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옥도 팔고 집도 팔고 병까지 얻었다. 이번 싸움에 생명을 걸었다.”

대기업 LG텔레콤(현 LG유플러스)의 기술특허 탈취에 맞서 12년째 힘겨운 싸움을 벌여온 중소 IT기업 서오텔레콤의 김성수 대표(55)가 5월19일 서울 삼청동 감사원 본관 앞에서 밝힌 각오다. 참여연대 안진걸 협동사무처장과 나란히 선 김 대표의 손에는 여야 국회의원 등 각계 인사 376명으로부터 서명받은 국민감사청구 서류 뭉치가 들려 있었다.

LG와 서오의 기술특허 분쟁이 감사원으로까지 번진 이면에는 정부기관인 특허청 산하 특허심판원이 공정성을 잃고 대기업 편향적 판정을 내린 최근 사정이 자리하고 있다.

서오텔레콤 김성수 대표는 1990년대 중반 조카딸이 성폭행당한 뒤 살해되는 끔찍한 비극을 겪었다. 이후 위급 상황에 처한 피해자가 휴대전화를 이용해 긴급 구조 요청을 할 수 있는 기술 개발에 심혈을 기울였다. 2년여의 연구가 마무리된 2001년, 그는 유사시 휴대전화에 장착한 비상 버튼을 몇 초만 누르고 있으면 미리 입력된 비상 연락망으로 구조를 요청할 수 있는 ‘이머전시 콜(emergency call)’ 개념을 국내 최초로 고안했다. 이와 관련된 14가지 핵심 기술을 담은 ‘이동통신망을 이용한 비상호출 처리장치와 그 방법에 대한 발명특허’를 출원한 김 대표는 엘지 측과 만나 상용화 협상에 들어갔다. 엘지는 김 대표에게 기술사용 협의를 제안했고, 그는 엘지가 요청한 기술과 특허 자료 일체를 넘겨주었다. 문제는 그다음부터 발생했다.
 

ⓒ시사IN 조남진김성수 서오텔레콤 대표(왼쪽)와 안진걸 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은 감사원에 공익감사를 청구했다.
엘지가 서오 측에는 알리지도 않고, ‘이머전시 콜’ 개념을 활용한 ‘알라딘폰’을 출시해버린 것이다. 대대적인 언론 광고와 함께 알라딘폰은 시판됐다. 2003년의 상황이다.

경악한 김성수 대표는 엘지를 특허 법원에 제소했다. 엘지는 알라딘폰 판매를 중단했다. 그러나 특허 법정에서는 ‘서오의 기술에는 별다른 진보성도 없었다’고 깎아내리며 ‘기술 탈취 사실이 없다’고 발뺌했다.

2007년, 4년에 걸친 특허 분쟁이 대법원에서 마무리됐다. 판시 내용은 이랬다. “엘지가 서오 쪽 특허의 진보성을 부정한 것은 발명의 진보에 대한 법리 오해에 기인한 것이다.”

서오의 승리였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그동안 엘지 때문에 서오가 입은 경제적 피해는 그대로 남았다. 김성수 대표는 대법원 판결을 근거로 엘지를 특허침해 혐의로 검찰에 고소했다. 그러나 검찰은 엘지의 특허침해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불기소처분해 버렸다. ‘고소 기한이 지났다’는 것이었다. 검찰에 절망한 김 대표는 헌법소원을 냈다. 헌법재판소는 재판부 전원일치로 “검찰의 불기소처분은 부당하다”라고 결정했다. ‘검찰의 수사가 미진했으므로 다시 수사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이처럼 서오와 김성수 대표는 대법원은 물론 헌법재판소에서도 승소했다. 이쯤 되면, 엘지가 특허침해를 인정하고 마땅한 경제적 책임을 졌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이 상식이다. 그러나 엘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김 대표는 다시 엘지에 손해배상 소송을 내야 했다. 엘지는 “서오의 기술이 독자적 특허인 것은 맞지만 알라딘폰이 그 특허 기술을 도용한 것은 아니다”라고 맞섰다. 그런데 이 손해배상 소송에서는 엘지가 승소했다. 형사법원에서는 서오가 거듭 승소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이로 인한 서오 측의 손해는 배상받을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12년 소송’으로 대법원·헌재에서 이겼지만…

