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사재기를 하지 않았다. 목함지뢰 사건 이후 남북 간 군사적 긴장감이 고조되면서 휴전선 인근 주민들에게 대피 명령이 내려졌고, 북한 잠수함이 가동되었다는 뉴스까지 연일 언론을 채웠지만 시민들은 차분했다. 이번만의 예외적 모습도 아니다. 2010년 연평도 포격으로 민간인까지 사망하고, 전 세계 기자들이 인천에 모여 한반도 전쟁 위기를 보도했지만 평범한 한국 사람들은 동요하지 않았다.

이를 ‘안보 불감증’이라 평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북한 하면 ‘빨갱이’ 소리가 자연스럽게 나오는 사회에서, ‘아직 전쟁 중이다, 휴전일 뿐이다’라는 협박이 이어지는 사회에서 불감증이라니. 네덜란드 레이덴 대학의 박강성주 교수는 일상적 전쟁 상태가 60년 넘게 이어진 한반도를 거대한 ‘전쟁 면역 공동체’라고 분석했는데, 시민들의 지나친 차분함은 이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늘 전쟁에 노출되어왔기에 전쟁에 면역되어버린 사회. 연천 지역 주민들이 대피소에서 밤을 새운 8월21일, 서울 시민들은 평소처럼 금요일을 즐겼다. 전쟁을 ‘정상 상태’로 받아들이는 한국 사회의 군사주의가 만들어낸 풍경이었다.
 

ⓒ난나

전쟁을 늘 옆에 두고 살았던 사회는 전쟁을 ‘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자 예비역 몇 명이 자신의 SNS 계정에 “명령 대기 중이다” “불러만 달라”는 글과 함께 군복 사진을 올렸다. 국방부와 육군은 이 글들을 공식 계정을 통해 퍼나르며 “든든하다”고 추어올렸고, “나도 총 쏠 수 있다”라는 댓글도 이어졌다. 탈냉전 이후 한국 정도 규모의 국가가 자국을 전장으로 해서 전쟁을 벌인 적은 없고, 벌일 수도 없다. 잃을 것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사람이 죽고, 사람을 죽이는 문제이다. 그러나 전쟁 면역 사회에서 전쟁은 기꺼이 감수할 무엇이며, 필요한 것이 된다. “나도 총 쏠 수 있다”는 “나도 사람 죽일 수 있다”와 같은 뜻이다. 이런 이야기가 추앙되는 사회에서 사람들은 더 이상 전쟁에 놀라지 않는다.

전쟁에 놀라지 않는다는 것은, 전쟁에 대해 체념한 것이기도 하다. 전쟁에 익숙한 사람들이지만, 개입하거나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군사적 긴장이 끝날 때마다 그랬던 것처럼, 지금도 국방비 증액 이야기가 나온다. 비무장지대(DMZ)의 전투력과 대잠수함 전력을 강화하기 위해 국방비를 대폭 늘리겠단다. DMZ가 새롭게 군사적 요충지가 된 것도, 북한 잠수함이 갑자기 늘어난 것도 아닌데, 더욱이 북한 전체 국가 예산보다도 많은 돈을 수십 년간 국방비로 써왔는데도 여전히 더 많은 돈이 필요하다는 것은 상식적이지 않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러한 비상식에 대해 분노하거나 반대하지 않는다. 전쟁이라는 거대한 이름 앞에서 체념할 뿐이다.

접경지역 주민들이 대피소로 내려가면서 느꼈을 두려움

무섭고 두려워야 하지 않을까. 면역에서 깨어나는 시작은 휴전선 접경지역 주민들이 대피소로 내려가면서 느꼈던 두려움을 나누는 것일지도 모른다. 즉시 대피하라는 방송에 황급히 대피소로 피한 연천군 주민들 중 짐을 제대로 챙긴 이는 거의 없었다. 대피소에서의 1시간이 밖에서의 10시간과 같다며, 공포와 답답함에 지쳐갔다. 전쟁의 가능성만으로도 인간은 이처럼 비참해진다. SNS에 군복이 아닌 비상식량 사진을 올리며 ‘전쟁 나면 도망가겠다, 그러니 전쟁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이어져야 했던 것 아닐까. 긴장을 고조시킨 주원인은 확성기 방송이었다. 전쟁 나면 싸우겠다가 아니라, 확성기 방송 중단하라고, 전쟁이 아닌 외교를 하라고 주장해야 하는 게 아니었을까. 나를 포함해 이 글을 읽는 대다수 사람들은 진짜 전쟁이 어떤지 모른다. 그러나 인간이 만들어낸 가장 비참한 상황이 전쟁이라는 것은 알고 있다. 비참함에 면역이 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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