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에 명태라면, 남해와 제주는 멸치, 황해는 조기가 으뜸이다. 명태를 말리면 북어, 조기를 소금에 약간 절여 말리면 굴비가 된다. 이들 명태·조기·멸치는 동·서·남해의 ‘삼걸(三傑)’이다. 이들의 세력균형(?)은 황해 조기와 동해 명태가 급거 역사의 전면에서 퇴장하면서 깨져버렸다. 불과 얼마 전의 일이다.

조기 떼는 황해와 동중국해의 경계 해역까지 발달한 양쯔강 하구 바닷속 모래밭에서 겨울을 난다. 동중국해의 따스한 물속에서 겨울잠을 자듯이 조용한 나날을 보내다가 봄이 오면 북상하기 시작한다. 알을 낳기 위해 머나먼 항해를 거듭하는 조기의 회귀본능은 생명 탄생의 외경심을 일깨워주는 위대한 드라마다. 제주도 남서쪽에서 북상을 거듭해 평안도 앞바다 발해만에 이르기까지 장엄한 광경을 연출했다. 수천만 마리씩 떼를 지어 군단을 만들면서 바다를 점령했다. 봄빛 바다는 조기 울음으로 시끄러웠다.

조기의 이동은 단순한 생물체 회유에 그치지 않았다. 사람들이 조기를 따라 이동했기 때문이다. 서해안 어업생산력의 최대치가 조기잡이였고, 최대 유통량을 자랑하면서 부를 축적했으며, 조기 어장을 따라 파시가 열렸다. 조기 어장과 파시를 따라 황해를 북상하며 잠시 생각에 잠겨본다. 몰락해버린 포구의 술청에 앉아 흥청거렸던 파시를 떠올린다. 저쯤에서 술집 아낙이 걸어오고, 이쯤에서 취한 뱃동서(선원)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겠지…. 성어기마다 각처에서 모여든 무수한 선주와 선원을 상대로 하는 음식업, 접객업자들이 운집해 한산했던 어장이 일시에 번성을 이루던 파시(波市). 파시란 본디 어류를 교역하는 시장을 의미한다. ‘波’는 물결을 타고 해상을 이동한다는 뜻이고, ‘市’는 어업자, 즉 각종 영업자를 뜻한다. 근대의 파시는 임시 파출소 등 각종 기관까지 설치되어 일시적 번성을 누리는 임시 어촌이다. 파시란, 어류 등을 거래하기 위한 해상 시장으로도 해석된다. 혹자는 파시를 파시평(波市坪)이라고도 하는데, ‘坪’은 장소를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주강현 제공일제강점기 연평도 파시의 풍경. 임시 파출소 따위 각종 기관까지 설치되는 등 성업을 이뤘다.
어부들은 흑산도에서 신의주 앞바다와 만주 다롄에 이르기까지 넓은 어장을 확보했다. 조기가 많이 잡히고 돈이 돌다 보니 섬마다 파시가 열려서 흥청망청 모처럼 시끄러운 바다가 되었다. 색줏집 아가씨들도 들병을 가지고 사내들의 돈을 한껏 뽑아 올렸다. 어느 시인이 그린 어촌 술집 풍경처럼, ‘커다란 생선 같은 여자를 껴안는’ 꿈을 꾸고 싶었을 것이다. 고기를 잡으러 바다에 나가는 남자들과 한 몸이 되어 살아가던 부초 같은 인생들이 바다에 널렸다.

조기를 따라 북상하면서 어부들은 한식 무렵에는 홍도 윗바닥인 안마도 밖으로 쫓아가서 잡았다. 정약전이 칠산 바다에서 ‘한식 후에’ 그물로 잡았다고 했으니, 대략 한식에 홍도 근역을 치고 올라가서 한식 이후에 칠산 바다에 당도했다. 200여 년 전 기록과 오늘의 구전이 일치한다. 칠산 어장은 연평도 어장이 시작되기 전에 조기가 집중적으로 잡히던 첫 어장이었다. 칠산 조기는 알이 차기 시작하고 살도 제법 올랐다. 모든 물고기가 그렇듯이 종족 번식의 중요한 대사를 앞두고는 살이 오르기 마련이다. 칠산도 어부들은 조기를 만난 반가운 마음을 이렇게 노래로 전했다.