중소기업인 서오로서는 이 같은 ‘법률적 분쟁의 장기화’ 자체가 엄청난 부담이었다. 사옥 건물까지 팔아야 했다. 그러나 엎치락뒤치락하는 소송 과정에서 ‘서오-엘지 특허분쟁 사건’은 한국 사회의 고질적 부조리인 ‘대기업-중소기업 불공정 거래’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2012년쯤에는 ‘대기업-중소기업 상생’이 사회적 의제로 떠오르면서, 정부 일각에서도 일정한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청와대 민원실은 한국전자통신연구원에게 엘지와 서오의 기술을 비교 분석토록 했다. 국제통신기술표준규약(TIA/EIA)을 근거로 두 기술을 분석한 한국전자통신연구원은 “엘지 측 주장은 국제통신기술 표준규약에 위배된다”라는 취지로 해석될 수 있는 공인 기술 분석 결과를 내놓았다. 대한변협과 동반성장위원회가 공동 실시한 법률검토 보고서 또한 엘지가 서오텔레콤의 특허를 침해했다고 결론 내렸다. 서오 김 대표는 이런 근거들을 대법원에 제출했다. 하지만 담당 재판부는 “대법원은 법리 미진 여부를 다루는 곳이지 사실관계 증거를 검토하는 곳이 아니다”라는 이유로 ‘심리불속행’(기각) 처리했다.

서오 김 대표는 2014년 9월 특허심판원에 권리범위 확인 심판을 청구했다. 지난 1월7일, 특허심판원은 심판관 2명이 참석한 가운데 엘지와 서오의 쌍방 대질 기술설명회를 열었다. 동작 시연 과정에서 엘지 측은 준비해온 알라딘폰 2세트를 심판관에게 건네주며 “이 사업은 실패한 사업으로 서버를 내렸기(서비스를 중단했기) 때문에 동작이 이뤄지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서오 측에서 준비한 알라딘폰 2세트를 심판관이 시연한 결과 엘지 측 주장과는 다르게 동작이 정상적으로 이뤄졌다. 특허 심판관들은 엘지 측에서 제출한 알라딘폰 동작 실험 보고서가 사실과 다르게 위조됐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하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조사를 마친 특허심판원은 양측에서 제기하지도 않은 기술 내용을 근거로 모호한 결론을 내렸다. “실시 발명의 특정이 잘못된 것 같아 보인다.” 그리고 지난 3월6일에는 서오 측의 ‘권리범위 확인 청구’를 각하 처리해버렸다. 서오 김 대표가 참여연대와 함께 이 사안을 감사원으로 끌고 간 이유다. 정부기관인 특허심판원은 감사원의 감사 대상이다.
 

ⓒ시사IN 이명익한국전자통신연구원은 ‘엘지 측 주장이 국제통신기술 표준규약에 위배된다’는 결론을 내렸다(위).
김성수 대표가 12년에 걸친 신산한 특허분쟁에서 이뤄낸 성과(?)가 있다. ‘대한민국 사법부가 누구의 편인지’ 뼈에 사무치도록 절감하게 되었다. “우리는 (형사소송에서) 대법원·헌법재판소에서 모두 이겼다. 헌법재판소는 검찰의 불기소가 잘못된 것이라고 판결했다. 그런데도 (민사소송에서) 각 법원들은 검찰의 불기소를 근거로 ‘대기업 봐주기’식 판결을 내놓았다.”

이와 관련해 감사원에 공익감사를 청구한 참여연대 안진걸 처장은 “차별화된 중소기업 기술을 대기업으로부터 보호하지 않는 정부라면 더 이상 공정사회와 동반성장을 이야기할 자격이 없다”라고 말했다.

이처럼 사법부가 본체만체하는 가운데 대기업으로부터 손해를 본 중소기업은 서오텔레콤 이외에도 많다. 5월12일 참여연대에서 개최한 ‘중소기업 피해사례 발표’에서도 황당한 사례가 다수 나왔다.

