 게다가 이미 성공한 역성혁명이라 평가받은 역사적 사건을 ‘지금·여기’로 가져와서 ‘우리’에게 다시 이야기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묻는 것도 그래서다. 〈육룡이 나르샤〉의 혁명 담론이 공론화되지 않는 근본 원인은 어쩌면, ‘지금·여기·우리’ 한국 사회가 600년 전의 성공한 역성혁명에 관심이 없을 정도로 변혁의 동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육룡이 나르샤〉는 이성계(천호진 분), 이방원(유아인), 정도전(김명민), 땅새(이방지·변요한 분), 분이(신세경), 무휼(윤균상)이라는 육룡이 거악(巨惡)으로 상정된 고려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나라 조선을 세우기까지를 그리고 있다. 부패한 고려를 상징하는 도당 삼인방 이인겸(최종원)·길태미(박혁권)·홍인방(전노민)이 육룡의 대척점에 놓인다. 크게 보면 ‘육룡’ 대 ‘도당 삼인방’의 대결을 통해 조선 건국의 당위성을 드러내는 구조이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 도입부에서 육룡이 한 회씩 소개되었던 것처럼 혁명의 주체로 설정된 육룡은 각자의 방식으로 부패한 고려에 항거한다. 도당 삼인방 또한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서로 협조하는 것 같지만, 분점하기 어려운 권력의 속성 때문에 헤게모니 장악을 위한 치열한 물밑싸움을 주고받는다. 〈선덕여왕〉의 덕만과 미실, 〈뿌리 깊은 나무〉의 이도와 정기준의 대결이라는 선명한 구도를 통해 정치의 본질을 파헤쳤던 것과는 사뭇 다른 양상이다.

ⓒSBS 제공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의 주인공들. 윗줄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정도전(김명민), 이방원(유아인), 분이(신세경), 이성계(천호진), 무휼(윤균상), 땅새(변요한).

당대의 혁명 담론을 극적으로 풀어내기 위해 설정한 복합적인 대립 구도는 아이러니하게도 주제의식을 약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대립과 갈등 관계가 지나치게 복잡해지면서 정치와 힘의 길항을 통해 모색하려 했던 혁명의 본질과 명분이 무엇인지 모호해진 것이다. 백성을 위한 정치와 혁명이 육룡 간의 경쟁 혹은 투쟁으로 변질되었기 때문이다. 육룡 모두 백성을 앞에 내세우고 있음에도, 각기 다른 처지에 놓인 육룡의 권력 의지가 공적 혁명이 아니라 사적 욕망이 아닌지 의구심이 드는 것도 그래서이다.

민중의 피폐한 삶이 처절한 권력투쟁의 배경으로 전락해버린 극적 상황에서 육룡 가운데 하나인 이방원의 혁명 담론은 특히 문제적이다. 이방원은 변방을 안정시키는 동시에 혁명의 진채를 구축할 목적으로 상정된 ‘안변책’을 도당에서 통과시키기 위해 장계 위조에 나섰다가 발각되어 스승인 정도전에게 혼쭐이 난다. 물론 정도전은 ‘안변책’ 통과가 이성계의 의지가 아니라 이방원의 계략 덕분이었음을 알고 내심 놀라워하면서도 그의 방법이 틀렸음을 지적한다. 하지만 이방원은 ‘난세지검유별(亂世之劍有別)’이라며 지옥 같은 세상에서는 그에 걸맞은 방법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귀족 신분으로서 우연히 천민의 참상을 목격하고 급작스럽게 혁명의 필요성을 느낀 인물다운 과격한 판단이다.

화려한 무협과 웃음에 뒤섞여버린 혁명 담론

그러고 보면, 이방원은 당대의 나르시시스트였다. 좁은 안목으로 세계를 재단하고 그 판단에 자기도취된, 혁명을 체화하지 못한 귀족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의 혁명은 철저히 위에서 이뤄져 아래로 하사되었다. 오해에서 비롯한 연모의 감정으로 이방원을 돕는 분이, 뛰어난 칼솜씨로 이방원과 뜻을 같이하게 될 땅새, 그리고 가족을 부양해야 한다는 사명감 때문에 이방원과 행동을 같이하는 무휼까지, 도탄에 빠진 민중은 분명 혁명의 주체인 ‘용’으로 호출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방원을 돕는 조력자에 머문다. 선택받은 존재 이방원이 원칙을 무시하면서까지 이루려는 혁명이 시청자의 공감을 얻지 못하고 울림 없는 메아리로 그치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부패한 권문세족들의 수탈과 착취에 시달려 헐벗고 굶주린 백성을 바라보며 흘리는 이방원의 눈물만으로 상대적 박탈감에 분노하는 현실 세계의 분노를 씻어낼 수 없음은 분명하다. 악어의 눈물 같은 이방원의 혁명은 그저 잘 만든, 재미있는 역사 드라마의 한 장면일 뿐이다. 그런 만큼 〈육룡이 나르샤〉와 현실과의 접점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혁명 그 자체가 아닐까 싶다. 하지만 2015년 한국 사회를 지친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혁명은,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변화와 발전을 위해 변혁의 동력을 회복해야 한다는 요구 자체가 불편하기도 하다. 어제보다 오늘이 힘들고, 오늘보다 내일이 더 힘들리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을 만큼 절망이 지배하는 파국의 현실에서 그것이 가당키나 한 요구인가.

〈육룡이 나르샤〉는 개개인의 노력 여하에 따라 세상이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고 속삭이며 ‘지금·여기’의 대중을 유혹한다. 하지만 나르시시스트 이방원의 혁명처럼 그것은 여전히 기득권의 세계에서나 가능한 권력 쟁투이니 아무리 극적 재미로 포장해도 역부족일 수밖에 없다. 물론 처음부터 유혹을 작정했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혁명 담론이 힘을 얻지 못하는 시대적 한계 때문에 〈육룡이 나르샤〉의 진의가 의심받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적 현실과 싸우는 자가 되어야 할 역사 드라마가 오히려 문제적 현실에 타버린, 작품 자체가 폭두(暴豆:솥의 뜨거운 열기를 참지 못하고 튀어오른 콩)가 되어버린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지워지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육룡이 나르샤〉를 보다 보면 어느 순간 혁명이 아닌, 길태미의 눈 화장법을 궁금해하는 ‘나-우리’의 좀비 같은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한 세대 이상을 거슬러 퇴행의 정치가 횡행하는 ‘지금·여기’의 한국 사회는 혼란과 부패로 점철된, 그리고 위민정치의 기능마저 상실한 고려 말기와 크게 다를 바 없다. ‘헬조선’이라는 신조어가 그 방증이다.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하기 위해 거악 고려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조선을 건국하는 과정을 그린 〈육룡이 나르샤〉를 ‘지금·여기·우리’가 주목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정의와 힘의 길항 속에서 혁명 담론을 주창하는 〈육룡이 나르샤〉가 지금까지 보여준 성과는 작금의 퇴행적 정치 현실을 기록한 사료(史料)와 다를 바 없다. 문제는 화려한 무협과 설탕 묻은 웃음 속에 뒤섞여 있을 혁명 담론을 찾아내야 한다. 그래야만 〈육룡이 나르샤〉가 비로소 백성을 위하는 정치의 본질과 그것을 실천하는 이상적인 지도자를 제시했던 〈뿌리 깊은 나무〉의 진짜 프리퀄(그 이전의 일들을 다룬 속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기자명 박상완 (드라마 칼럼니스트·충남대 강사)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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