황금 같은 내 조기야 어낭청 가래질이야

어디 갔다 인제 왔냐 어낭청 가래질이야

만경창파 너른 바다 어낭청 가래질이야

길을 잊어 인제 왔냐 어낭청 가래질이야

칠산 바다는 지도로 볼 때 영광 쪽으로 낙월면에 속한 일산도·이산도·삼산도·사산도·오산도·육산도·칠산도의 일곱 무인도가 점을 찍고 있어서 칠뫼라고도 불렸다. 넓은 의미의 칠산 어장은 밑으로는 안마도에서 비안도에 이르고, 위도를 중심으로 형성된 어장을 뜻한다. 특히 위도 아래쪽인 형제도 일대는 황금어장으로 주가를 날렸다.

ⓒ포포M어부들은 흑산도에서 신의주 앞바다와 만주 다롄에 이르기까지 조기를 잡으러 다녔다. 흑산도 어민들이 조기잡이 배를 기다리며 그물을 손질하고 있다.
조기 떼가 올라오는 시각을 예견하는 놀라운 삶의 지혜를 칠산도 어민들은 두루 체득하고 있었다. 칠산 바다 시도의 늙은 살구나무에 꽃이 피면 조기가 찾아왔음을 알아차렸다. 법성포 건너편 구수산 철쭉꽃이 뚝뚝 떨어져 바다를 물들이면, 조기들은 아름다운 빛깔에 취해 어쩔 줄을 몰랐다. 칠산도 어민들은 구수산 철쭉꽃을 칠산 바다에 조기 떼가 왔다는 신호로 알고 이내 배를 내어 고기잡이에 나섰다.

전국의 배를 구경할 수 있었던 연평 어장

칠산도 어민들은 자신들의 일정표대로 착착 움직였다.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어부의 삶이란 늘 자연의 질서를 따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다는 어떤 경우에도 음력이다. 바다의 자연 질서는 음력을 벗어나는 순간 틀어진다. 물때는 말할 것도 없고 조기가 돌아오는 어업력이 그러하다. 조기들은 자연의 섭리에 따라 곡우 때면 정확히 당도해 울음으로써 만물의 순환을 통지하고, 어둠이 깔리는 칠산 바다에서 아주 성공적으로 알을 낳았다. 이로써 종족 보존의 대드라마가 완성되었다.

또 한 번의 최대 파시는 경기만에서 벌어졌다. 조기 선발대는 음력 3월 하순에 이미 연평도에 당도했으며, 후발대도 4월 초파일 무렵에는 모두 연평도에 도착했다. 연평도에서 4월 초파일을 ‘조기의 생일’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그것이다.

조기들이 연평도를 그리워하면서 머나먼 여장을 푼 이유는 너무도 자명했다. 한강과 임진강, 예성강에서 흘러내린 토사가 쌓여 강화도 앞바다를 질펀한 개펄로 만들었으니 부유물질이 많아 풍부한 먹이를 제공하고, 또한 얕은 모래밭은 알을 낳기에 적당했다. 조기들은 강물과 바닷물이 합수하는 곳을 좋아해 북상을 거듭하여 황해도 해주만에 집결했다. 연평 어장이라 할 때, 이는 해주만 일대의 잘 발달한 리아스식 해안과 자잘한 섬들을 포괄한다. 연평열도는 대연평도와 소연평도 및 부근의 크고 작은 섬들을 총칭하는 말이다. 조기철이 되면 인근의 배들도 모두 몰려와 파시를 형성했기 때문에 연평 어장은 가히 황해·경기·충청, 심지어 전라도 배들까지 망라하는 큰 어장이었다.

ⓒ주강현 제공충남 천수만에서 임경업 장군을 모시는 굿판이 벌어지고 있다. 임 장군은 ‘조기의 신’으로 불린다.
칠산 바다에서 곡우사리가 펼쳐졌다면, 인천과 연평바다에서는 소만사리가 나타났다. 소만사리가 오죽 컸으면 ‘조기 생일’이라고 불렀겠는가. 조기잡이가 끝나는 5~6월은 ‘파송사리’라 불렀다. 반면 새우잡이를 포함한 모든 고기잡이가 완전히 끝나는 10월은 ‘막사리’라 불렀다. 2015년을 기준으로 하면 곡우는 4월20일, 소만은 5월21일, 단오는 6월20일이니 이들 절기들이 조기의 생일이었던 셈이다. 절기로 치자면 본격 여름으로 접어들기 직전인 딱 요즘이다.

