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년 전이다. 결혼 1년차 부부인 두 사람은 경기도 남양주 능내역과 다산유원지로 소풍을 왔다. 남한강가에 있는 능내역은 풍광이 수려했다. 두 사람은 사진 한 장을 찍었다. 사실 세 사람이었다. 엄마 뱃속에서는 딸아이가 자라고 있었다. 그 뒤로도 부부는 아들딸과 함께 넷이서 가끔씩 능내역을 찾곤 했다.

일곱 번째 아파트에 살던 어느 날이었다. 부부는 20년 아파트 생활을 청산하고 가족만의 집을 짓기로 결심한다. 예술을 위해서다. 아빠는 고등학교 미술 선생님이고, 엄마 역시 화가다. 딸은 동양화를 전공하고, 아들은 건축학도다. 네 명의 예술가한테는 각자 자기만의 방이 필요했다. 아파트에서는 불가능했다.

집을 지을 곳은 당연히 능내역이었다. 그곳은 가족한테는 마음의 고향 같은 곳이다. 마침 능내역 맞은편에 작은 대지가 있었다. 2013년 1월 가계약부터 했다. 답이 안 나오는 땅이었다. 동네 건축가 몇 사람이 고개를 젓고 돌아갔다. 일단 땅 모양이 치사했다. 옆으로 길었다. 한가운데는 밭이었다. 오른쪽 귀퉁이에는 무허가 집이 한 채 있었다.

홍진희 스무숲 건축사무소 소장을 만난 건 그렇게 1년을 보낸 뒤였다. 홍 소장은 뭔가 달랐다. 일단 첫 미팅 전에 능내역 일대의 사전 조사를 완벽하게 끝낸 상태였다. 홍 소장은 말했다. “그곳에서 선들이 날기 시작했어요.” 예술가 가족은 홍 소장의 말뜻을 알아챘다.
 

ⓒ시사IN 이명익위치: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130-5 대지 면적:440.00㎡(135.8평) 건축 면적:A동+B동 84㎡(53.5평) 건폐율:39.39% 연면적:A동 71.83㎡(22.17평), B동 68.21㎡(21.05평), 전체 대지 연면적 229.34㎡(70.8평·기존 건축물 면적 52.10+37.20+증축 면적 140.04㎡) 규모:A동-지상 2층·다락층, B동-지상 2층 용도:카페, 소품숍, 주택 구조:경골 목구조 마감 외벽-스터코플렉스, 7년 숙성 세콰이어 목재/지붕-징크+2중 지붕 구조/내부-바닥:강마루, 평상 및 다락 자작나무. 벽:친환경 수성 페인트. 기타:화이트오크 선반, 자기질 타일 시공사:살림건축 설계 및 CM:(주)건축사사무소 스무숲 건축가 홍진희:‘건축사사무소 스무숲’ 운영. 작은 집, 코하우징을 비롯한 새로운 형태의 소규모 저층형 집합주택에 특화된 설계를 기반으로 컨설팅에서부터 설계, 시공 전 과정을 아우르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능내역 앞 대지는 선과 선이 교차하는 곳이다. 옛 기찻길과 버려진 옛 국도와 남한강과 나무와 새들의 선들이 능내역에서 만나고 헤어지고 그리워한다. 가족은 홍진희 소장에게 설계를 의뢰했다. 예술가는 예술가를 알아보는 법이다. 가족은 여덟 번째 집으로 살림을 줄여서 이사했다. 아홉 번째 집을 짓기 위한 본격적인 준비에 착수했다.

홍진희 소장은 원래 주거학을 전공했다. 호텔리어가 되는 길이다. 실제로 스위스로 호텔 유학까지 다녀왔다. 국회 비서관도 해보고 외국계 회사도 다녀봤다. 어릴 적 꿈을 포기할 수 없었다. 홍 소장은 집이 너무나 짓고 싶었다. 그녀는 말한다. “집이야말로 인간의 본질입니다. 집은 자기 자신이죠. 집으로 돌아올 때 인간은 자신의 근원으로 돌아오는 겁니다.”

홍 소장은 다시 건축학과에 들어갔다. 공사 현장에서 집짓기의 바닥부터 몸으로 익혔다. 부동산도 공부했다. 한국에서 집은 재산의 의미가 크다. 그런 건축주들의 시각에서 생각할 줄 모르면 제대로 집을 지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 2006년 자신의 건축사무소 스무숲을 열었다. 작은 집 스무 채가 모인 마을을 짓고 싶다는 꿈이 담긴 이름이다.

