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께인가 아빠는 신문을 보다가 크게 웃었다. 한 영화에 관한 대문짝만한 기사 가운데 이런 대목이 나왔어. “관객은 영화관 화장실에서 가장 솔직해진다. 영화가 끝나고 들어간 남자 화장실에서 가장 많이 들린 소리는 ‘슬프네’ ‘너도 울었지?’였다.” 아빠가 웃은 이유는 안 울면 안 돼! 울어! 울어야 돼! 하면서 애처롭게 부르짖는 듯한 기자의 글쓰기가 안쓰러워서였어. 이를테면 아빠가 하는 프로그램에서 MC가 “시청자 여러분, 이 아니 슬프십니까? 눈물을 흘리셔야죠?”라며 손수건을 들이미는 듯한 느낌적 느낌?

오해하지 말아주길. 아빠는 기사를 보고 웃은 거지 영화 때문에 웃은 건 아니야. 오히려 영화 자체는 눈물이 날 만한 영화야. 〈연평해전〉이라는 영화. 2002년 월드컵 3-4위전 한국과 터키의 경기가 벌어지던 그날 북한 해군이 남한 해군을 공격했고, 해군 6명이 목숨을 잃고 19명이 부상당한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거든. 태양 같은 젊음들이 속절없이 빛을 잃어가는 모습이 어찌 슬프지 않겠니. 그들의 최후 외에도 한반도의 동해와 서해 바다에 서린 또 다른 이들의 최후에 생각이 미치면 더 슬퍼지기 마련이고.

48년 전, 1967년 1월의 동해 바다. 요즘은 거의 씨가 말랐지만 동해안의 명태는 한국인의 식탁에 가장 즐겨 오르는 생선 중 하나였어. 그런데 명태 어장은 주로 함경도 앞바다를 중심으로 형성됐지. 강원도 속초나 고성 앞바다에서도 명태가 잡히긴 했지만, 어선이 명태를 쫓다 보면 덜커덕 우리 바다를 넘어 북한 해역으로 들어가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어. 당시 해군 장교 한 명의 증언을 들어보자.

“동해는 우리의 바다이지만 우리 어선이 조업을 할 수 없는 구역이 있다. 우리 어선은 이 슬픈 현실을 실감할 수 없다. 그래서 어선들은 고기떼를 따라 어로 저지선 가까이 갈 때도 있는 것이다. 우리 전함은 우리의 바다에서마저 북괴의 위협을 받으며 고기잡이를 하는 어선을 보호해야 한다.” 1967년 무렵 남한의 국력은 북한에 미치지 못했어. 그래도 해군은 미국에게서 구닥다리 배라도 얻어 썼기에 북한보다 낫다 싶었는데 1960년대 후반이 되면 북한 해군도 꽤 규모를 갖추고 남한을 위협하게 돼.

1967년 1월19일 임무를 수행하던 해군 56함, 당포함에 급박한 함장의 목소리가 울려. “전원 비상 대기! 우리 어선단을 보호하라.” 장전항에서 출항한 1500t급 북한 초계정이 조업 중인 어선단을 향해 고속으로 달려온 거야. 650t급의 왜소한 당포함이 다급히 그들과 어선 사이를 가로막자마자 갑자기 천둥 같은 포성이 동해 바다를 뒤흔들어. 북한의 해안포(海岸砲)가 불을 뿜은 거야. 그로부터 무려 286발 포탄이 당포함을 목표로 발사됐어. 당포함의 무기는 3인치 함포가 고작이었는데 그걸로는 북한의 포대를 어찌할 수가 없었지.

“우리가 죽어도 어선은 보호해야 한다.” 명령은 막중했지만 절망적인 외침도 늘어났지. “발전실 완파” “감속기어 장치 침몰”… 갑판 여기저기에는 피투성이 병사들이 쓰러져 있었고 북한의 잔인한 포격은 인정사정없었지. 아마도 누군가는 절망적으로 외쳤을 거야. “이 북괴(예전에는 소련의 꼭두각시라는 이유로 ‘북한 괴뢰’라는 표현을 썼어) 놈들아. 이 원수는 꼭 갚아주마.” 그리고 포격에 부서진 포를 붙들고 울부짖었을 거야. “조금만 더 성능 좋은 함포라면 저놈들을 물리칠 수 있었을 텐데.” 당포함 함장은 자신도 부상을 입은 채 최후로 배에서 빠져나오는데 병상에 누워서도 “56함(당포함)으로 나를 돌려보내라!”고 악을 썼어. 얼마나 서글프고 비장하니. 북한 놈들, 이 나쁜 놈들, 소리가 절로 나오지?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연합뉴스〈/font〉〈/div〉1999년 6월15일 남한과 북한은 서해 바다에서 무력 충돌했다.
북한이 참패했던 1999년 6월의 ‘1차 연평해전’