중소 건설사인 JBS는 주거단지 분양사업에서 대기업인 삼성중공업을 협력사로 선정했다가 사업권을 빼앗기고 대표가 징역까지 살아야 했던 경우다. 건설사의 가장 중요한 자산은, 관련 주거단지를 건축하는 ‘권리’다. 완공된 주거단지를 수요자들에게 분양하는 권리도 건설사에 속한다. 이런 권리를 기반으로 건설사는 금융권 대출로 자금을 조달하고 다른 한편으로 실제 건설 작업을 수행할 협력업체(시공사)를 지정해서 전체 사업을 총괄한다. 발주자인 건설사 입장에서는 준공·분양 등 사업 일정이 당초 계획에 맞춰 진행되어야 한다. 대출금을 상환해야 하는 만기가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만약 상환 만기 이전에 미분양 등으로 매출금을 거둬들이지 못하면 부도를 낼 수밖에 없다. 문제는 주거단지를 실제로 건축하는 회사는 시공사라는 것이다. 시공사의 ‘어떤’ 의도에 따라 준공 및 분양 일정이 늦춰질 가능성도 있다. JBS건설이 시공사인 삼성중공업에 대해 품고 있는 의혹이다.

JBS건설에 따르면, 이 회사는 시공사인 삼성중공업과 문제의 타운하우스를 2009년 10월1일까지 준공하기로 약정했다. 그러나 삼성중공업은 준공일을 4차례나 늦췄다. 심지어 삼성중공업은 준공 이후, JBS건설과의 분양가 협의에서 미적거렸다. 이렇게 분양이 늦춰지는 가운데 상환 만기일이 닥쳤다. 삼성중공업이 JBS건설의 대출금을 상환해줬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JBS건설에 대한 채권자가 은행에서 삼성중공업으로 바뀐다. 삼성중공업은 대출금 대신 JBS건설의 사업권과 분양권을 빼앗아갔다.

JBS건설은 삼성중공업을 상대로 ‘계약상 불법행위에 대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이 소송에서 법률상 쟁점은 결국 ‘분양이 지연된 책임이 어느 회사에 있느냐’일 수밖에 없다. JBS건설은 나름 자신만만했다. 이 회사의 주장을 입증할 수 있는 물적 근거, 즉 ‘JBS건설-삼성중공업 최종 합의서’가 있었기 때문이다. 준공 일정 등 당초 사업계획이 적시되어 있는 공식적인 서류도 있었다. 그러나 법원은 이런 증거 자료들은 깡그리 무시하는 대신 양사가 치열하게 대립했던 시기의 회의록을 주요 근거로 채택해 삼성중공업의 손을 들어줬다.

한편 삼성중공업은 당시 JBS건설의 대표였던 정 아무개씨가 공사비 지출과 관련된 횡령 행위를 했다며 고소했다. 정씨는 유죄판결을 받아 2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사업에 들어갈 돈을 개인 용도로 사용했다는 혐의였다. 국세청은 정씨의 ‘개인 용도 사용액’에 세금을 부과하기 위해 지난해 2월부터 10개월에 걸친 세무조사를 벌였다. 그런데 지난해 12월 나온 조사 결과는 ‘정씨가 개인적으로 사용한 돈이 없다’는 것이었다.

대기업이 중소기업의 상표권을 도용해서 막대한 피해를 주었으나 사법적 처벌에서는 빠져나간 경우도 있다. ㈜다스는 ‘나인뷰’ 내비게이션과 블랙박스의 상표권을 보유한 중소기업이다. 제품을 실제로 생산하는 업체는 에이딕스테크놀러지이며, 〈중앙일보〉 계열사인 중앙엠앤씨가 구매대행 업무를 맡았다. 중앙엠앤씨가 에이딕스테크놀러지 공장에서 나온 내비게이션을 유통시킨 다음 그 매출액을 상표권자인 다스 및 제조업체와 나누는 시스템이다.
 

