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권을 취재하다 가끔 놀랄 때가 있다. 각 정당 관계자나 의원실 보좌진, 심지어 국회의원들이 생각보다 ‘열심히’ 일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열심히’는 해도, ‘잘’한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일처리에 가끔 ‘영혼이 빠져나가는 기분’을 느낄 때가 있다. 수북이 쌓인 이메일 보관함을 볼 때면 더욱 그렇다.

어느 날 불쑥 잘 모르는 이름으로 이메일이 왔다. 알고 보니 의원실 메일이다. 메일 계정은 네이버나 다음(한메일)이다. 의원실이나 정당에서 자체 도메인 계정을 만들어 운영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나마 일부 새누리당 당직자들이 ‘@snrp.kr’이라는 계정을 쓸 뿐이다. 국회가 제공하는 ‘@na.go.kr’ 계정을 쓰는 사람도 극소수다.

ⓒ시사IN 양한모

메일 주소는 애교다. 무슨 내용인가 클릭해봤더니 내용이 없다. 어떨 땐 메일 본문의 활자 크기가 제각각이다. 딱 봐도 아래아한글 문서를 그대로 긁어다 붙였다. 표는 망가져 있다. 기자도 사람인지라, 이럴 땐 슬며시 Alt+F4를 누르고 화를 달래려 심호흡을 한다.

잔실수는 그렇다 치자. 가장 황당한 일은 본인들이 공들여 만든 ‘첨부파일’에서 발생한다. 일부 의원실은 홍보 자료나 정책 자료를 보낼 때, 외부 업체에서 운영하는 ‘메일링 시스템’을 이용한다. 그런데 이 시스템은 일정 기간이 지나면 파일을 삭제한다. 이런 자료를 나중에 찾을 때에는 의원실에 직접 문의해야 한다. 더 큰 문제는 의원실에도 찾는 자료가 없을 때다. 담당 보좌진이 방을 나가거나, 의원이 재선에 실패했을 때, 입법부가 행정부를 견제한 역사적인 흔적 자체가 사라진다. 의회 자료의 아카이빙을 개인에게 떠넘기는 구조다. 일처리가 미숙한 건 참아도, ‘오늘의 역사’가 공중에서 사라지는 건 그냥 넘길 일이 아니다.

국회의 공적 문서 아카이빙 수준은 매우 높은 편이다. 상임위나 본회의 주요 자료는 누구나 자료에 접근할 수 있다. 문제는 의원실과 정당에서 따로 만든 기획 자료와 기록물이다. 국감 때면 쌓이는 이런 자료들은 누군가의 하드디스크에서 잠들다 소리소문 없이 폐기된다. 이 자료들을 정당이 직접 체계적으로 정리할 의지는, 아직 없어 보인다. 정당이 아카이빙할 돈이 없다면 국회나 선관위라도 나서야 한다. 정치인들은 국회의원 한 사람이 하나의 헌법기관이라고 주장한다. 그렇게 치면 정치인이 만든 문서 하나하나가 공공의 저작물이다. 알게 모르게, 지금 이 순간에도 사초(史草)가 하나둘 사라지고 있다.

기자명 김동인 기자 다른기사 보기 astoria@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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