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부터 숫자에 약했다. 주산 학원에 오래 다녔지만 덧셈 뺄셈이 자주 헷갈렸다. 1000만 넘어가도 세 자리마다 찍히는 쉼표 때문에 혼동이 왔다. ‘스코어’가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직업을 가지게 된 건 아이러니다. 제작비에도 쫓긴다. ‘새 세대의 출현을 알리는 신호탄’ 따위의 찬사를 들었던 첫 장편영화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는 6만여 관객을 동원했다. 류승완 감독은 그때의 제작일지에도 ‘난 내가 산수에 약하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라고 썼다.
 
ⓒ시사IN 조남진류승완 감독(사진)은 영화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로 2000년 데뷔했다. <베테랑>은 그의 아홉 번째 장편영화다.
아홉 번째 장편영화 〈베테랑〉이 1000만 관객을 넘었다. 〈베테랑〉에도 큰 숫자가 여러 번 등장하지만 영화의 전개는 ‘비’수학적이다. 재벌은 사람을 때려놓고 맷값을 쥐여준다. 형사 아내에게는 입막음용으로 샤넬 가방에 5만원권을 채워서 건넨다. ‘일개 형사’가 재벌을 상대로 직업정신을 발휘한다. 권력의 무게만 놓고 셈해서는 도출 불가능한 결론이 통렬하다. 모처럼의 권선징악이다.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어?”라고 말하는 형사 서도철(황정민)과 재벌 3세 조태오(유아인)의 이야기다. 밀린 임금을 받기 위해 대기업을 찾은 화물 운전사가 건물에서 추락하고 서도철이 그 배후를 쫓는다는 줄거리다. 조태오는 경찰의 압박 속에서도 “나한테 이러고 뒷감당할 수 있겠어요?”라고 되묻는다. 순수하게 악하다. 영화 속 인물이지만 매타작, 승용차 도주 등 에피소드에서 기시감이 든다. 친분이 있는 〈시사IN〉 주진우 기자는 류 감독에 대해 “창의성에 기대지 않고 취재를 열심히 하려는 나쁜 습성이 있다”라고 귀띔했다. 극중 형사도 재벌도 취재의 결과다. 스스로도 창의성이 부족하다고 자조하는 류승완 감독을 서울 삼청동 카페에서 만났다. *스포일러투성이다.

관객 1000만을 넘긴 소감을 안 물을 수 없다.
기분이 나쁘다면 거짓말이고. 근데 솔직히 그리 크게 다가오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숫자에 대한 저항감이 있는 사람인 데다가 나한테 중요한 건 관객 한 사람의 구체적인 반응이다. 다만 영화의 재관람률이 높고 내가 만든 영화 중에 가장 관객층이 폭넓다. 10대 여성부터 장년층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좋아해준다. 단체 관람으로 보는 영화가 아니라 좋아해주는 영화로 상영되는 건 되게 특별하다. 이 영화를 응원해준 사람들의 숫자를 두려워할 만한 대상이 분명히 있을 것 같다. 1000만명 넘는 관객이 사법정의를 원하고 정의가 구현되길 원한다. 더 두려워해야 할 건 10대 관객인데 우리 뒷세대 아이들이 이런 걸 좋아하니 ‘긴장들 하세요’ 이런 느낌이다.

인상적으로 기억하는 반응이 있나?
한 관객분이 마지막 명동에서 싸우는 장면에 대해 말해주었다. 이 영화에서 시민들이 두 사람의 싸움 장면을 (휴대전화로) 찍는 행위가 굉장히 중요하다고. 적극적으로 뭘 한 건 아니지만 뭔가를 지켜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권력자들에게는 대단한 압박이 될 수 있다. 외면하는 순간 패배의 순서가 예상되지만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달라질 수 있다. 그게 감독의 메시지가 아닌가 싶다고 했는데, 그 글이 되게 고마웠다. 속상했던 반응은 ‘저렇게 맞고 저 돈 주면 나도 맞겠다’는 글 아래 진지하게 얘기를 주거니 받거니 하던 것. 우리가 삶의 가치를 어느 정도까지 저당잡혀야 하는 건가 싶었다.

