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한 달 동안 미국 의회가 휴회하면서 ‘방학’에 들어간 워싱턴이 ‘트럼프’ 열풍으로 뜨겁다. 부동산 사업가이자 억만장자인 도널드 트럼프(69)가 다음해 대선의 공화당 후보로 나서겠다고 출사표를 던지면서 인기가 식을 줄 모르기 때문이다. 최근 주요 여론조사마다 그는 젭 부시 전 플로리다 주지사를 포함한 경쟁 후보들을 제치고 선두를 차지하고 있다. 트럼프는 하루아침에 공화당 중량급 후보로 변신했다. 특히 8월6일 폭스 뉴스가 주최하는 공화당 대선 후보 간 첫 방송 토론회를 앞두고 다른 어느 후보보다 트럼프에게 관심이 쏠리는 현상마저 벌어진다.

트럼프가 이 같은 지지를 얻으리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그는 1988년, 2004년, 2012년에 대선 출마를 고려했다가 포기했다고 밝힌 적이 있을 뿐 정치가는 아니다. 2000년 중도 노선을 표방하는 군소 정당인 개혁당의 대선 후보로 나섰다가 당 내분을 이유로 중도에 포기했다. 이러한 전력 때문에 주류 언론은 그의 대선 출마설 자체에 대한 관심을 미뤄왔다. 하지만 2013년 5월 〈뉴욕 포스트〉는 트럼프가 2016년 대선에서 자신의 출마 여부를 점치는 연구비로 100만 달러 이상을 투자했다고 밝혔다.
 

ⓒAP Photo7월21일 공화당 대선 예비후보 도널드 트럼프(가운데)가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블러프턴 유세에서 지지자들과 악수하고 있다.

6월16일, 트럼프는 공화당 대선 후보에 출마하겠다고 공식 선언했다. 그러고는 가는 곳마다 돌출적인 언행으로 구설에 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미국과 멕시코 국경을 넘는 불법 이민자에 대해 “마약업자·범죄자·강간범들이다. 미국이 멕시코 불법 이민자의 쓰레기장이 됐다”라고 말했다. 그의 반이민적 발언은 내년 대선에서 멕시코인을 포함한 히스패닉 유권자의 표심을 얻으려 노력한 공화당 지도부를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트럼프는 최근 20개월 만에 타결된 이란 핵협상에 나선 존 케리 국무장관을 가리켜 “끔찍하고 경멸스러운 협상을 했다. 케리 장관은 협상의 개념조차 모르는 사람이다. 나 같으면 이런 사람을 안 쓸 것이다”라고 막말을 해댔다.

그는 공화당 대선 후보를 지낸 존 매케인 상원의원을 향해서도 맹공격했다. 매케인 의원은 1967년 베트남 전쟁 당시, 5년6개월에 걸친 포로 생활 기간 중 2년간 독방에 감금돼 고문을 당했고, 다른 미군 포로보다 먼저 풀어주겠다는 회유를 거부해 ‘전쟁영웅’으로 추앙받아온 인물이다. 그런 그를 향해 트럼프는 “매케인 의원은 전쟁영웅이 아니다. 그가 포로로 잡혔기 때문에 그렇게 여기지만 난 포로로 잡히지 않은 사람을 좋아한다”라며 비꼬았다.

이 같은 발언이 알려지자 유력한 대선 후보 젭 부시는 트럼프에게 비방 공격을 중단하라고 촉구했다. 역시 대선 후보로 나선 마르코 루비오 상원의원은 “그의 몰상식한 발언만으로도 트럼프는 대통령이 될 자격이 없다”라며 용퇴를 촉구했다. 보수 성향인 〈월스트리트 저널〉은 사설을 통해 ‘만일 그가 보수주의 이념의 표방자로 나선다면 재앙이 될 것이다’라고 비판했다. 이처럼 자당 대선 후보와 보수 언론까지 공격하고 나섰지만 트럼프는 기세등등했다. 그는 이들을 향해 “내게 사과하라 마라고 훈수 두지 말라”고 응수했다.
 

ⓒAFP마르코 루비오 의원 등 경쟁자들은 트럼프 비판에 나섰다.

