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는 선배들의 사회주의에 ‘유토피아적 사회주의’라는 딱지를 붙인 뒤 제 사회주의를 ‘과학적 사회주의’라고 불렀어. 그러니까 과학적 사회주의는 마르크스주의 또는 공산주의의 다른 이름이야. 그런데 마르크스주의가 과학일까? 1980년대 군사독재 정권 시절, 운동권의 많은 활동가와 이론가들은 그것을 과학이라 여기고 마르크스와 그 동료·후배들의 책을 읽어댔어. 그런데 나는 과학은 오로지 자연과학을 뜻해야 한다고 생각해. 우리는 흔히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을 대립시켜. 일부 프랑스 학자들은 인문‘과학’이라는 말도 써. 이것은 19세기 철학자 딜타이가 과학을 자연과학과 정신과학으로 나눈 뒤에 퍼진 습관이야. 그런데 나는 사회‘과학’이나 인문‘과학’이라는 건 존재할 수 없다고 여겨. 자연과학 할 때의 과학은 그 나름대로 엄밀한 앎이지만, 사회과학은 실상 이데올로기에 불과해. 인문(과)학은 말할 것도 없고. 주류 지성사학자들은 이 말에 반대하겠지만.

물론 이데올로기에도 과학적 성격이 있을 수 있어. 예컨대 에드문트 후설의 현상학이나 막스 베버의 사회학은 엄밀함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과학에 가까워. 그렇지만 그것들 역시 본질은 이데올로기일 뿐이지. 하물며 마르크스주의가 과학을 자처한다는 건 어불성설이라고 생각해. 물론 이 말에 화낼 마르크스주의자들이 한국에도 많을 거야. 그렇지만 프로이트주의가 그렇듯이, 마르크스주의도 과학이라기보다는 이야기야, 내가 보기에는. 무엇보다도, 마르크스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탐구를 게을리했어. 마르크스주의에는 심리학이 없어. 특히 인간이 진화의 현 단계에서 지니고 있는 이기심과 탐욕을 무시했어. 그래서 어떤 자연과학자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이론은 우아하지만 종(種)이 틀렸다”고 비아냥거리기도 했지. 마르크스주의는 인간이라는 종에는 맞지 않는다는 얘기야.

 

ⓒ이지영 그림


물론 마르크스는 그 동료 엥겔스와 더불어 인간의 경제와 사회에 많은 통찰을 보여줬어. 두 사람이 함께 쓴 〈공산당 선언〉이라는 팸플릿을 읽어보면, 부르주아 계급이 역사의 진보에 기여한 대목이 상세히 기술돼. 그리고 그것은 사실에 거의 부합해. 그렇지만, 여전히 내 관점에서는, 사회과학이 과학이 아닌 것 이상으로, 역사학도 과학이 아니야. 유럽어에서 흔히 드러나듯, 역사(historia)는 이야기(historia)일 뿐이지. 마르크스는 그 방대한 저술 활동을 통해 옳은 얘기도 했고, 그른 얘기도 했어. 그런데 우리는 옳은 담론과 그른 담론이 섞인 담론을 옳은 담론이라고 하진 않아. 그른 담론이 1%라도 섞여 있다면, 담론 전체가 그른 담론이 돼. 이 말은 물론 마르크스주의에만 해당하는 얘기가 아니야. 사실 과학을 참칭하는 거의 모든 이데올로기는 그른 담론이지. 더 나아가 진짜 과학, 단단한 과학, 그러니까 물리학이나 화학 같은 영역에서도 완전히 옳은 담론은 찾기 어려워. 우리는 앎 앞에서 늘 겸손해야 해.

1980년대 말 동구권의 몰락과 1990년대 초 소련의 해체로 마르크스주의는 틀린 이론이라는 게 확실해졌어. 물론 부자가 망해도 3대는 간다고 그 뒤에도 마르크스주의자를 자칭하는 사람은 많아. 그들은 무너진 마르크스주의 체제를 ‘거짓된’ 마르크스주의라고 폄훼하고 ‘참된’ 마르크스주의를 찾아 헤매는 중이야. 그들은 마르크스의 저서를 새롭게 해석하면서, 마르크스주의를 ‘전회’하거나 ‘복구’하거나 ‘수리’하는 중이야. 그렇지만 나는 이들이 부정직하다고 생각해. 자신의 삶을 부정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쉬운 일이 아니야. 더구나 지식인이라면 더욱 그렇지. 수십 년 동안 마르크스주의자를 자임해 왔는데, 하루아침에 아, 내 생각은 다 틀린 거였어,라고 말하기가 쉽겠어? 특히 그것이 밥그릇과 관련될 경우에는. 마르크스주의를 비판하는 내 마음도 편치는 않아. 역사적 공산주의체제가 한창 흥하고 있을 때라면 비판도 할 만하지만, 망한 체제와 이념을 두고 험담을 하려니 마치 부관참시하는 느낌이야. 그러나 틀린 건 틀린 거야.

