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 프로그램을 다룰 때 만난 한 형사가 이런 얘기를 했다. “먹는 거하고 어린애 가지고 장난치는 놈들은 다 죽여버려야 돼.” 누군가의 어린 자식을 유괴하거나 그를 도구로 삼아 범죄를 저지르는 이들에 대한 증오와, ‘먹는 것’을 가지고 야료를 부리는 자들에 대한 분노를 같은 반열에 두는 표현이었다. 두 범죄 유형의 공통점은 가장 원초적인 인간의 본능을 자극한다는 점이다. 자식에 대한 애착은 인간을 넘어 생명체의 본능이며, 또 인간은 먹어야 사는 동물이 아닌가. 사흘 굶어 도둑질 안 하는 사람 없기 마련이며, ‘사랑이 떠나가도, 가슴에 멍이 들어도’ 밥만 잘 넘어가는 것이 사람 아닌가. 그렇게 두고 보면 ‘먹을 것’을 가지고 장난치는 이들에 대한 분노가 ‘유괴범’ 같은 극악한 파렴치범에 대한 그것과 맞먹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1978년 9월26일 일어난 ‘번데기 사태’는 ‘애들’과 ‘먹을 것’이 기묘하게 결부돼 일어났다.
 
ⓒlake1379 블로그가난한 시절 요긴한 단백질 공급원이었던 번데기. 1978년 ‘번데기 사태’로 번데기는 불량식품의 대명사로 부상하는 불명예를 안게 되었다.
이날 오후, 서울 상계동 등 동북 지역에서 번데기를 먹은 어린이들이 심한 경련과 복통, 구토 등의 증세를 일으키며 병원에 입원해 이들 중 4명이 사망하고 24명이 중태에 빠졌다(이후 사망자는 더 는다). “번데기를 먹은 애들이 죽었다”라는 소리를 간호사들에게서 귀띔받은 한 기자는 특종을 잡은 흥분에 나는 듯이 데스크에 보고했는데, 데스크에서 날아온 소리는 또 하나의 벽력이었다. “경기도 파주에서도 애들이 번데기 먹고 죽었다는데?” 나라가 발칵 뒤집혔다. ‘뻔~ 뻔~’ 소리가 동네마다 골목마다 그치지 않을 무렵, 아이들이 번데기를 먹고 죽다니. 그것도 각각 다른 지역에서.

문제는 번데기가 아니라 ‘번데기 담은 자루’

그런데 이들이 먹은 번데기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문제의 번데기를 판 구멍가게나 행상들이 서울 경동시장의 한 중간도매상으로부터 받아 팔아왔고, 그 도매상이 사들인 경로도 한곳이었다. 의사들은 상한 번데기에 의한 식중독이 아니라 ‘약물중독’ 가능성이 크다고 증언했다. 즉 번데기 유통 과정에서 그 마대에 묻어 있던 농약이 아이들을 잡은 것이다. 번데기는 ‘자연산 농산물’로 식품위생법 관리 대상에서 빠져 있었다. 번데기를 담은 마대들은 일반 화물이나 잡화로 간주돼 열차나 용달차에 화공약품·농약 등과 같이 실리곤 했다. 심지어 외국에 동물 사료로 수출됐다가 세제 등 이물질 성분이 발견돼 반품된 적이 있다는 폭로도 있었다.

사건의 윤곽은 대충 그렇게 그려졌지만 문교부는 대뜸 ‘거리 음식 금지령’을 내렸다. 만만한 것이 번데기 장수들이었다. 당시 멋모르고 번데기 리어카를 끌고 나온 번데기 장수 아저씨는 엄청난 봉변을 당했다. 학교 교사들과 학부모들에게 ‘살인자’ 취급을 받으며 리어카가 부수어지고 경찰에 질질 끌려갔던 것이다. 아이들의 목숨을 앗아간 범인은 번데기가 아니라 번데기를 담은 자루였고, 맹독성 농약을 담은 자루로 스스럼없이 아이들 간식도 퍼 날랐던 사람들과 시스템의 문제였지만 엄청나게 피해를 본 것은 엉뚱하게도 번데기 장수들이었다. 그로부터 꽤 오랫동안 골목 어귀마다 아이들을 끌어 모으던 “뻔~~” 하는 구수한 목소리가 사라졌고 가난한 시절 꽤 요긴한 단백질 공급원이던 번데기는 불량식품의 대명사로 부상하는 불명예를 안았다.
 

