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의 쓰나미는 소설이 세상을 향해 세워둔 둑을 너무도 쉽게 넘어 들어왔다. 아니, 그 둑이 원래 그렇게 낮고 허술하다는 것을 절감하게 만들었다. 소설은 위안을 줄 수 없다. 함께 있다고 말할 수 있을 뿐. 함께 느끼고 있다고, 우리는 함께 존재하고 있다고 써서 보여줄 뿐. 이 소설의 첫 문장을 쓰기 시작한 이후 깨달은 것은 이것이다.” - 작가의 말-


나는 성석제라는 소설가의 글을 좋아한다. 그의 소설은 늘 코미디언인 나에게 신선한 자극을 준다. 말을 맛있게 표현하는 것이 코미디언이라면 글을 맛있게 표현하는 성석제라는 작가는 ‘코믹 작가’라고 주저 없이 불러도 좋을 듯했다. 그전까지는, 나는 내가 은근 멋지게 나이 들기를 바라는 쪽이었다. 왜냐하면 나이가 들수록 삶이 여유로워지고 내가 세상을 경험한 만큼 삶의 깊이가 더해지는 줄 알았다. 그런데 웬걸. 중년이 되고 보니 나는 작년보다 더 쫓기고 조급해지고 어떤 때는 소심해지고 작은 일에도 삐치며 치사해지는 기분을 하루에 몇 번씩이나 느끼며 살아가고 있다. 나는 영화나 드라마에서 나오는 완숙미 같은 게 느껴지는 그런 중년이 되고 싶었으나 반숙도 되다 만 사람인 것이다. 머릿속을 꽉 짓누르는 이 중압감이 싫어서 성석제의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번쩍하는 황홀한 순간〉처럼 재미있게 읽을 책을 찾다가 그가 쓴 〈투명인간〉을 골랐다. 일단 책 제목이 뭔가 동심을 자극했고 책표지의 남성 나체 그림이 확 내 남편의 쓸쓸한 뒤태 같기도 하여 ‘좋아! 이 책이야!’ 하며 선택했다. 그러나 으아~ 마지막 책장을 덮으면서 골이 지끈거렸다.

왜? 나는 지금 회색 도시를 피해 초록 도시에 와 있다. 검은 대나무, 오죽이 바람에 춤을 춘다. 벼농사를 끝낸 농부가 흙 묻은 장화를 신고 뒷짐을 진 채 논두렁을 걸어간다. 뜨끈한 배춧국이나 해장국에 넣으면 시원할 싱싱하고 퍼런 배추 겉잎이 귀하게 대접받지 못하고 지천으로 배추밭에 버려져 있다. 아까워라. 지금 내 눈에 보이는 이 풍경. 나는 어쩌면 도심에서 바쁘게 살고 있는 그대들에게 투명인간일 수도 있는 시간들을 보낸다.

성석제라는 소설가는 어찌하여 복잡한 현실을 잠시라도 잊게 하는 그런 소설이 아니라 현실을 똑바로 바라보라 소리치며 가뜩이나 황량한 내 가슴에 마른 불을 지피느냐 말이다.
 

<투명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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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가족이라서가 아니라 정말 훌륭하고 고귀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저절로 좋아하고 존경하게 된 거다. 태어나면서부터, 타고나기를 그랬던 것 같다, 그들은 나의 뿌리이고 울타리이고 자랑이다, 나는 그들이 정말 좋다, 지금도 그렇다, 눈을 감으면 언제든 복숭아꽃 살구꽃이 환하게 핀 고향의 집에서 어머니가 나오기를 기다리며 마당에 서 있는 게 보인다, 형님은 하모니카로 ‘클레멘타인’을 불고, 아버지는 가마니를 짜고 새끼를 꼬고 있다. 어서 와, 어서 와, 누나들은 산나물이 담긴 바구니를 옆에 끼고 나를 향해 손짓한다, 할아버지의 글 읽는 소리, 할머니의 다정한 말소리, 동생들이 달려나온다, 석수다, 옥희다, 나는 마주 달려간다, 부엌에서 달그락달그락 소리가 난다. 햇볕이 따뜻하다. 소가 운다. 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른다, 내 아들 태석이가 까르르 웃는 소리가 들린다, 앞치마를 한 아내가 손을 닦으며 나를 바라다보고 있다. 보고 싶은 사람들이 모두 모였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거기 다 있다. 보인다. 지금 같은 순간이 있어서 나는 행복하다. 내가 목숨을 다해 사랑하는 사람들이 나를 부르는 소리, 기쁨이 내 영혼을 가득 채우며 차오른다. 모든 것을 함께 나누는 느낌, 개인의 벽을 넘어 존재가 뒤섞이고 서로의 가장 깊은 곳까지 다다를 수 있을 것 같다, 이게 진짜 나다.” - 〈투명인간〉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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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우리는 가까이 있으면서도 함께 있고 싶고, 함께 느끼고 싶고, 함께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따듯함을 그리워하고, 그리하여 따듯하게 손 잡아주고 토닥토닥 위로해주는 그런 사랑을 애타게 그리는 투명인간일지도 모른다. 동네에서 마주치는 사람들, 버스 안에서 흔들리는 사람들, 상가를 구경하는 사람들, 카페의 한 공간 안에 앉아 있던 사람들, 분명히 만났지만 투명인간처럼 그들이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우린 모른다. 투명인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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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주부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중학교에 다니는 친구 딸이 학교에서 또래 친구들과 무슨 문제가 있었는지 어떤 그룹에도 속하지 못하며 어울리지 못했다. 이 아이에게 가장 큰 상처는 함께 밥 먹을 친구가 없다는 것. 아무도 함께 점심을 먹어주지 않아 점심시간마다 오랫동안 화장실 변기 위에 앉아서 시간을 때웠다고 한다. 어느 날 친구들끼리 모여 자신을 험담하는 이야기까지 화장실 안에서 몽땅 듣고 열병을 앓고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 이 아이는 투명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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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를 잘 만드는 피디가 갑자기 비제작 부서에 발령받아 빵을 만들고 예절교육을 받는다. 생뚱맞게 투명인간처럼 살아가고 있다. 사람 취급 못 받아 억울하다며 분신한 경비원 때문에 아파트의 이미지가 나빠졌다는 이유로 (실제로는 아파트 값이 떨어질까 걱정하는 것이겠지만) 경비원 전원 해고 통보를 했단다. 투명인간 취급이다. 영화 〈카트〉 속 주인공(염정아)은 우리를 투명인간 취급하지 말아달라고 울부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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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가 하면 보자마자 마음 아파서 한동안 나를 멍하게 만든 투명한 아이(사진)도 있다. 어느 작가의 작품인지는 모르지만 투명하고 투명한 이 아이 때문에 또 운다. ‘잊지 않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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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명 김미화 (코미디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