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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이 공동농업정책(CAP)을 통해 식량의 자급을 넘어서면서 1970년대에는 미국은 물론 유럽에서도 농산물의 과잉생산 문제가 대두되기 시작했고, 1980년대에는 이 문제가 더욱 심각해졌다. 그리고 카길(Cargill) 등과 같은 곡물 메이저를 비롯해 농식품(Agri-Food) 산업에 투자한 자본의 이윤율도 낮아질 수밖에 없었다.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미국과 유럽의 농업 자본은 새로운 해외시장을 확보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양쪽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면서 미국과 유럽을 중심으로 1986년 우루과이라운드(UR) 농산물 협상이 시작되고, 1993년 협상 타결에 이어 1995년 1월1일부터 농업협정문이 정식으로 발효되었다. 이를 기점으로 한국을 비롯해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한 모든 나라가 농산물 자유무역을 내세운 글로벌 푸드 시스템에 편입되었다.

UR·WTO 체제에 편입하면서 한국은 쌀을 제외한 모든 농산물의 수입이 자유화되었고, 수입 농산물이 국내로 밀려 들어왔다. 그리고 2000년대 접어들면서 농산물의 수입 개방을 더욱 빠르게 확대하는 자유무역협정(FTA)이 잇따라 체결되었다. 칠레와의 FTA를 시작으로 미국·유럽연합(EU)·중국·오스트레일리아·캐나다·뉴질랜드 등 농산물 수출 강국들과 잇따라 FTA를 맺었다. 한편 올해부터는 그동안 자유무역에서 제외되었던 쌀도 관세화로 개방되면서 모든 농산물의 수입이 완전히 자유화되었다. 이처럼 동시다발적이고 전방위적인 농산물 수입 개방이 빠르게 확대되는 것에 비례해 한국의 농업과 농민 그리고 농촌은 빠른 속도로 몰락해왔다.

ⓒ연합뉴스1994년 2월 서울 대학로에서 열린 UR 반대 시위. 1995년 1월1일부터 농업협정문이 정식으로 발효되었다.

1990년대 초반 한국의 식량자급률은 약 45% 수준이었으나, 최근에는 약 23%로 반 토막이 나버렸다. 그리고 750만명에 달하던 농가 인구는 최근 약 280만명으로 62.7%나 줄어들었다. 같은 기간 농업소득은 겨우 1.5배 늘어난 데 비해 농가 부채는 6배 증가하면서 농민의 빈곤화도 빠르게 진행되었다. 2012년 기준으로 농민 23.7%가 가계소득이 최저생계비보다 낮은 절대 빈곤층으로 조사되었다. 또한 농업과 농민의 몰락은 농촌 공동화 및 노령화를 초래해 지역사회를 붕괴시켜왔다. 아기 울음소리가 끊어지고 노인들만 겨우 명맥을 이어가면서 무기력하게 해체되고 있는 농촌의 일상적인 모습을 오늘 우리는 목격한다.

한국 식량자급률은 겨우 23%

농업과 농민 그리고 농촌의 몰락은 도시민을 비롯한 전체 국민의 밥상도 위험하게 만들었다. 식량자급률이 겨우 23% 수준인 한국은 밥상 먹을거리의 약 77%를 글로벌 푸드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미 대다수 국민이 체감하는 바와 같이 먹을거리의 안전을 위협하는 근원적 요소들이 계속 재생산되고 있다. 유전자조작(변형) 식품(GMO), 화학농업, 공장식 축산, 수확 후 처리, 각종 첨가물 등 갖가지 화학으로 무장한 글로벌 푸드가 이미 우리 밥상을 지배하고 있다. 글로벌 푸드가 밥상을 지배하는 것과 비례해서 먹는 것 때문에 발생하는 질병, 즉 식원성(食原性) 질병도 빠르게 증가하면서 우리의 건강과 생명을 위협한다. 예전에는 볼 수 없었던 아토피를 비롯해 비만·당뇨·고혈압 등과 같은 소아 성인병도 그 일부에 해당한다.

ⓒ시사IN 조남진2014년 7월 농림축산식품부 앞에서 열린 농민들의 쌀 개방 반대 시위.

사회 전체로 보면 식원성 질병이 늘어나는 것도 문제지만 이를 소득계층별로 구분해보면 ‘건강 불평등’이라는 새로운 병폐도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고소득층일수록 상대적으로 건강하고 안전한 먹을거리에 대한 접근이 용이하고, 반대로 저소득층일수록 위험한 먹을거리에 더 많이 노출되기 때문에 저소득 빈곤층 가구에서 식원성 질병 피해가 상대적으로 더 많이 집중되는 현상이 점차 일상이 되고 있다. 이미 국내외에서 발표된 수많은 보고서에서 나타나듯 먹는 것이 사람을 차별하고, 이 때문에 사람의 건강도 양극화되는 사회적 병리현상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먹을거리의 가격파동 피해도 더욱 심각해졌다. 원래부터 농산물은 약간의 공급 감소에도 불구하고 가격이 크게 오르는 특징을 갖고 있는데, 농업의 몰락은 국내 농산물 생산 기반을 약화시켜 생산·공급 감소에 따른 가격 폭등을 더욱 심하게 만들었다. 가격 폭등 혹은 폭락이 과거에 비해 발생 빈도가 더 많아지고, 그 변동 폭도 더 커진 것이다. 가격 불안으로 인한 피해는 상대적으로 저소득 빈곤층에 타격을 준다. 부자들이야 먹을거리 가격 변동에 그다지 큰 영향을 받지 않지만 서민들에게는 장바구니 물가 부담이 훨씬 더 크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이처럼 농업의 몰락과 식량자급률 급락, 먹을거리 위험과 식원성 질병의 증가, 먹을거리 양극화 및 건강 불평등, 생산 기반 축소와 빈번한 가격 파동 등은 별개의 현상이 아니라 거대한 초국적 농식품 자본이 지배하는 글로벌 푸드에 종속된 지금 한국의 푸드 시스템이 만들어낸 결과이다. 또한 자동차와 휴대전화를 좀 더 수출하기 위해 농업을 수입 개방의 희생양으로 삼았던 우리의 잘못된 선택이 초래한 결과이기도 하다. 결국 우리 밥상을 초국적 자본의 탐욕에 내맡기게 된 것이다. 우리는 이미 탐욕에 가득 찬 초국적 농식품 자본에게 황금알을 낳는 거위와 같은 신세가 되어버렸다.