결말에 대해서는 어떤가?
영화를 두고 반쪽짜리 통쾌함이라는 반응도 있는데 그건 의도했던 바다. 조태오가 (감옥에) 들어가도 곧 사면받을 거 아니냐는 거다. 제대로 된 사회라면 이 영화는 해피엔딩이 맞는데, 이에 의문을 품는 건 문제가 있다는 거다. 그런 논쟁이 생기는 것 또한 환영한다.

도입부의 중고차 범죄도 그렇고 취재해서 아이디어를 얻는다고 들었다.
가장 손쉽게 접근하는 건 관련 분야의 기자를 통하는 것이다. 기사에도 기승전결의 드라마가 있다. 그리고 기자들이 ‘구라’가 좋다(웃음). 이번에는 형사도 그렇고 실제 재벌가 주변부에 있었던 양복 재단하는 분, ‘재벌닷컴’ 편집장, 비서 생활을 오래 하셨던 분, 재벌 2세 모임에 참석하는 준재벌 등의 이야기를 들었다. 재벌을 직접 못 만나니까. 간첩 만나기보다 힘들다(웃음).

취재하고 안 하고의 차이가 큰가?
〈주먹이 운다〉를 만들고 나서 (배우 최민식이 연기한) 극중 인물의 실제 모델인 일본인 하레루야 아키라를 만났다. 기사와 다큐멘터리만 보고 만들었다가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그분이 구사하는 유머에 깔깔대고 웃다가 숙소 들어가서 너무너무 반성을 했다. 내가 멋모르고 까불었구나. 이번 영화에서도 마약반 형사한테 들은 얘기를 반영했다. 마약하는 친구들이 워낙 다음 행동을 예측할 수 없는데 안면은 있고. 그래서 수갑을 던진다더라. 알아서 차고 나오라고. 취재하지 않으면 안 나오는 디테일이 있다. 난 상상력이 아주 뛰어난 사람이 아니어서 그런 데서 자극받고 영감을 얻으려고 한다.

 

<베테랑> 촬영 현장의 황정민(왼쪽)과 류승완 감독. 황정민은 형사 서도철 역을 맡아 열연했다.
관객들이 조태오를 보며 실제 재벌들을 지목하는데.
특정 인물을 겨냥하는 모양새는 아니었으면 했다. 인신공격밖에 안 되니까. 조태오라는 인물은 만들어진 괴물이라고 생각한다. 사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가 아니라 단지 미성숙할 뿐이다. 어릴 때 조그만 벌레 가지고 장난칠 때 어떤 죄의식도 없듯이. 특정 인물에 대한 공격이 되면 오히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방향과 멀어질 수 있으니 가급적 더 열심히 주변부를 파고들어 누구라고 딱 꼬집을 순 없지만 모두가 찔끔거리게 만들 수 있는 인물로 가려고 했다.

평소 한국 재벌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 궁금하다.
북한의 큰 문제 중 하나가 세습이라고 보는데 기업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조태오같이 권력을 제대로 사용할 준비가 안 된 사람에게 권력이 주어졌을 때 얼마나 위험하겠나. 한 기업을 일군다는 것은 동네 가게 일구는 것과 좀 다르잖나. 개인 소유로 생각하면 개인이 감당할 수 있는 덩치로 쪼개야 하는데 그게 아니니까. 재벌 문제만이 아니라 사회 전반이 가지고 있는 삶의 가치 체계에 대한 문제이기도 한 것 같다. 영화계에서 보면 대기업이 영화에 진출해서 긍정적인 역할을 한 면도 있다. 그걸 더 잘 해내고 부정적인 것을 개선할 수 있도록 모색해야 할 것 같다. 재벌보다 이런 망나니에 의해 피해를 본 한 소시민의 억울한 사연에 관한 영화다. 남 얘기 같고 딴 세상 이야기 같지만 어떤 식으로든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친다.

