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값싼 전쟁’과 마주친 세계
  • 천관율 기자
  • 호수 428
  • 승인 2015.11.27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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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1월의 파리는 이제 세계가 ‘옛날 같지 않은 적군’을 맞이했다는 현실을 충격적인 방식으로 보여주었다. 전쟁은 더 이상 값비싼 선택이 아니고, 국가 공백 지대의 전쟁은 테러리즘이라는 형태로 제1세계로 흘러넘쳤다.

커버 스토리


‘값싼 전쟁’과 마주친 세계

IS의 새로운 전략

테러에 오갈 곳 사라진 난민

차별이 테러를 낳은 벨기에

파리 테러 대응에 ‘표’가 달렸다

 

“왜 IS 그 개자식들을 없애버리지 못하는 겁니까?”(CNN 기자) “이건 전통적인 적군이 아닙니다.”(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프랑스 파리에서 IS의 테러가 일어난 사흘 후인 11월16일, 미국 백악관 출입 기자들과 오바마 대통령의 기자회견에서 등장한 대화다. 이 문답은 보기보다 많은 것을 알려준다. 2015년 11월의 파리는 이제 세계가 ‘옛날 같지 않은 적군’을 맞이했다는 현실을 아주 충격적인 방식으로 보여주었다. 우리가 아는 세상과 우리가 사는 세상의 결정적인 차이는 이것이다. 전쟁의 가격이 말도 안 되게 싸졌다.

우리가 아는 세상에서, 전쟁은 아주 값비싼 선택이었다. 대규모 정규군을 보유하고, 규율과 전문성을 유지하도록 군인을 훈련시키며, 잠재적 적군에 뒤지지 않는 화력을 보유하는 데 엄청난 돈이 들어간다. 민주주의가 자리 잡은 이후로는 사람의 ‘목숨 값’도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이 비싸졌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AFP</font></div>파리 테러 희생자를 애도하는 뜻으로 11월16일 파리의 에펠탑이 프랑스 국기 색깔인 파란색·흰색·붉은색 조명을 비추고 있다.

그래서 전쟁은 오직 국가만이 감당할 수 있는 옵션이었다. 그나마도 갈수록 더 비싸졌기 때문에, 21세기 들어서는 국가도 웬만해서는 감당하려 하지 않았다. 이런 세계에서 전쟁은 파괴적이지만 어느 정도는 예측 가능하다. 가능하면 상대도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서로가 안다. 전쟁과 안보는 국가라는 무게감 있고 책임 있는 행위자만이 참여하는 게임이었다. 최소한 형식적으로는, 동등한 무게를 지닌 국가들끼리의 게임은 ‘대칭적’이었다.

이게 달라졌다. 전쟁의 가격이 갈수록 떨어지고 있다. 냉전이 끝난 이후, 아프리카 대륙의 무기 수입액은 52억 달러에서 5억 달러로 줄어들었다. 아프리카가 더 평화로워졌다는 뜻일까. 현실은 반대다. 앙골라·수단 등 아프리카 곳곳이 끝이 보이지 않는 내전의 수렁에서 계속 허우적대거나 새로 빠져들어 갔다. 무기 수입액의 급락은 기괴해 보인다.

수입 품목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냉전 시기의 수입 무기가 탱크나 전투기 등 국가 단위로 운영하는 중량 무기였던 반면, 냉전 이후는 자동소총이나 지뢰 등 경량 무기 위주로 재편됐다. 심지어 소년 병사가 쓸 것을 염두에 두고 자동소총을 일부러 작게 디자인한다는 의혹도 일었다. 러시아산 총기인 칼라시니코프는 하도 튼튼하게 만들어서 구 모델 재고품이 언제나 남아도는 데다 복제품도 많아서 ‘빈자의 무기’ ‘소형 대량살상무기’라 불린다.