지금까지 홍 소장은 스무 채의 5배인 100채가 넘는 집을 지었다. 매년 거의 10채 이상의 집을 짓는다. 처음 스무숲을 열 때는 포부도 당당했다. “대한민국의 주택 풍경을 바꿔놓겠다.” 이제는 자신이 하는 일이 점묘화라는 걸 안다. 커다란 화폭 안에 한 점 한 점 점을 찍는다.

홍 소장이 예술가 가족의 아홉 번째 집에 처음부터 애착을 가진 건 그래서였다. 건축을 이해하는 건축주와 집을 짓는 작업을 함께하는 게 행운이란 걸 이제는 안다. 능내역으로 자전거를 타러 오는 사람들을 보면서 자전거의 속도에 어울리는 집을 짓고 싶다고 생각했다. 건축으로 느림을 포착하고 싶었다.

건축주와 건축가의 ‘아트 콜라보레이션’

집짓기는 홍 소장과 가족 모두한테 가장 행복한 예술 작업이었다. 건축가는 건축주의 예술과 삶에서 끊임없이 건축적 영감을 얻었다. 건축주는 건축가한테 그림을 선물했다. 건축가는 건축학도인 아들과 함께 아들 방에 스며드는 빛을 설계했다.
 

ⓒ시사IN 이명익1층에 연 카페는 능내역 앞을 오가는 자전거족에게 휴식처가 되고 있다.

가족에게 아홉 번째 집이라고 해서 NO.9이다. 가족 모두가 예술가여서 아트팩토리 NO.9이라고 부른다. 아홉 번째 예술공장이라는 의미다. NO.9의 형태적 테마는 사선이다. 선이 교차하는 대지에서 솟아오른 집은 사선으로 하늘로 이어진다. NO.9을 마주하면 자연스럽게 하늘을 보게 된다. 집안 내부의 바닥과 천장과 창 역시, 또 하나의 선인 사는 사람들의 시선을 사선 방향으로 이끈다. 작은 집이 이렇게 뚜렷한 형태적 테마를 지니기란 쉽지 않다. 대부분 생활의 필요 탓에 건축적 언어는 묵살된다. NO.9은 건축주와 건축가의 아트 콜라보레이션이다.

NO.9의 기능적 테마는 독립성이다. 가족은 자기만의 방을 원했다. 이 덕분에 가운데 밭과 귀퉁이 무허가 집을 피해서 독립된 가옥 두 채를 짓는 설계가 가능했다. 각각 2층씩인 두 채의 집은 서로 다른 기능을 한다. 두 채의 2층에는 각각 아들과 딸이 산다. 한쪽 1층에는 부부가 살고 다른 쪽 1층에는 작은 카페를 열었다. 아들 방과 딸 방에는 각자만의 화장실과 세탁실이 완비돼 있다. 간단한 요리를 해먹을 수 있는 작은 부엌까지 있다.

부부는 아들딸이 결혼하고 나서도 NO.9에서 함께 살기를 은근히 바란다. 두 세대 이상이 살기에도 충분히 가능한 구조다. 나중에 무허가 집도 헐려나가면 세 번째 가옥을 지어 올릴 작정이다. 그곳은 능내역에 머물고 싶어 하는 예술가를 위한 게스트하우스로 꾸밀 작정이다. 가족의 아홉 번째 예술공장이 첫 번째 공공예술 프로젝트가 되는 셈이다. 가족은 1층에 카페를 열면서 벌써 예술공장의 일부를 개방했다. 엄마로서는 처음 해보는 장사다. 능내역 앞을 오가는 자전거족을 위한 휴식처다.

홍진희 소장은 말한다. “요즘 한국의 주택 문화도 달라지고 있어요. 집짓기가 유행처럼 번진 적도 있지만 지금은 정말 새로운 삶을 꿈꾸는 사람들이 집을 짓죠. 그들의 선택을 보면서 집을 짓는 저도 인생을 배울 때가 많습니다.” 덧붙인다. “집을 짓는 건축가는 무엇보다 건축주의 인생에 공감할 줄 알아야 합니다.” 홍진희 소장과 예술가 가족은 이미 예술적 공동체를 이뤘다. 1층 카페 한가운데에는 가족의 그림과 더불어 홍 소장이 만든 N0.9의 모형이 전시돼 있다. 가족은 2015년 5월19일 아홉 번째 집으로 이사했다. 그들의 아홉 번째 예술적 삶이 시작됐다.

기자명 신기주 (〈에스콰이어〉 기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