ⓒ연합뉴스1989년 ‘우지라면 사건’ 당시 국회에 ‘우지실태진상조사위원회’까지 만들어졌다. 당시 삼양라면 서울공장에서 국회 차원의 실태조사가 이루어졌다(위).
이렇듯 “먹을 것을 가지고 장난치는” 일에 대한 사람들의 분노가 강렬했기에 대중의 분노를 먹고사는(?) 언론 역시 그런 방향으로 민감했고 먹을거리와 관련된 사회악 폭로는 뻔질나게 이뤄졌다. 당장 오늘 내 입으로, 내 식구들 입으로 들어갈 먹을거리에 이상이 있다는 소식에 둔감할 사람은 드물었기에 문제 있는 음식과 관련한 특종 하나면 수백만 독자나 시청자의 관심을 일거에 집중시키면서 낙양의 지가(紙價)나 최고의 시청률을 담보하는 보증수표 노릇을 넉넉히 했다. 그러나 쌀이 많으면 뉘(벼 알갱이)도 많고 산이 높으면 골도 깊은 법. 파렴치한 사회악의 등줄기에 정의의 화살을 꽂은 경우도 있었지만 태산명동서일필(泰山鳴動鼠一匹)로 허무하게 끝나는 사건도 있고, 헛발질이 일으킨 흙먼지에 애꿎은 이들이 피해를 본 사례도 많았다. 사실은 아이들의 식중독에 책임이 없었던 번데기 노점상들처럼 말이다. 1989년 일어난 ‘쇠기름 파동’도 비슷한 사례였다.

1980년대 중반까지 라면 업계 부동의 1위는 삼양라면이었다. 서울 남대문시장에서 꿀꿀이죽 같은 음식을 사먹으려고 줄을 선 사람들을 보며 느끼는 바가 컸던 사업가 전중윤이 일본 라면 회사에 찾아가 농성하다시피 하여 그 공법을 습득해온 이래 삼양라면의 역사는 그대로 한국 라면의 역사가 되었다. 1980년대 중반 이후 안성탕면 등을 내세운 후발 주자 농심의 거센 도전은 삼양라면의 아성을 흔들었고, 마침내 1985년 삼양라면은 40.4%의 점유율을 기록한 농심에 간발의 차로 뒤지면서(39.8%) 오랜 아성이 무너진다. 그러나 진짜 시련은 그 뒤에 있었다. 1989년 11월 삼양라면이 “공업용 쇠기름을 쓰고 있다”라는 익명의 투서가 날아들어 검찰이 수사에 나선 것이다.

기실 이 ‘공업용’이라는 단어는 한국 아닌 미국의 기준에서 비롯됐다. 소를 머리부터 꼬리까지 안 먹는 부위가 없는 한국과 달리 미국의 경우 웬만한 가축의 부속물은 폐기해야 할 쓰레기나 공업용 재료로 분류했던 것이다. 예전의 일본인들만 해도 ‘꼬리곰탕’이라면 기겁을 했다고 하니 이는 위생이나 도덕의 문제가 아닌 문화의 차이다. 하지만 공업용이라는 단어에 사람들은 기겁하고 분노를 터뜨렸다. 마치 우리 입에 그리스(윤활유)를 들이부은 것과 같다는 반응이었다. 언론도 불에 덴 듯 흥분했다. “공업용 우지로 만든 라면·마가린 등이 인체에 어느 정도 유해한지는 아직 분명히 측정된 게 없다는 것이 수사 결과라 한다”라고 말한 바로 뒤에 “(쉽게 썩는 쇠기름의 부패를 막기 위해 쓰인) 산화방지제의 일반적 유해성을 생각할 때 창사 이래 지금까지 온 국민이 먹어온 독성의 누적량이 건강에 해를 끼쳤을 것은 분명하다”(〈동아일보〉 1989년 11월4일 사설)는 논리 비약 3단 점프가 대한민국 유수의 신문 사설로 쓰이고, “보이지 않는 살인자, 부정식품”(〈한겨레신문〉 1989년 11월5일자)이라며 살기 어린 증오의 대상이 될 정도였다. 밥 다음으로 라면을 많이 먹어온 국민의 배신감은 그야말로 화산 폭발 수준이었다.
 

ⓒ연합뉴스2004년 ‘쓰레기 만두’ 사건은 큰 사회적 파문을 일으켰다. 위는 당시 소비자 단체 회원들이 국회 앞에서 ‘만두업체 처벌’을 촉구하는 시위 장면.
한 달여 뒤 공업용 우지로 만들었다 하더라도 라면에는 아무런 해가 없다는 공식 발표가 나오고, 사태 와중에 식품공학자들이 “매스컴의 보도와 관련하여 그 내용이 과학적으로 적절하게 표현되지 못한 사례가 빈번하였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호소했으나 이미 태풍에 휩쓸린 ‘쇠귀에 경 읽기’였다. 삼양라면은 그야말로 초상집이 되었다. 경영진들이 구속되고 공장 가동은 중단됐다. 한국에 라면을 처음 들여왔던 전통의 기업 삼양은 괴멸적인 타격을 입는다. 1997년 오랜 소송 끝에 대법원의 무죄판결을 받아내지만 그 판결은 8년이라는 참혹한 세월을 보상하기에는 너무나 미약했다.


