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직 판사의 작심 고언〉
법원은 보통사람의 삶과는 거리가 있지만 그래서 더 중요한 곳이다. 일반인에게 송사란 대체로 일생일대, 살면서 겪는 한 번의 커다란 고비다. 그런 중요한 고비를 맞아 법정에 섰는데 판사가 내 재판을 5분 만에 끝낸다면? 누구라도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항소·상고가 줄을 잇는 게 현실이다.

판사가 맡는 사건이 과중하다는 데는 다수가 동의한다. 갈리는 건 해법에서다. 대법원은 3심을 다루는 상고법원을 따로 만들자고 주장한다. 현장에서는 사실심을 강화해 항소·상고 자체를 줄여야 한다(〈시사IN〉 제416호 ‘5분 재판을 누가 승복합니까’ 기사 참조)는 목소리가 나온다.

상고법원을 설치하느냐 마느냐의 양자택일로 끝낼 문제는 아니다. 모처럼 법원 개혁이 이슈가 된 만큼, 핵심 과제가 무엇이고 어떤 방향으로 개혁하는 것이 옳은가라는 깊이 있는 논의가 필요하다. 재판을 제대로 받을 권리는 누구나 보장받아야 할 공익적 사안이다.

〈시사IN〉은 이 주제를 정면으로 다룰 현직 판사의 글을 독점 연재한다. 법원의 작동 원리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현장 묘사부터 이론과 현실을 두루 고려하는 대안 모색까지, 현직 종사자만이 쓸 수 있는 글이 5회에 걸쳐 실린다.

“죄송합니다. 많이 못 들어드려서.” 실제 내가 재판할 때 입에 달고 사는 말이다. 일주일 중 하루는 ‘재판 날’이다. 원고·피고를 불러 이야기를 듣고 논의하는 ‘변론기일’을 연다. 오전 9시50분이나 10시에 메모 20~30건을 들고 법정에 들어간다.

“전주지방법원 군산지원 년 월일 민사 제단독 오전 재판을 시작하겠습니다. 탕탕탕.” 이렇게 시작할까? 아니다. 영화와 달리 ‘법 망치’는 없다. 바로 ‘판결 선고’를 시작한다. 판결 선고는 판결 내용을 낭독해서 판결을 내리는 의식이다. 적으면 4~6건, 많으면 8~10건이다. 심지어 20~30건이 되기도 한다. 피고가 답변을 안 하거나(무변론 사건), 주소 불명인 경우(공시송달 사건)의 판결 선고가 겹치면 그렇다. 원고·피고 이름을 부르지만 진짜 출석을 체크하지는 않고, 빠른 속도로 판결의 결론인 ‘주문(主文)’만 5~10분에 걸쳐 낭독한다. “피고는 원고에게 3000만원을 지급하라” “원고의 청구를 기각한다”.

선고 후에는 신건(新件·첫 변론기일이 잡힌 사건)이나 속행(續行·두 번째 이후 기일이 진행되는 것) 사건을 진행한다. 오전 10시부터 12시, 오후 2시부터 3시 정도 사이에 넣는다. 꽉 채우면 3시간 즉 180분. 5분씩 하면 36건, 10분씩 하면 18건을 진행할 수 있다. 평균 7~8분 단위로 20~30건을 넣는다.

오후 3시 이후에는 대개 30분 단위로 증인신문 사건을 진행하는데, 증인신문이 길어지면 7~8분 확보도 쉽지 않다. 제출서류, 사실조회 회신 등 형식적 사항을 체크하면 2~3분이 간다. 소장, 답변서 등을 말로 진술할 기회를 주면 좋지만 시간이 없다. 남은 5분 동안 압축적으로 듣고, 쟁점과 사건의 진행 방향을 논의하며, 다음 기일도 잡아야 한다.

변호사 선임 사건은 그나마 낫다. 첫 재판에서 자신의 인생이 담긴 분쟁의 역사를 판사가 좀 들어주리라 기대한 ‘본인 당사자 사건(변호사 선임 없이 당사자가 직접 나옴)’은 제어가 어렵다. 원고가 5분을 넘기고, 그걸 간신히 ‘끊으면’, 피고가 또 한마디 한다. 두세 번 이런 당사자를 만나면, 뒤 사건 당사자와 변호사로 법정은 가득 차고 웅성거림이 커진다. 10분, 20분, 30분 지연이 될수록 재판장의 마음은 급해진다. ‘끊을’ 수밖에 없다.