황해도 등산이와 구월이 앞바다는 자잘한 여와 모래밭으로 형성되어 있어서 조기에게 최적의 산란장이다. 구월봉 아래 구월포에는 큰 ‘조기장’이 섰으며, 6월께 최대의 장이 섰다. 연평도 조기는 칠산도 조기보다 더 컸다. 밑에서 올라오면서 실하게 커져 칠산 어장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마포나루에서 얼음을 잔뜩 실은 시선배(일종의 운반선)들이 땔감, 식량 따위를 싣고 연평도까지 와서 조기와 맞바꾸었다. 일부는 해주항을 거쳐 개성 부잣집으로 실려 가기도 했다. 얼음에 차곡차곡 채워진 조기는 강화도 북쪽을 통해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 마포나루까지 직진했다. 여기서 경강상인(京江商人)의 존재를 주목해야 한다. 마포는 새우젓의 동네답게 젓갈·소금·생선·건어물 등 해산물이 집중되었다. ‘바다를 잃어버린’ 지금의 서울과 달리 당시 서울은 바다와 소통하고 있었다는 좋은 증거다.

연평도 임경업당에 오른다. 망연하게 바다를 바라보면서 생각에 젖는다. 해마다 파시철에 몰려들었던 배들 수천 척이 이쪽을 향해 뱃기를 세우고, 임경업을 칭송하며, 그의 음덕을 노래했다. 연평도에서는 매년 정월 초하루부터 보름 사이에 길일을 택해 굿을 쳤다. 조기잡이를 떠나기 전, 대개의 서해 어촌에서도 임 장군을 모시고 마을굿이나 뱃고사를 올렸다. 연평도에 가면 반드시 임장군당을 찾아서 제사를 지냈다. 조기잡이를 파송치고 와서도 정성껏 당에 고사를 올렸다. 이렇듯 ‘조기의 신’ 임경업 장군은 서해안 각처에 흩어져 있었다.

조기 떼를 따라서 다시금 북상할 시간이다. 연평도 조기 군단은 힘껏 장산곶을 돌아서 북상했다. ‘조기의 신’ 임경업 신앙도 장산곶을 돌아서 이북의 철산 앞바다까지 힘차게 북상했다. 무더운 여름철이 시작되는 6월 말쯤, 조기들은 최종 목적지인 평안도 철산 앞바다인 대화도에 닿았다.

선천 신미도에서 철산 대화도에 이르는 근역은 조기의 산란장으로 3대 어장의 하나였다. 신미도 당후포는 조기 파시로 유명했다. 대화도 주변은 일부 모래톱을 형성하고 개펄이 함께 있어서 조기가 서식하기에 안성맞춤이다. 대화도에서는 5~6월 성어기에 파시가 형성되었다. 철산의 중심은 역시 가도다. 가도는 조기들의 마지막 회유지, 유턴 지점인 대화도 어장이었다.

모두 사라지고 핵발전소의 그늘만 드리웠네

조기들은 마지막으로 압록강변 용암포에 몰려들었다. 용암포는 군소재지로서만이 아니라 어시장으로도 유명해 용암포 어시장과 이도포 어시장이 봄부터 가을까지 매일 열렸다.

조기들은 방대한 양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밀물에 잠시 몸을 맡기면서 마지막 행군을 정리했다. 이제 더 이상 황해에 머무를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제주도 남서쪽을 떠날 때는 초봄이었는데 어느덧 여름이 가고 있었다. 장장 1000㎞가 넘는 참으로 긴 여행이었다. 알을 낳고 몸이 홀쭉하게 빠져서 볼품은 없어졌지만 다시금 귀향을 서둘러야 한다.

조기들은 지름길을 택하기로 했다.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는 수심 60~80m의 물길로 방향을 잡았다. 중국과 우리나라 사이의 얕은 바다인데도 갑자기 깊어지는 바다 골짜기가 있고 그 골에는 차가운 냉수괴가 흐르는데, 조기들은 그 물줄기를 따라서 남쪽으로 내려갔다.

이 모든 게 역사가 되고 말았다. 조기도 사라지고, 파시도 사라지고, 서해안 어업 생산력은 절단 나고 말았다. 칠산 어장 주변에는 핵발전소의 그늘이 짙게 드리우고 있을 뿐이다. 작은 생명체들이 만들어낸 대하드라마보다 더 장엄한 문명의 궤적이 또 있을까. 하여 그 많던 조기들은 어디로 갔으며, 왜 사라졌을까를 묻는 것이다. 조기와 명태의 소멸에 인류 문명의 불길한 손길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기자명 주강현 (아시아퍼시픽해양문화연구원장·제주대 석좌교수)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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