 

ⓒ연합뉴스2011년 4월 학부모식품안전지킴이들이 구청 관계자와 함께 학교 주변 먹을거리 위생 상태를 점검했다.
비극으로 이어진 2004년 ‘쓰레기 만두’ 사건

2004년의 쓰레기 만두 사건도 대단한 파장을 일으켰다. 사건의 발단은 단무지 공장에서 폐기되는 자투리 무, 즉 버려지는 무 조각들을 수집해서 만두소 주원료인 무말랭이를 제조하여 유명 제빵 및 만두업체에 납품한 것이었다. 자투리 무에 독성이 든 것도 아니고 식용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지만, 이를 가공해 단무지를 생산하는 업체가 불결한 시설 관리로 인해 경찰에 적발된 것이 태풍의 진원지가 된다. “먹을 수는 있으나 보통 버리는 무로 만두를 만들었다”라는 뉴스는 기자들의 손을 거쳐 ‘쓰레기’라는 타이틀을 획득했고, 진짜 쓰레기들이 적당히 뒤섞인 뉴스 화면은 시청자들을 격분시켰다. 역시 “먹을 것 가지고 장난치는 놈들”에 대한 분노는 쓰나미처럼 전국을 휩쓸었다. 당시 식품의약품안전청은 이 회사뿐 아니라 이 회사에서 납품을 받아 만두소를 만든 회사 25곳의 명단을 뿌려버렸다. 만두회사에는 마른하늘의 날벼락이 아니라 숫제 하늘이 무너진 형국. 문제가 된 회사에서 자투리 무를 공급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또 한 번 소독을 거쳐 사용했고 이후 식용화된 상품에서 어떤 문제도 발생하지 않았는데 졸지에 “쓰레기를 사람들 입에 처넣은” 천하의 악한으로 전락하고 만 것이었다. 이 ‘쓰레기 만두’를 다룬 토론 프로그램에 전화를 건 한 만두 제조사 사장은 이렇게 절규했다. “단무지 파지가 공장에 오잖아요. 그걸 삶고 우려내고 탈수해서 무취·무미 상태로 해서 세균을 없애요. 뜨거운 열을 가하기 때문에요. (…) 먹어도 배탈도 안 나고 계속 만들어 파는 거죠. 이렇게 적합 판정을 받은 만두를 정부에서 이제야 규제를 하라니…. 만두 만든 놈 다 죽여라, 그러면 만두 만든 생계 가족까지 다 죽여야 되겠습니까.” 그리고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비전푸드 신영문 사장. 나이 서른다섯의 젊은 나이였다.

인류가 지구상에 두 다리를 딛고 선 이래 수십만 년의 역사는 안정적인 먹을거리를 확보하는 투쟁의 역사와 일치했다. 좀 더 많은, 그리고 양질의 먹을거리는 때로 목숨을 건 투쟁의 목표이기도 하고 모든 것을 담보한 약속의 대상이며 그 무엇에도 앞서는 관심의 대상이기도 했다. ‘먹을 것 가지고 장난치는’ 이들에 대한 분노는 그래서 당연한 것이었다. 임오군란을 촉발시킨 건 모래 섞인 쌀이었으며 제정 러시아 시절 전함 포템킨에서 수병들의 분노를 폭발시킨 이유가 썩은 고기였음을 생각해보자. 먹을거리의 ‘부당거래’에 대한 분노는 시공간을 초월해 이어졌고 우리 현대사에도 곳곳에 깊숙이 팬 상흔으로 남아 있다. 대개는 정당한 분노의 결과였겠으나 때로는 터무니없는 불안과 공포가 후벼 판 흉터도 적지 않다. 하지만 역사는 과오와 수훈, 긍정과 부정을 망라한 바퀴를 굴리며 좀 더 나은 세상, 조금은 달라진 세계로 스스로를 굴려간다. 오늘 우리가 ‘신토불이’ 먹을거리를 찾고 ‘국산’이라면 일단 안심하게 된 세월도 그렇게 오래된 것이 아니다. 당장 필자가 어렸을 때에도 국산의 지위는 미천하기 이를 데 없었으니까. 그사이에 알알이 맺힌 설움의 이슬 속에 번데기 장수의 눈물이, 삼양라면의 비극이, 서른다섯 살 가장의 안타까운 절규가 있었다. 그 눈물과 한숨과 절규가 오늘에 이르는 역사적 험로를 닦은 돌 하나로 기억되기를 바란다. 결국 오늘은 어제의 자식이다.

기자명 김형민 (SBS CNBC 프로듀서)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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