유엔은 전 세계의 소년병 수가 30만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한 적이 있다. 이 중에서도 14세 미만 소년병이 적지 않으리라고 보았다. 경량 무기만큼이나 소년병도 ‘값이 싼 전쟁자원’이다. 국가가 붕괴한 내전 지역에서 소년병은 주로 자원입대를 한다. 내전 지역에서는 차라리 그편이 살아남을 확률이 높고, 절망적인 현실에 놓인 10대 청소년에게 총이 주는 해방감은 짜릿한 유혹이다. 징집은 고도의 국가 역량이 필요한 비싼 절차인데, 소년병 자원 시스템은 그걸 간단히 생략한다. 정규군 훈련체계도 없으니 훈련비용 역시 사실상 공짜다. 작고 가벼운 자동소총은 정규 훈련을 받지 않은 10대에게도 충분한 살상능력을 쥐여준다. 이제 전쟁은 국가보다 훨씬 낮은 단위에서 훨씬 싼 값에 훨씬 만성적으로 치러진다.

독일의 정치학자 헤어프리트 뮌클러는 책 <새로운 전쟁>에서 이런 ‘값싼 전쟁’이 우리 시대의 새로운 표준이라고 주장했다. 아프리카와 중동에서 벌어지는 끝이 보이지 않는 내전은 중화기를 칼라시니코프로, 징집 정규군을 자원 소년병으로, 군용 지프를 현대차 1t 트럭으로 대체하는 초저비용 전쟁이다. 비무장 민간인을 상대로 한 ‘전투’에서 중화기의 필요성은 크지 않다. 민간인 학살을 전쟁범죄로 보는 국가 간 전쟁의 금기는 완전히 무시된다.

‘윤곽선이 사라진 전쟁’의 시대

전쟁이 값싸진 이유는 또 있다. 마치 근대 이전 직업 용병의 시대처럼, 전쟁은 점점 더 ‘돈이 되는 사업’으로 되돌아가고 있다고 뮌클러는 지적한다. 국제 규범에 구속받지 않는, 국가 단위 아래의 군벌집단은 전쟁을 통해 국제 범죄경제에 결합하는 방법을 빠르게 배워나갔다. 지하자원은 대표적인 전쟁 경제의 판매품이다. IS의 핵심 돈줄은 석유 밀매다. 국제 시세를 밑도는 가격으로도 하루에만 150만 달러(약 17억3000만원)를 벌어들인다고 알려져 있다. 마약도 훌륭한 돈줄이다. 아프가니스탄 군벌은 아편 재배로 재정을 조달했다. 지하자원도 변변찮고 마약을 재배할 여건도 되지 않을 때는 납치 성매매가 ‘대안’이 되기도 한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AFP</font></div>11월13일 프랑스 파리의 한 식당 밖에 총격 희생자들이 쓰러져 있다.

전쟁은 값비싸지면서 ‘국영화’되었다가, 가격이 떨어지면서 다시 ‘민영화’되는 궤적을 그리고 있다. ‘블랙워터’로 대표되는 민간 군사기업의 출현도 비슷한 맥락이지만, ‘국가 건설에 실패한 지역’에서 특히 이런 경향이 뚜렷하다. 국가 단위의 전쟁은 여전히 비싸다. 국가의 실패는 값싼 전쟁이 등장할 공간을 열어준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전쟁이 1·2차 세계대전이라면, 값싼 전쟁 시대를 대표하는 전쟁은 국가 실패 지역에서의 내전이다. 뮌클러는 이런 전쟁을 ‘윤곽선이 사라진 전쟁’이라고 불렀다. 영토의 경계도, 전시와 평시의 경계도, 적과 동지의 경계도, 전투와 돈벌이의 경계도 무너진다.

윤곽선이 사라진 전쟁은 국가 공백 지대에 머물지 않고 제1세계로 흘러넘쳤다. 가장 단적인 사례가 테러리즘이다. 값싼 전쟁의 승리자들이 종교적 근본주의와 결합할 때 테러의 파괴력은 증폭된다. 그 극단에 IS가 있다. 파리의 테러는 1세계로 흘러넘친 값싼 전쟁의 모든 것을 보여준다. 사용된 무기는 AK47. 값싼 전쟁의 아이콘인 칼라시니코프 1947년형이다. 테러 기획자 압델하미드 아바우드는 테러 5일 뒤인 11월18일 프랑스 경찰과의 총격전 끝에 사망했다. 보통의 국가라면 전투에 휘말린 자국민의 사망은 정권의 정당성 위기로 이어진다. 하지만 아바우드의 사망은 IS의 정당성을 흔들기는커녕 열광적인 ‘순교 지원자’의 행렬을 만들 가능성이 높다.

