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과 주중을 나누어 도시와 시골을 오가며 사는 것. 누구나 꿈꾸어보았을 법한 삶의 방식이다. 이제 아무도 한 직장에서 평생을 보내겠다고 마음먹지 않듯, 집을 꼭 한곳에만 두고 살아야 한다 생각지 않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있다. 언젠가 소설가 파울로 코엘료가 1년을 3등분해 4개월은 수도 리우데자네이루에 머무르며 출판사와 계약을 하고, 4개월은 리우데자네이루 근교의 집에서 친구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나머지 4개월은 스위스에 있는 작은 오두막으로 옮겨 칩거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거다 무릎을 쳤다. 언젠가 나도 그런 삶을 살겠다고 생각했고 제일 먼저 떠올린 곳은 아름다운 섬, 제주였다.
이 생각을 하자마자 제주에 집을 짓겠다며 건축주가 찾아왔다. 공부하는 것이 직업인 부부는, 초록으로 둘러싸인 마을길을 걷는 것만으로도 혹사당했던 눈이 편안해진다며 주말에 지낼 작은 집을 지어달라고 했다. 집은 열두어 평으로 아주 작아도 괜찮고, 간소한 모양새면 좋겠다고 했다. 방은 하나여도 괜찮고, 거실 겸 주방이 있고, 화장실 하나. 그리고 다락방 하나가 있으면 좋겠다는, 어찌 보면 평범한 요구 사항이었다.
최소한의 공간에 삶의 필수 요소들이 차곡차곡 잘 담겨 있는 작은 집을 지어보고 싶었다. 그 무렵 건축가이자 시인인 함성호씨가 쓴 〈철학으로 읽는 옛집〉을 읽고 있었는데 여기에 마침 퇴계의 도산서당 이야기가 실려 있었다. 선비의 검박한 거처는 ‘삼간지제’를 엄격히 지켜 짓는 것이 법도였는데, 여기에 실용적인 쓰임을 생각한 건축가 퇴계가 얼마나 많은 궁리 끝에 ‘기본을 지키면서도 변형을 통한 편리를 얻어내었는지’에 대한 이야기였다.
삼간지제(三間之制)란 머무를 방 한 칸,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줄 부엌 한 칸, 의례와 사교의 공간인 마루 한 칸을 두어 최소한의 규모로 집을 짓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현대의 삶에 맞게 적용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방 한 칸, 마루 한 칸, 부엌 한 칸의 구성은 같이 지키되 그 해석을 좀 달리한 집이다. 가장 큰 변화는 역시 부엌이다. 옛사람은 부엌이 먹고 사는 것을 해결해주는 기능적 위생 공간쯤으로 해석했지만, 지금은 생활의 중심이 바로 이 부엌과 식당 공간으로, 옛집의 대청마루 위치로 격상했다. 신발을 벗는 댓돌은 지금의 현관일 테고, 이곳을 통해 각 방으로 연결되는 구조를 지닌 동선의 중심이 바로 대청이다. 동선의 중심이 곧 집의 중심이다. 시선으로 변방을 통제하는 곳이기도 하다. 파리 같은 방사형 도시에서도 모든 길이 한 점으로 모이고 그곳에 도시의 중요한 기념물을 건설하는 것이 관례이듯, 그 지점을 이제 주방이 차지했다는 사실은 혁명에 가까운 변화다. 이제 그것을 디자인할 때가 되었을 뿐이다.
다음은 방을 구성하는 방식에 대한 고민이다. 벽을 막고 문과 창을 내면 방이라는 것이 아파트 생활에서 얻은 익숙한 생각이다. 그래 봤자 우리의 아파트 경험은 기껏 50년이다. 침실의 영역을 주방보다 30㎝ 올려 작은 툇마루를 두고, 그 위에 방을 더 작은 영역으로 분할했다. 한지 문으로 구획된 방을 회랑으로 둘러싸, 얇은 한지 문이 다른 공간과 직접 부딪혀 위협받지 않도록 했다. 중간 영역을 두는 것은 언제나 현명한 방법이다. 더욱이 주방 쪽을 향한 툇마루는 작은 집에 부족한 앉을 공간을 만들어주어, 그럴싸한 거실 공간까지 덤으로 얻었다. 오로지 한 면으로 창이 난 방이 아니라 세 면이 열리고 닫히는, 작은 집이지만 다양한 풍경과 표정이 있는 집을 만들고자 했다.