10대 관객의 반응을 눈여겨보는 것 같다.
재밌어하더라. 영화 보고 즐거움을 느낀 10대 관객이 반복 관람하고 서로 얘기 나누다 보면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해 한번 얘기할 수 있는 거니까. 이 영화를 만들고 나서 이런 방향으로 하기를 참 잘했다고 생각했다. 〈부당거래〉같이 어둡고 복잡하게 만들 수 있는 소재였다. 300만명 못 미치는 관객이 〈부당거래〉를 봤다. 내가 꼭 하고 싶은 이야기, 해야 할 이야기라면 좀 더 친절하고 쉽게 풀어서 재미있게 하는 것. 그게 대중영화를 만드는 감독의 태도여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든다.

세 자녀는 볼 나이가 되나?
큰애가 열일곱 살이다. 보고 신나했다. 움찔움찔했다고. 어려서 영화감독이 되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전에 봤던 영화들의 순수한 쾌감이랄까. 거기서 내가 열광했던 인물은 다 정의로운 사람들이다. 〈폴리스 스토리〉 〈다이하드〉 〈리셸웨폰〉 그런 영화 속 인물이 너무 멋있었고, 그걸 통해 아무리 격렬한 상황에서도 여자와 아이는 보호해야 한다, 이런 걸 배우는 거다. 그런 순수한 가치를 지닌 영화를 만들어보고 싶었다. 현실의 추악함을 〈베를린〉 〈부당거래〉처럼 그대로 보여줄 수도 있지만 청사진 같은 영화도 있다. 보편적인 가치, 그런 걸 영화에서 재현하고 싶었다.

전작들보다 구도나 메시지가 선명하다. 평면적이라는 평도 있는데.
플롯 자체가 선악 대결로 가는 거니까 복잡하게 만들 필요를 못 느꼈다. 대부분의 관객이 구치소에서 서도철이 사건의 실체에 대해 쫙 풀어낼 때 그걸 반전으로 못 느낀다. 곧바로 액션이 우당탕 흘러가도록 배치한 건 반전 강박에 시달리는 것처럼 보이기 싫어서였다. 응원하는 대상이 승리하고 배 기사가 깨어나는 걸 마지막으로 한 건 나한테 큰 의미가 있다. 내 영화 중 최초로 아무도 안 죽는다. 저항해도 살 수 있다는 거다. 이기기는 힘들겠지만 괴롭힐 수는 있잖아.

류승완 감독은 검찰·경찰 커넥션을 그린 〈부당거래〉 개봉 당시 〈시사IN〉과 인터뷰를 했다. 5년 전이다. 그 자리에서 ‘돈에 대한 책임, 노동자로서의 인식’ 등 영화감독으로서의 철학을 풀어냈다. 그때 생각이 그대로인지 궁금했다. 달라진 점도 있고 견고해진 면도 있었다. 영화는 감독 본인을 닮는다. 〈다찌마와 리〉 〈피도 눈물도 없이〉 〈짝패〉 〈베를린〉 〈베테랑〉 등 늘 ‘류승완표’라는 수식어를 무색하게 만드는 차기작을 만들어온 것처럼 감독의 생각도 한 군데 머물지 않았다. 다만, 금연을 시도 중인 건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했다.

지금도 매번 이 영화가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만드나?
이번에 영화가 잘되었으니까 실패해도 두 편 정도 기회는 있을 것 같은데(웃음). 항상 절박하다. 그건 이미 좀 안다. 대중은 되게 쉽게 사람을 띄워줬다가 아주 가혹하게 등을 돌린다는 걸.

 

영화 <베테랑>의 한 장면. 배우 유아인은 안하무인 재벌 3세 조태오 역을, 배우 유해진(위 왼쪽)은 조태오의 곁을 지키는 오른팔 최 상무 역을 맡았다.
데뷔 후 흥행의 부침 때문인가?
그 점에서는 운이 좋은데 꾸준히 성공만 한 것도 아니고 꾸준히 실패만 한 것도 아니다. 그래도 항상 긴장한다. 스코어에 자꾸 거리를 두는 것도 이 환대가 순식간에 삿대질로 변할 수 있다는 걸 알아서다. 몇 달 후 또 멋진 영화가 나오면 묻힐 거고. 좋을 때도 슬플 때도 다 그냥 지나가니까. 다만 작품 할 때 이게 내 은퇴작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한다. 하루는 ‘인생 역작이 될 거야’라고 했다가, 하루는 ‘난 끝날 거야, 망할 거야, 중장비 자격증 따놨어야 하는데’ 한다.