ⓒ시사IN 조남진대법원은 3심을 다루는 상고법원을 따로 만들자고 하고, 현장 판사들은 사실심을 강화해 상고를 줄이자고 주장한다. 재판을 위해 입장하는 대법관들.
“죄송합니다. 많이 못 들어드려서. 제가 들고 있는 사건이 너무 많아서, 오늘은 한 건당 5~10분도 드리기 힘듭니다.” 그래도 막무가내인 분께는 “뒤 사건 분들이 많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한번 뒤를 돌아보세요”라고 말한다. 법정 방청석 다수의 질책 섞인 눈초리는 정말 강력하다. 작은 노하우다. 나도 물론 사건의 쟁점별로 여유롭게 의견을 나누고 토론하고 싶다. 그러나 시간이 정말 없다.

호수에서 우아한 자태를 뽐내는 백조의 ‘물밑 발길질’이 보이지 않듯, 판사가 법정 밖 사무실에서 하는 많은 일이 국민의 눈에 보일 리 없다. 금요일이 재판 날이다. 월요일 오후에 조정기일을 연다. 판결은 진정한 분쟁 해결과 화해를 이끌어내지는 못하므로, 화해를 이끌어내는 조정이 활성화되어야 한다. 맞다. 거기에 덧붙이자면, 판사들이 야근을 줄여서 삶의 질을 조금이라도 확보하려면, 몇 건이라도 조정을 해 판결문 쓰는 사건 수를 줄여야 한다. 월요일은 조정 준비, 진행, 사후 처리로 시간이 다 간다.

화·수·목요일이 있다. 뭘 할까. 물론 판결문을 먼저 열심히 써야 한다. 5분 변론의 한계는 있지만 기록을 읽으면서 기일을 3~5회 진행하면, 80~90%는 누가 이길지 감이 온다. 원고·피고도 더 이상 할 것이 없다고 말한다. ‘변론종결’을 하고, 선고를 2~4주 후로 정한다.

판결문은 정말 잘 써야 한다. 법정에서 나의 심증(心證·사건 결론에 대한 판사의 생각)을 전면적으로 드러내고 토론할 기회를 갖기 힘든 이상, 판결문이 내가 원고·피고를 설득할 수 있는 마지막 수단이다. 하나 더, 항소심(1심 판결을 재검토하는 2심)의 ‘눈’을 신경 써야 한다. 판결이 엉망이라는 ‘평판’은 판사에게 최악이다.
 

ⓒ시사IN 자료이미 대법원은 사실심 사실 판단에 관여를 많이 해왔다. 위는 서울 서초동 대법원 청사.
“항소심 가서 다투시지요”

꼼꼼히 보지 못했던 세부 사항과 증거들을 하나하나 검토한다. 다투는 사건 기준으로 간단하면 2~4시간, 복잡하면 5~6시간, ‘깡치 사건(정말 어려운 사건)’은 하루 종일 혹은 2~3일을 매달린다. 나도 최근 의료분쟁 판결문 20쪽가량을 쓰는 데에 2~3일을 투자했다. 판결문만으로 화·수·목요일은 잦은 야근과 함께 소비된다.

기록 읽고 파악하는 흐름을 끊는 각종 결재를 빠뜨렸다. 매주 결재 수십 건을 한다. 계좌·수표 조회 등을 위한 금융거래정보 조회, 문서제출명령 신청, 증인 신청 등. 작지만 꼼꼼히 신청서와 관련 기록을 읽고, 당부(當否)를 판단해야 한다.

판결문 다 쓰면 변론을 진행할 ‘신건’과 ‘속행사건’ 기록을 본다. 변론에서 세부 쟁점별로 증거를 검토해서 잠정 결론을 내고, 원고·피고와 실질적 토론을 진행하려면 신건과 속행기록을 정말 철저히 봐야 한다. 그런데 재판 전날 오후까지, 때로는 저녁까지 판결문에 매달리는 경우가 많다. 재판 전날은 당연히 야근을 한다. 욕심을 부려서, 거의 매주 재판 전날은 날을 새워보기도 했다. 2~3시간 자고 이튿날 다크서클이 생긴 두 눈으로 재판을 진행했다. 사람이 계속할 짓은 아니다.