10대 소년을 잡아끄는 극단주의의 매력은 대단해서, 한국에서도 IS에 가담하러 시리아로 떠난 소년이 여론을 떠들썩하게 한 적이 있다. 종교적 근본주의는 목숨을 버릴 준비가 된 예비군을 넉넉히 공급한다. IS가 지불하는 전투병과 살상무기의 ‘가격’이 극도로 싸다. 이마저도 과대평가다. 전투병과 살상무기는 현지 조달로, IS는 사실상 아무런 비용을 내지 않을 때도 많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AP Photo</font></div> 2001년 9·11 테러 당시 월드트레이드센터 빌딩.

테러를 치명적 안보 위협으로 세계에 각인시킨 사건은 2001년 9·11 테러였다. 2015년 파리 테러는 9·11과도 또 다르다고 분석가들은 지적한다. 9·11은 고도로 상징적인 ‘제국의 심장부’를 노려 타격했고, 서구 유학파 엘리트에게 비행조종술까지 가르쳐가며 기획한 결과물이었다. 하지만 2015년 파리 테러는 AK47을 든 빈민가 출신 테러범이, 별달리 큰 상징성도 없는 극장가(극장이 유대인 소유였다는 설명 정도가 그나마 등장했다)에서 총을 난사했다. 상징성보다 철저하게 대량살상에 초점을 맞춘, 이른바 ‘소프트 타깃’ 테러다. 가뜩이나 싼 가격은 한 번 더 떨어진다.

이렇게 해서 우리 시대의 테러는 일종의 대규모 ‘덤핑(dumping)’이 되었다. 공격 수단을 지나칠 정도로 싸게 확보할 수 있고, 공격자는 어이없을 정도로 값싼 베팅만을 해도 되지만, 당하는 국가는 엄청난 값을 치러야 한다. 9·11 테러에 알카에다가 쓴 돈은 50만 달러였지만, 미국은 테러 손실액과 이후 대테러 전쟁 비용을 합쳐 3조3000억 달러를 썼다. 파리 테러의 추산 비용은 겨우 1만 달러다. 국가 대 국가의 ‘대칭적’ 안보 환경과는 전혀 다른, 가파른 ‘비대칭’이 등장한다. 비대칭 안보 위협은 21세기를 특징짓는 개념이 되었다.

국가 실패 지역의 값싼 전쟁과, 그것이 1세계로 흘러넘친 테러리즘. 두 ‘새로운 표준’은 안보의 핵심 질문을 바꾼다. 미국 군사전략의 기본 노선을 보여주는 ‘방위전략지침’ 2012년판은 미군의 주임무 목록 첫머리에 고전적인 정규전을 제치고 ‘대테러전과 비정규전’을 올렸다. 2008년 프랑스 방위전략 보고서에는 ‘테러’가 107차례 등장해서, ‘전쟁’보다 더 자주 나온다. 상대 국가의 전쟁 의지를 억누르는 데 초점이 가 있던 고전적인 안보 체제는 값싼 전쟁 앞에서는 작동하지 않는다. 일단 거기에는 억누를 수 있을 만큼 제대로 작동하는 국가가 없다. 오바마 대통령은 “마치 국가를 상대하는 것처럼 우리가 대응한다면 우리는 IS의 전략에 말려들게 됩니다”라고 말했다. 이 말은 현실을 꿰뚫는 동시에 책임 회피의 혐의도 있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AFP</font></div>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은 11월16일 의회 연설에서 ‘테러리즘을 뿌리 뽑겠다’고 강조했다.

테러리즘과 국제 안보를 연구해온 조선대 공진성 교수(정치외교학과)는 “특히 패권국가가 민주국가일 때 빠지게 되는 딜레마가 있다”라고 말했다. “IS와 같이 거점을 확보한 테러 집단을 근절하려면 지상군 투입이 필요하다. 하지만 지상군 투입은 대규모 사상자를 발생시키는 정권의 무덤이다. 이 때문에 패권국가는 공습 중심의 작전을 구사하는데, 이러면 민간인 피해가 필연이다. 이는 IS가 세력 확장을 위해 그토록 바라는 ‘서방에 대한 증오’를 대량생산해준다.” ‘지상군 투입 회피-공습-증오 증폭-테러-공습 강화’라는 악순환의 고리가 만들어진다.