영화감독은 장사꾼의 머리와 노동자의 손발, 예술가의 심장이 필요한 직업이라고 말했다.
예술가와 장사꾼의 자질이 부족해서 손발이 고생한다. 현장에서 부지런히 뛰어다니고 현장에 지각하지 않고 로케이션 두세 번 반복해서 가고. 그래서 같이 일하는 스태프들의 노동량이 좀 많다.

왜 두 번, 세 번 반복하나?
〈베테랑〉을 60억원 정도의 제작비로 찍었는데 마케팅비까지 합하면 80억원이다. 그 돈이면 할 수 있는 게 얼마나 많은가. 애들 급식을 먹이면 몇 명을 먹이고. 근데 영화를 찍는단 말이다. 점검하면 영화에도 도움이 되지만 예산도 절약할 게 많아진다.

〈부당거래〉 이전 10년은 이른바 ‘취향 타는’ 영화를 만들었다면, 이후 감독으로서 사회적 역할도 고민된다고 말했다. 그대로인가?
그때하고도 달라졌다. 그런 것으로부터도 좀 편안해졌다. 지금 고민은 내가 하고 싶은 거, 해야 하는 거, 할 수 있는 거 그 균형을 어떻게 맞추느냐다. 〈베테랑〉이 균형이 딱 맞아떨어진 케이스 같고. 영화 본연의 엔터테인먼트로서의 흥미, 재미를 유지하면서 가치 있는 영화 만드는 것. 영화는 결국 시간을 다루는 예술매체인데 영화의 가치도 시간의 흐름 안에서 매겨지는 것 같다. 시간의 흐름을 뚫고 살아남을 수 있는 그런 영화를 만드는 게 지금 가장 중요한 목표 중 하나다.

〈주먹이 운다〉가 가장 애정이 가는 영화라고 꼽은 걸 봤다.
좋아하는 영화다. 왜 특별히 그러냐면 극중 승범(배우 류승범은 류 감독 동생이다)이 사는 집이 우리 옛날 집과 똑같다. 촬영할 때 승범이가 세트에 들어가면서 기분이 되게 이상하다고 했다. 승범이랑 나랑 가난했던 시절의 경험들, 우리 형제가 그렇다고 그렇게 폭력적으로 성장한 건 아닌데 당시의 솔직한 얘기들이 있다. 언제 봐도 꾸미지 않은 내 모습을 보는 것 같다.

류승완 감독에게 액션이란?
이것도 달라진 점인데 액션 자체로 뭔가 보여주는 건 별로 의미 없고, 어떤 사람이 누구와 어떻게 싸우는가 하는 영화적인 흐름이 더 중요한 것 같다. 〈베테랑〉도 액션이 화려해서 열광한 게 아니라 때려주고 싶은 놈 뺨 때려주니까 시원했던 거다. 액션이 아직까지 순수하게 즐길 수 있는 영화적 형태의 마술이라는 점에서는 여전히 흥미롭다.

영화 생각을 안 할 때는 뭘 하나?
뭐든 영화와 연관된다. 저거 영화에서 써먹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식구들 관련된 생각 외에는 그렇다. 권투를 하는데 생각을 온전히 비우고 하루에 몇 시간씩 그렇게 있는 게 좋다. 금연하려는 것도 몸이 부대껴서다. 스파링 2라운드를 못 서겠다. 주진우, 강풀, 이승환 형, 김제동 이렇게 모여서 뭐 먹으러 갈까 생각하기도 한다.

〈베테랑〉 후반 작업 때 시간 여유가 있어서 하루는 영화가 잘될 거야, 하루는 안될 거야를 반복했다고 들었다. 흥행에 성공한 지금은 어떤가.
이제는 ‘다음 영화를 사람들이 좋아할 거야, 아니야 싫어할 거야’, 그 반복이다. 조울증같이(웃음). 근심·걱정이 체질인가 보다.

기자명 임지영 기자 다른기사 보기 tot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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