세 번째 칸, 대청마루를 어떻게 구성할 것인지가 산·들·바람집의 핵심이었다. 이 집은 도시의 번잡함을 피해 나 자신과, 가장 가까운 가족과, 그리고 무엇보다 있는 그대로의 산과 들과 바람을 만나기 위해 지어진 집이니까, 그에 합당한 건축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집터는 마을 끝자락쯤에 있는데, 제주의 넙적 바위인 ‘빌레’가 서남쪽으로 엎드려 있고, 동북쪽으로는 오름이 보이는 너른 땅이다. 도로에서 땅은 빌레를 따라 조금씩 내려가는 형국이어서, 오히려 내려가는 땅의 지세를 거슬러 씩씩하게 누마루를 올려 앉혀 기개 높은 집을 지었다. 높다랗게 경계 없는 누마루에 올라앉아 먼 경치를 잡아끌어 눈앞에 묶어두는 격이랄까. 옛사람들이 사람을 만나는 장소로 썼던 마루 한 칸을 이 집에서는 자연을 벗하는 공간으로 자리 잡게 하고, 대청과 퇴를 집 바깥으로 둘러 다시 한번 켜를 둠으로써 공간을 풍요롭게 하는 것은 옛집에서 빌려온 아이디어다.
이제 퇴계의 궁리처럼, 공간의 확장을 통해 편리를 도모하는 일이 남았다. 방과 부엌 사이에 계단을 두어, 다락방을 만들었다. 다락방은 아래층 대청을 덮고 있는 박공지붕의 깊은 그늘에 숨어 있는데, 삼각형의 지붕 모양대로 만든 전면 창을 통해 오름이 환하게 들어오는 방이다. 이 방에 낮은 침구와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오디오 장비를 둔다고 하니, 무릉도원이 따로 없겠다.
‘물 부엌’의 용도를 아십니까
현관으로 진입하는 마당에는 따로 벽난로 거치대와 개수대, 바깥 화장실을 두어 제주의 바깥 생활을 충분히 즐길 수 있도록 했다. 이 마당에서 사다리로 올라가는 바깥 다락을 ‘고추 말리는 다락’이라 부르며 낄낄거렸다. 이 집 아들이 친구들과 놀러오면, 원두막에 침낭 하나로 머물며 비박해도 좋겠다. 제주에서는 바람을 막는 장치를 덧붙인 이런 다목적 옥외 공간을 ‘물 부엌’이라 부른다고 문화인류학을 전공한 집주인이 알려주었다.
공사를 하다 내가 놓친 것을 목조건축협회의 기술지원을 받아 사전에 발견하고 보완할 수 있었던 건 정말 다행이다. 제주의 거센 바람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라, 별것 아니게 보였던 80㎝ 폭 처마를 밖으로 빼는 것이 제주에서는 굉장한 사치였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토네이도 수준은 아니지만, 제주의 돌풍이 처마 밑에서 위로 솟구쳐오를 때를 대비한 계산이 부족하다는 지적이었다. 처마 밑 공간을 얻기 위해 서까래와 목조건축의 다락층 바닥장선 모두를 튼튼하게 연결하는 공사를 추가로 했고, 단순한 삼각형 박공지붕을 얻기 위해 당초 설계보다 목재보를 실내외 여러 곳에 더 보완했다. 생겨난 보를 이용해 조명기구를 활용한 것은 순발력 있는 결정이었다.
집을 지으면서 늘 하는 이야기가 있다. 사람 사는 건 다 거기서 거기인 데다, 집을 짓는 과정은 천차만별이지만 결과물은 늘 대동소이하다고. 이 집을 지으면서 이 생각을 크게 바꿔 먹었다. 우리 삶의 보편적 방식을 수용하는 대동소이한 틀 안에서 작은 궁리가 얼마나 큰 차이를 가져오는지, 그 한 걸음의 궁리가 혁명의 시작이라는 것을 크게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