ⓒ시사IN 윤무영5월12일 참여연대 느티나무 홀에서 ‘갑만 편드는 사법에 멍드는 을’이라는 이름으로 중소기업 피해 사례 발표회가 열렸다.
2011~2012년, 다스는 나인뷰 제품들이 시중에서 덤핑 가격으로 대량 유통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사실 관계를 확인해보니, 중앙엠앤씨와 에이딕스테크놀러지가 상표권자인 다스 몰래 나인뷰를 생산해서 팔아왔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렇게 불법 유통한 물량이 모두 30만 대에 달했다. 다스 처지에서는 상품 이미지 추락은 물론 상표권에 대한 수수료도 받지 못한 것이다. 더욱이 불법 상품에 대해서도 애프터서비스 책임은 다스에게 있으니 엄청난 유·무형의 손실을 봐온 것이 된다. 다스는 2013년 중앙엠앤씨와 에이딕스테크놀러지를 상표법 및 부정경쟁방지법 위반 혐의로 경찰에 고소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경찰은 3개월 동안 조사를 차일피일 미루더니 두 회사를 각각 다른 경찰서로 분리 고소할 것을 요구했다. 왜 그랬을까? 2014년에 가서야 그 이유를 알게 됐다. 에이딕스 대표는 상표법 위반으로 구속 기소됐지만 더 큰 책임이 있는 중앙엠앤씨는 무혐의 처분을 받은 것이다. 다스의 조훈향 상무는 “공모 관계가 분명한 정황에도 불구하고 언론사 계열인 중앙엠앤씨에 무혐의 처분을 내리면서 다스는 제대로 피해를 보상받을 길이 막혔다”라며 눈물을 흘렸다.

생수 유통업체인 한신상사는 대기업 소속 영업사원의 서류 조작으로 회사가 풍비박산 난 경우다. 생수 제조업체인 하이트진로음료 측 영업사원이 자신의 실적을 올리기 위해 한신상사에 대한 공급 실적을 본사에 허위로 보고한 것이다. 서류까지 위조했다. 이 경우, 본사인 하이트진로음료에는 한신상사로부터 받을 돈이 있는 것으로 기록된다. 하이트진로 측은 이 같은 허위 보고와 서류를 근거로 ‘빚(미수금)을 갚으라’며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이 과정에서 법원은 하이트진로 측에 원본 배송장을 요구했다. 상품이 실제로 한신상사에 공급되었는지 확인하기 위한 절차였다. 하이트진로는 이 결정적인 증거 자료를 제출하지 않았다. 그러나 재판에서는 하이트진로 측이 이겼다. 한신상사 대표의 재산은 압류되었다. 이런 사태 전개에 대해 하이트진로 측은 “허위 세금계산서는 한신의 동의 아래 만든 것이고, 서류 위조 주장도 국과수 조사 결과 채권 양도통지서상의 한신 명판과 대리점 계약 시 날인된 명판이 동일한 것으로 나왔다”라고 해명했다.

“디스커버리 제도 도입이 시급하다”

대기업과의 법률 분쟁에서 중소기업은 절대적으로 불리한 형편이다. 대기업에는 유능한 대책반이 있을 뿐 아니라 법률대리인으로 대형 로펌을 선임한다. 중소기업에는 대형 로펌을 살 만한 돈이 없다. 더욱이 대형 로펌들은 대기업에 ‘찍혀’ 다른 ‘돈 되는’ 사건을 수임하지 못할까 봐 중소기업의 의뢰는 좀처럼 받지 않는다. 사법부라도 이런 ‘기울어진 운동장’을 고려해서 균형추 노릇을 해줘야 하지만 판검사들도 대개 대기업에 편향돼 있다는 것이 피해를 본 대다수 중소기업인들의 하소연이다.

참여연대는 ‘디스커버리 제도’의 도입이 시급하다고 주장한다. 지금까지 보았듯이 대기업들은 자사에 불리한 증거를 감춰버리기 일쑤다. 법원은 증거 자료를 못 봤다면서 ‘마음 편하게’ 대기업의 손을 들어줄 수 있다. ‘디스커버리 제도’가 시행되면, 소송 당사자들이 상대방이 가진 자료 가운데 사실관계 확인에 필요한 증거를 법원에 제출하도록 강제할 수 있다. 그래서 ‘민사소송 절차에서의 압수수색’으로 불리기도 한다. 참여연대 장흥배 경제금융센터 팀장은 “분쟁 양측이 개인정보 등 민감한 내용을 제외하고는 법원에서 요구하는 증거 자료를 제출해야 하는 제도다. 상대적으로 약자 입장에 선 중소기업으로서는 증거를 확보하기 수월해진다”라고 말했다.

기자명 정희상 전문기자 다른기사 보기 minju518@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