국제 안보를 위해 누가 비용을 지불할 것인가

결국 국제 안보라는 일종의 ‘공공재’ 생산을 위해서, 누가 인적·물적 투자라는 비용을 감당할 것인가 하는 질문이 남게 된다. 민주국가는 이 기약 없는 비용을 혼자 뒤집어쓰려 하지 않는다. 그랬다가는 정권이 날아간다. 다자 협력을 통한 ‘비용 분담’이 단기적으로는 실현 가능한 모델인데, 이것은 각국이 군대와 전쟁비용을 최소한으로만 맡으려는 무임승차 문제에 취약하다.

국가 공백 지역에서의 값싼 전쟁이 문제의 근원이라면, 제대로 작동하는 국가를 복원하는 것이야말로 장기적인 해법이 될 수 있다. 덤핑을 못하도록 제값을 내는 공식 참여자로 끌어올리는 셈이다.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게 문제다. 부시 정권기의 미국은 이라크를 점령한 후 민주적인 선거를 실시하기만 하면 조기에 민주국가가 자리 잡으리라고 기대했다. 결과는 이라크의 국가 붕괴였다. 서울대 국제대학원 이근 교수는 “권위주의 국가에서 법치국가나 민주주의 국가로 넘어가려면 많은 고비를 넘어야 하는데, 부시 정부 때 중간에 들어가서 이걸 다 부숴버리면서 국가 이전 상태로 돌아간 꼴이 되었다”라고 말했다.

이 대목에서 대단히 논쟁적인 제안도 등장한다. 공진성 교수는 “특히 진보적인 분들이 동의하지 않겠지만, 지금 세계에는 건강한 지배가 필요하다. 누구도 지배하려고 하지 않는 상황이 오히려 결정적인 문제다”라고 말했다. 당장 제국주의가 떠오르는 제안이다. “물론 스스로 국가를 형성하는 게 비대칭 안보 위협을 없애는 최선의 방법이다. 하지만 그게 작동하지 않는 현실에서, ‘건강한 지배’란 예측 가능한 법치와 치안을 공급하는 문제다. 이것은 현재의 약탈적·착취적 통치나 무정부 상태보다 분명히 낫다. 지금 시리아 일대에 누군가는 이걸 공급해야 하는데, 현실적인 주체는 미국이지만 역시나 민주적 패권국가의 딜레마가 작동한다. 아마도 다자 협력과 공습 모델이 여전히 우세할 것이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AFP</font></div>11월18일 프랑스 항공모함 샤를 드골 호가 IS를 공격하기 위해 툴롱 항에서 출항했다.

이 현실적인 경로에서 테러는 마치 교통사고처럼 근절보다는 억지의 대상이 된다. 국경 보안과 대테러 법안 강화가 대안으로 떠오르는데, 이는 1세계 국가의 핵심 가치인 시민의 자유를 제약할 수도 있는 길이다. 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시민의 생명을 보호하면서도 관용과 법치주의의 가치에 끼칠 충격을 최소화하는 정책을 택해야 한다”라고 논평했다.

이근 교수도 파리 테러를 계기로 글로벌 안보 환경에 근본 변화가 일어나리라고는 보지 않는다. “세계 자본주의 시스템이라는 핵심부를 공격했다면, 그때는 패권국가가 패권을 행사한다. 하지만 파리 테러는 그런 공격으로 보기는 힘들다. 아마도 근본적인 상황 변화를 모색하기보다는 다자 협력을 기조로 해서 억지에 목표를 둘 가능성이 높다.” 값싼 전쟁을 생산하는 국가 실패 지역에 대한 근본 처방보다는 일종의 ‘외과수술’을 택하리라는 전망이다.

전쟁 값이 싸질수록 평화는 비싸진다. 값싼 전쟁은 너무나 저렴하기 때문에 국가 실패 지역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얼마든지 1세계로 흘러넘칠 수 있다. ‘우리나라만 안전한 세계’는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파리는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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