이 정부는 잘못된 선택을 되돌리기는커녕 오히려 되돌릴 수조차 없는 막다른 길로 가려 한다. 이른바 ‘수입 개방의 완결판’이라 불리는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가입을 추진하고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FTA는 두 나라 사이에 체결되는 양자 간 자유무역협정이 대부분이지만 TPP는 12개 나라가 참여하는 다자간 자유무역협정이라는 점이 차이가 있을 뿐 기본적인 내용과 골격은 거의 동일하다.
 

ⓒ시사IN 조남진2011년 노량진 수산시장에서 일본산 수산물의 방사능 수치를 조사하고 있다. 현재 후쿠시마 인근 8개 현의 수산물 수입을 금지하고 있다.

TPP 가입은 농산물 수입 개방의 완결판

그런데 한국이 TPP에 가입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12개 회원국에서 개별적으로 동의를 받아야 한다. 그리고 상대방 국가로부터 단지 동의를 받는 대가로 가혹한 ‘입장료’를 지불해야 한다. 이미 그동안 오스트레일리아·캐나다·뉴질랜드 등에는 FTA를 체결하는 방식으로 입장료를 지불해왔는데, 여기에 더해 미국과 일본 등 나머지 국가에도 입장료를 내야 한다.

미국이 요구할 첫 번째 입장료는 아마도 현행 미국산 쇠고기의 수입위생 검역조건 철폐 또는 대폭 완화일 것이다. 30개월 미만의 뼛조각 없는 쇠고기만 수입하게끔 되어 있는 현 규정의 철폐를 요구하는 등, 2008년 국민들이 촛불을 들고 싸운 결과 광우병의 위험으로부터 국민의 건강을 보호하기 위해 그나마 최소한도로 만들어놓은 최후의 장치마저도 없애라는 요구가 등장할 수 있는 것이다.

두 번째 입장료는 쌀이 될 가능성이 높다. 미국산 쌀에 대해 관세를 대폭 낮추거나 혹은 일본과 같이 의무수입 물량을 추가로 더 늘리라고 요구할 터이다. 만일 이 요구를 수용할 경우 미국으로부터 더 많은 쌀이 수입되고 우리 밥상의 주식인 쌀 자급률은 그만큼 낮아질 것이다. 만약 미국산 쌀에 대해 양보할 경우 TPP 회원국인 오스트레일리아와 베트남도 쌀에 대해 미국과 유사한 대가를 요구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중국, 타이 등 현재 한국과 쌀 협상 중인 나라들도 비슷한 대우를 요구하며 우리를 압박할 것이다.

세 번째 입장료는 미국산 GMO 식품과 유기농 식품에 관한 규제를 대폭 낮추라는 요구가 될 것이다. 미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한국은 GMO 및 유기식품에 대한 허용 기준이 더 까다로운데, 이것을 미국 수준으로 낮추면 그만큼 우리 밥상은 불확실성에 더 노출될 것이다.

한편 일본에도 대가를 치러야 하리라 보이는데, 일본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입장료는 일본산 수산물에 대한 수입금지 조치 해제일 것이다. 현재 한국은 방사능 오염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 후쿠시마 인근 8개 현에서 생산된 수산물의 수입을 금지하고 있다. 이 조치를 풀어 일본산 수산물을 수입하라는 요구가 나올 수 있다. 최근에도 일본 정부는 한국의 수산물 수입 규제가 부당한 차별이라며 세계무역기구(WTO)에 이 문제를 가져갔다. 한국 정부의 이 같은 조처가 무역협정 위반인지 검토해달라며 WTO에 패널 설치를 요청하고 나선 것이다.

ⓒ시사IN 자료TPP 가입과 관련해 미국은 미국산 쇠고기의 수입위생 검역조건 철폐·완화를 요구할 가능성이 크다.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재개 협상 내용에 반대하는 대규모 촛불집회가 열렸다(위).

미국·일본·오스트레일리아 등 수많은 나라에 값비싼 입장료를 내면서까지 이 정부가 추진 중인 TPP 가입은 농산물 수입 개방의 완결판이라 할 수 있다. 이전의 농산물 수입 개방 조치들로 인해 이미 농업과 농촌 그리고 농민은 벼랑 아래로 떨어지고 있다. 여기에 TPP 가입으로 쌀과 쇠고기 등 한국 농업의 주춧돌마저 빗장이 완전히 열리게 되면, 회생 가능성마저 기대하기 어렵다.

농업이 회생 불가능한 상황이 되면 우리 밥상은 더욱더 글로벌 푸드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 적어도 먹을거리에 관한 한 한국은 초국적 자본과 글로벌 푸드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먹을거리와 밥상을 글로벌 푸드에 완전히 내주면서까지 TPP에 가입해야 할 이유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없다. 국민의 건강과 안전을 내팽개치면서까지 TPP에 가입해야 할까.

기자명 장경호 (농업농민정책연구소 녀름 부소장)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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