구설에도 고공비행하는 이상한 지지율

트럼프의 설화(舌禍)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11년 3월 MSNBC에 출현해 오바마 대통령이 미국에서 출생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고 억지 주장을 펴 빈축을 샀다. 문제는 트럼프가 구설에 올라도 그의 지지율은 고공비행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워싱턴 포스트〉와 ABC 방송이 7월20일 발표한 공동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그는 24% 지지를 얻어 13%를 얻은 젭 부시의 두 배에 이르렀다.

정치 전문 웹진 〈폴리티코〉는 ‘트럼프 지지 연합의 미스터리’라는 분석 기사를 통해 “(트럼프 지지자는) 인구학적으로도 특정할 수 없는 이상한 사람들의 연합이다. 이들은 나이가 있고, 백인이며 남성이 주를 이룬다”라고 밝혔다. 트럼프 열풍이 강하게 분 뉴햄프셔 주와 애리조나 주 유권자들을 인터뷰한 결과 “트럼프가 거리낌 없이 할 말은 하는 사업가로서 기성 정치를 뒤흔들 수 있다는 이미지에 끌린다”라고 지적했다. 공화당 주류는 트럼프의 발언에 분노하지만, 정작 공화당 지지자 대다수는 그의 저돌적 행동을 높이 산다는 것이다.
 

ⓒAP Photo젭 부시 전 플로리다 주지사.

〈뉴욕 타임스〉도 트럼프에 대해 ‘기존 정치를 쇄신해야 한다고 느낀 근심스러운 보수 유권자들에게 새로운 매력 요인이 됐다’고 분석했다. 이들 지지자 가운데는 워싱턴 중앙정치의 쇄신을 주창해온 ‘티파티 운동’과 연대한 사람도 있고, 공화당에 신물이 난 유권자, 나아가 무당파도 포함돼 있다. 바로 이들의 입에서 “트럼프는 ‘진실을 말하는 사람’ ‘겁이 없는 사람’ ‘좌고우면하지 않는 사람’이다”라는 말이 오르내린다고 〈뉴욕 타임스〉는 분석했다.

CNN 정치평론가 출신인 빌 슈나이더 교수(조지메이슨 대학)의 분석도 흥미롭다. 트럼프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힘과 부, 전통적 가치를 추구하던 ‘과거의 미국(Old America)’을 동경하는 보수적 유권자라는 것이다. 즉 오늘의 미국이 이민자는 물론이고 인종 및 종교적 소수자, 동성애자, 직장 여성, 싱글맘, 교회에 무관심한 사람들까지 두루 포용하는 ‘신 미국(New America)’으로 변하고 있고, 공화당이 이 같은 흐름에 저항하지 않는 상황에서 다른 어느 후보보다 ‘구 미국’의 가치 수호 역할을 트럼프가 잘 해내고 있다는 것이다. 슈나이더 교수는 그의 지지층을 골수 보수파, 티파티 지지자 및 65세 이상 공화당 당원으로 파악한다.

하지만 트럼프의 인기 행진이 얼마나 지속될지는 의문스럽다. 내년 11월 대선까지는 1년 이상이 남았고, 본격적인 선거운동도 내년 1월부터 시작된다. 향후 상황 전개에 따라 언제든 지지율 변화가 있을 수 있는 기간이다. 이와 관련해 〈폴리티코〉는 “트럼프가 최근 높은 지지를 받은 것은 워싱턴 중앙정치에 염증을 느껴온 많은 공화당 유권자들의 불만에 편승한 측면이 있다. 공화당 주류는 트럼프가 결국은 자생력 있는 후보가 되지는 못할 것으로 본다”라고 전했다. 정치 분석가인 네이트 코언은 〈뉴욕 타임스〉를 통해 트럼프 열풍의 원인을 언론이 ‘빚어낸’ 데서 찾고, 본격적인 후보 검증이 시작돼 자질 부족으로 판명나면 언론의 관심이나 유권자들의 지지도 떨어질 수밖에 없을 것으로 내다봤다.

기자명 워싱턴∙정재민 편집위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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