그래도 철저한 기록 파악은 불가능했다. 25건 기준으로, 한 건에 30분씩만 본다 해도 12.5시간이다. ‘깡치 사건’이라도 몇 개 걸리면, 한 사건당 1~3시간은 그냥 날아간다. 이렇게 1·2심의 사실심은 부실화된다. ‘변론종결’ 후 판결문 쓰려고 기록을 읽다 보면 “이 부분 더 조사했어야 했는데, 이것 좀 이상한데, 물어보고 싶은데” 하는 것이 생긴다. 그래서 가끔 변론 재개(판결선고를 취소하고 다시 변론을 여는 것)를 하기도 하지만, 큰 틀에서 결론이 바뀌지 않을 것 같으면 대개 판결을 선고해 사건을 ‘뗀다’. 그것은 판사의 근무평정(판사도 인사고과 시스템에 상당히 민감하게 반응한다)에 절대적 영향을 미치는, 접수 대비 사건처리율(다들 최소 100%를 꿈꾼다) 때문이다.

문서제출명령 신청과 현장검증 신청, 증인 신청 등 각종 증거 신청은 어떤 사실을 입증하는 데 큰 가치를 갖는다. 하지만 남용될 수도 있고, 무엇보다 절차를 번거롭게 만든다. 예를 들어 제3자에게 문서제출명령을 하려면 제3자를 불러다 묻는 심문기일을 열어야 한다. 원고·피고의 증거 신청을 다 받아주면, 사건 처리가 지연돼 사건처리율에서 밀린다. 판을 크게 벌릴수록 기록은 두꺼워지고 판결문에 쓸 쟁점은 많아진다.

현장검증 신청은 정말 큰 한 방이다. 경험상 현장에 가면 항상 사건 파악에 큰 도움을 얻는다는 것을 알지만, 하루의 반나절을 온전히 날려야 하는 현장검증을 다 받아주기는 참 부담스럽다. 그래서 원고·피고에게 자발적 신청 철회를 권하다 ‘저항’이 심하면 “항소심(2심) 가서 다투시지요”라고 말한다. 사실 1심이 할 소리는 아니다. 1심에서 최선을 다해 모든 주장·입증을 하도록 하고, 항소심은 명백한 1심의 오류나 2심에서 정말 새롭게 발견된 증거만을 조사하는 것이 맞다. 일부 항소심 재판부는 “왜 1심에서 안 하고 항소심에서 해달라고 합니까. 1심에서 못한 정당한 이유를 대세요”라고 하기도 한다는데, 안타깝다. 할 말이 없다.

현장검증이 부담스러운 이유 역시 시간

“사실심인 1·2심이 사실판단 부분에서 심히 부실하니 원래 3심은 법률심이어야 하지만 사실 판단도 검토해줘야, 1·2심의 사실심 충실화가 가능하다.” 상고법원 찬성론 중에 이런 주장도 있다. 가능한 논리이나 현실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판사들도 5분 재판이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상시 야근, 주말 근무로 멱에 찬 상태로 일하는 판사가 많다. 상고법원이 법률심으로서 가진 권한을 넘어 더 충실히 사실심의 사실 판단을 깨는 월권적 행위를 해도, 사실심 판사들은 심리 강도를 높일 여유가 없다.

이미 대법원이 채증법칙 위반, 심리 미진으로 사실심 사실 판단 관여를 많이 했다. 하지만 사실심의 소극적 증거 채택의 심리관행은 바뀌지 않고 있다. 대법원과 법원행정처가 내놓은 한국형 디스커버리(미국에서 당사자들이 주도해 서로 가진 증거자료를 현출시키는 제도) 등의 각종 사실심 충실화 대책도 결국 이 5분 재판의 벽을 넘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아니 사실 대부분 판사도 별다른 감흥이 없다. 대법원, 법원행정처도 알 것이다. 스스로 원해서 내놓은 안도 아니고, 상고법원 통과를 위해 국회의원과 변호사 단체 요구로 명목상 내놓은 사실심 충실화 방안이 별다른 변화를 가져오지 못하리라는 것을. 5년, 10년에 걸쳐 판사 수를 대폭(1.5~3배) 증원해, 5분 재판을 20~30분 재판으로 만들어야만 진정한 의미의 사실심 충실화가 가능하다. 물론 나를 포함해 법관들도, 법관 수 증원과 더불어 기존 재판 모델에 안주하지 않고, 질 높은 새로운 재판 모델의 개발에 노력해야 한다. 상당수의 법관, 특히 고위직 법관들은 판사 수 증원이 판사의 희소성을 떨어뜨려 사회 지위를 낮출 거라고 우려해 내심 반대하기도 한다.
 

기자명 차성안 (전주지방법원 군산지원 판사)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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