역사적 공산주의가 사라진 지 사반세기가 지났지만, 지금도 마르크스주의자를 자임하는 사람들은 많아. 그렇지만 그 사람들 대부분은 마르크스주의의 핵심 영역인 경제학 전공자라기보다는 문화 연구자나 철학자나 정치학자들이야. 물론 경제학자 중에도 마르크스주의자를 자임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지. 한국에도 꽤 있어. 소위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들. 그들 가운데 일반인에게 이름이 가장 널리 알려진 이는 올해 돌아가신 김수행 선생과 10년 전 돌아가신 정운영 선생일 거야. 사실 정운영 선생을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로 못 박는 게 조심스럽기는 해. 그이의 박사학위 논문 주제가 마르크스 경제학의 핵심인 이윤율 저하였고, 이런저런 자리에서 마르크스에 호감을 표하기는 했지만, 그이가 “나는 마르크스주의자요!”라고 공개적으로 선언한 기억은 내게 없거든. 그렇지만 내가 정운영 선생을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라고 부른다 해서 지하의 그분이 내게 화를 내시진 않을 것 같아.

‘정경문사철’을 아울렀던 박람강기의 지식인

정운영 선생 10주기를 맞아 〈시선(視線)〉이라는 제목으로 그분의 선집이 나왔어. 거의 다 내가 예전에 읽은 글이더군. 생전의 정운영 선생은 학자라기보다 저널리스트의 면모를 더 보였더랬어. 그래서 그분의 저작 가운데 이론서라고 할 만한 것은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을 한국어로 번역하고 다듬은 〈노동가치이론 연구〉 말고는 〈자본주의 경제산책〉밖에 없어. 정운영 선생은 신문사 논설위원의 자격을 지니고 주로 칼럼니스트로 활약했어. 그 지면은 대개 〈한겨레〉와 〈중앙일보〉였지. 그 글들을 묶은 칼럼집이 아홉 권이나 돼. 〈시선〉은 그 칼럼집에서 추려낸 글들로 이뤄졌어. 저자가 고인이다 보니, 그 추려진 글에는 편집자의 견해가 많이 반영됐겠지.

정운영 선생의 칼럼들은 그가 경제학자였으니만큼 경제문제를 많이 다뤘지만, 그 한편으로 그가 예외적인 박람강기의 지식인이었던 터라 ‘정경문사철’을 아우르고 있어. 그리고 그 글들은 비할 데 없이 화사해. 게다가 정교하기까지 해. 고금동서의 에피소드들이 칼럼의 서두를 채우고, 수사와 논리가 짝짓기를 하면서 글쓰기의 향연을 이루고 있지. ‘향연’이라는 한자어는 유럽어 symposium을 일본인들이 옮긴 말인데, 어원적으로 ‘함께 마신다’는 뜻이야. 뭘 마시느냐고? 설마 물이겠어? 당연히 술이지.

실상 〈시선〉에 묶인 글들을 읽다 보면, 어느 순간 술에 취한 듯 그 글에 취하게 돼. 독자들이 이 글들에 취하는 것은 그 안의 이데올로기 때문이라기보다 글의 화사함 때문이야. 물론 마르크스 자신도 화사한 글을 쓰는 걸로 유명했지만, 정통 마르크스주의자가 〈시선〉을 읽는다면 정운영 선생의 자유분방함을 비판할지도 몰라. 〈시선〉의 텍스트들은 중층적이고 복합적이며 때로 모순적이야. 서유럽적 교양이 철철 넘치면서도, 그 안에는 민족주의가 자리 잡고 있고, 그 민족주의가 서로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배우자인 마르크스주의와 결혼하고 있거든.

나는 생전의 정운영 선생과 깊은 친분은 없었지만, 그분 글의 열광적 독자였어. 지금 그분의 글을 다시 읽으니, 예전 같은 열광이 샘솟진 않네. 아마 그건 나도 나이를 먹어서일 거야. 〈시선〉에 묶인 글들의 노골적 현학이 좀 유치해 보이고(내가 젊은 시절에 쓴 글에서도 나는 그런 유치한 현학을 느껴), 은근히 드러나는 엘리트주의가 슬그머니 거슬려. 그래도 나는 이 책을 한번 읽어보라고 권해. 정운영 선생의 칼럼에서는 문학 텍스트에 맞먹거나 그것을 넘어서는 미적 광채가 번득이거든. 정운영 선생이 벌인 그 향연에 참여해 한번 한국어에 취해보자고!

기자명 고종석 (작가·칼럼니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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