32년 뒤인 1999년 6월. 서해 바다는 떼로 몰려온 손님들 덕에 정신이 없었어. 꽃게였지. 1990년만 해도 188t 정도(연평도 기준)였던 꽃게 어획량이 1999년쯤에는 2000t을 훌쩍 넘겨서 ‘황금어장’을 형성해. 이 꽃게 역시 명태처럼 휴전선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남과 북의 바다를 넘나들었고 남과 북 모두가 꽃게에 눈독을 들이게 되지. 1967년 명태 한 짝에 목숨을 걸었던 가난한 남한 어부들처럼, 최소 수십만이 굶어죽은 세계 최빈국으로 전락한 1999년의 북한은 꽃게를 하나라도 더 잡아야 할 처지였어. 북한 어선은 슬금슬금 남한 수역으로 흘러들었고, 북한 해군은 또 이를 보호해야 할 처지가 되고 한국 해군은 월등한 장비와 위력으로 북한을 압도하는 상황이 되지.

6월15일 남과 북의 해군은 격렬한 전투를 벌이게 돼. 덩치가 큰 남한 해군은 구식에 낡기까지 한 북한 함정을 향해 쉽게 말해 ‘박치기 공격’을 개시했고, 기가 질린 북한 해군이 발포하자 남한 해군도 응사를 시작한 거지. 하지만 상대가 되지 못했어. 1200t급 남한 초계함(1967년 동해 바다를 달리던 북한의 구축함과 비슷한 크기)이 올망졸망한 북한 해군에게 포화를 퍼부었고, 이미 컴퓨터로 과녁을 조준하고 사격하는 시스템을 갖춘 남한 해군 앞에서 “날래 날래 하라우!” 하면서 함포 각도를 수동으로 맞추는 북한 해군은, 1967년 북한 해안 포대에다 울분을 터뜨리던 당포함과 같은 처지일 뿐이었어. 우리 해군은 거의 손실이 없었지만 북한 해군은 어뢰정 1척, 경비정 1척을 잃고 병사 수십명이 죽어갔단다.

“동무들! 너무 마이 가면 안 됩네다” 하면서 북한의 꽃게잡이 어선들에게 소리 질렀을, “일없소!”(괜찮소) 하면서 꽃게에 정신을 파는 어부들을 보며 발 동동 구르다가 남한의 초계함이라도 먼발치에서 나타나면 허둥지둥 “어선들을 보위하라우” 하면서 구식 기관포 총알을 쟀을 그 청춘들도 피눈물을 흘리며 싸우다가 죽어갔어. 그들도 복수를 다짐했겠지. 거기서 부상당한 인민군들도 병상에 누워 “장산곶(북한 해군 기지)으로 돌아가갔어!”라고 부르짖지 않았을까.

사람들이 보고 눈물 흘린다는 영화 〈연평해전〉의 모티브인 실제 연평해전은 바로 이 1999년 6월의 참패에 대한 북한의 복수라고 해석하는 경우가 많아. 영화의 배경이 된 2차 연평해전의 경우, 북한 해군은 작심하고 기습 공격을 가했고 그 때문에 우리 피해가 컸던 거야.

아빠는 어선단을 구하려다가 북한 해안포대의 포탄에 장렬히 산화한 당포함의 병사들에게 감사해. 그들은 피 흘려 자신의 임무를 다했고 죽음으로써 국민의 목숨을 지켰어. 당시 어떤 어부는 그들의 희생에 죄의식을 느끼고 목숨을 끊기도 했지. 〈연평해전〉 영화 속의 병사들도 다르지 않았을 거야. 하지만 동시에 압도적인 남한 해군의 공세에 죽어간 북한 해군 역시 피가 흐르고 살이 뜨거운, 그리고 누구보다 용감한 사람들이었을지도 몰라.

나라를 지키기 위해,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목숨 바친 사람의 피와 땀보다 값진 것은 없어. 하지만 또 하나, 세상에서 가장 무익하고 무용한 일은 흘리지 않아도 되는 피를 흘리고 죽지 않아야 할 목숨을 잃는 일이야. 동해안에서 명태가 자취를 감추자 동해 바다에서 벌어지던 남북의 혈투가 사라졌어. 아마 서해안에서 꽃게가 없었다면 연평해전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지도 몰라. 고작 명태와 꽃게 때문에 우리는 죽고 죽이기를 반복하며 죽은 이의 장렬함을 기려야 했을까? 앞으로도 그래야 할까? 명태와 꽃게를 나눠서 죽고 죽이지 않는 길은 과연 없었을까? 〈연평해전〉의 눈물(?) 이후 생각해봐야 할 질문이야.

기자명 김형민(SBS Biz PD)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