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열풍은 ‘아는 것이 힘’이며 ‘아는 것이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본질에 육박하려면 인문 고전을 읽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현상을 모르는데 무슨 본질을 알랴? 공자와 플라톤은 ‘구제역(口蹄疫)-살처분’ ‘천안함-세월호’ ‘뉴라이트-넷우익’ ‘체르노빌-후쿠시마’ ‘미사일방어(MD)-아시아 재균형(Pivot to Asia)’ ‘종교근본주의-이슬람국가(IS)’에 대해 아무 할 말이 없는 사람들이다. 열거한 문제들에 대한 인문학적 개입은 자기색정을 넘어 구체적인 현상과 사건을 추상적으로 만들고, 해결 가능한 접근을 날려버린다.

간혹 ‘인문팔이’로 불리기도 하는 이들은 인문학이 좋은 사회를 만든다고 말하지만, 정작 좋은 사회란 인문 고전을 읽어서 그리되는 사회보다 읽지 않아도 그런 사회다. 세계에서 행복지수가 가장 높은 덴마크·핀란드·스웨덴이나 한국 지식인들이 부러워하는 프랑스의 시민들이 얼마나 인문학에 밝을까? 우리가 부러워하는 선진국은, 좋은 사회를 만드는 것은 인문학이 아니라 좋은 제도의 결과라고 말해준다. 100만명이 인문 고전을 배우고 익혀서 좋은 사회를 만들 수 있는 확률보다, 1만명의 적극적인 정치 참여자, 혹은 1000명의 ‘데모꾼’이 더 좋은 사회를 만든다.

최고 경영자들이 인문학 주변을 기웃거리는 것은 변괴다. 노동조합 활동을 보장해주고, 정경 유착의 이득을 거부하며, 친환경적인 기술과 상품을 개발하고, 여성·지역·학력 등의 차별을 없애고, 비정규직을 줄이는 노력만으로도 최고 경영자는 인문학을 실천하는 것이다. 그들의 인문학은 〈전태일 평전〉이나 〈삼성반도체와 백혈병〉이지 괴테나 들뢰즈가 아니다. 정녕 웃기고 슬픈 것은, 일반인을 위한 강의에서는 온갖 무례한 언사로 ‘당신들은 왜 그렇게 사는 거냐? 왜 그렇게 못났느냐?’라고 닦달하며 무안까지 주는 인문학 스타들이 최고 경영자 앞에서는 안 그런다는 것이다.

나온 김에 문학 이야기도 하자. 한국은 문학이 너무 강한 사회다. 젊었을 적에 시집이나 소설 몇 권을 읽는 것으로 교양인 행세가 가능한 사회, 소설과 시만이 글쓰기의 왕도이며 이외는 모두 잡문인 사회, 온갖 사회적 의제와 다양한 글감까지 문학이라는 대롱으로 흡수되어버리는 사회는 부메랑을 맞게 된다. 잘나가는 인기 작가의 소설이 50만∼100만 부씩 팔리고 그것이 술자리 화제가 되거나, 저녁 9시 뉴스를 열고 닫는 인사말이 되는 사회는 가망이 없다. 무릇 소설은 2만 부만 팔려도 족하고, 서른 살을 넘긴 성인에게는 필요치도 않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이지영 그림〈/font〉〈/div〉

다만, 스물다섯 살 이전에 무시무시한 문학작품 100권을 챙겨 읽어야 한다. 문학적 교양이란 젊었을 때 읽었던 ‘대문학’을 평생 반추해야 쌓이는 무엇이지, 아무거나 읽어서 되지 않는다. 바람직한 사회는 예컨대 천안함-세월호 사건 직후, 거기에 대한 논픽션이 20여 권이나 쏟아져 나오는 사회다. 그 가운데 어느 한 권이 베스트셀러가 되어 술자리 화제가 되고 저녁 9시 뉴스를 열고 닫는 인사말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준비된 논픽션 작가가 있어야 하고, ‘쟤들은 문학을 할 능력이 없어서 저런 걸 쓰는 거야’라는 편견으로부터 그들을 지켜주기 위해서는 소설보다 논픽션 독자가 많아져야 한다. 그런 뒤에야, 문학 지망생을 경유하지 않고 처음부터 논픽션 작가가 목표인 양질의 논픽션 작가가 나올 수 있다.

문사(文士) 전통이 강한 한국 사회와 독서계, 그리고 10여 년간의 인문학 열풍은 높은 ‘장르 피라미드’를 쌓으며 논픽션을 홀대해왔다. 논픽션은 말 그대로 픽션(허구)이 아닌 모든 것을 통칭하지만, 전통적인 인문서는 마땅히 제외된다. 하지만 논픽션이 하대받다 보니, 외국에서는 논픽션이었던 것이 한국에서는 인문서로 둔갑(‘장르 세탁’)되기도 한다. 논픽션은 민주 사회를 지키는 보루이며, 나아가 공공의 가치를 지키는 데 필요한 무기다. 독서에 진도(進度)라는 게 있다면, 이런 믿음과 상응하는 노작을 검토하고 지지하면서 ‘아는 것이 힘’이라는 실체와 만나는 것이다.

‘이명박근혜’ 정권이 좀먹은 진짜 안보

최근에 읽은 논픽션 한 권을 추천하라면 김종대와 정욱식의 대담집 〈김종대 정욱식의 진짜 안보-대한민국을 위협하는 ‘가짜 안보’를 해부한다〉(서해문집, 2014)를 꼽겠다. 이 책의 제목과 부제는 ‘진짜 안보’와 ‘가짜 안보’가 서로 대적하는 형국이다. 진짜 안보가 공동체(국가)의 평화를 지키고 번영을 가꾸기 위해 안보를 고민한다면, 가짜 안보는 공동체의 평화나 번영은 팽개친 채 권력 유지와 정치적 목적을 위해 안보를 이용한다. 보통 ‘좌파는 평화, 우파는 안보’라는 틀에 갇혀, 진보나 좌파는 국방과 군사 문제에 등한할 것이라는 기우가 있다. 하지만 ‘이명박근혜’ 정권 동안 가짜 안보는 진짜 안보를 집요하게 좀먹었다.

가짜 안보의 대표 사례가 2012년 대선에 불법 개입한 사이버사령부의 심리전이다. 야당 대통령 후보에 대한 사이버사령부의 조직적인 댓글 공격은 5·16과 12·12에 이은 세 번째 군사 쿠데타라고 해도 군은 할 말이 없다. 조직적인 불법이 뻔히 드러났는데도 의원직 총사퇴를 걸고 싸우지 않았던 새정치민주연합(구 민주당)은 한심하다. 의원직을 좀 더 누리고자 쿠데타를 방치했으니 민주주의도 국민도 다 내버린 것이다. 용기백배한 국방부는 정신전력원을 창설해서 사병들에게 종북 퇴치 교육을 하겠다고 한다. 이에 지은이들은 정신전력의 핵심은 종북 퇴치 따위가 아니라 미군의 수중에 있는 전시작전권 환수에 있다고 말한다.

전작권이 유사시에 미군의 자동 개입을 보장해준다는 맹신도 착각이지만, 2010년 11월 연평도 포격 때처럼 한국군이 미군 허락 없이는 작전을 벌일 수 없다는 것도 문제다. 당시 대한민국 군대의 장군들은 보복 공격 여부를 놓고 두 패로 갈린 채 일주일 동안 논전을 벌이다가, 뒤늦게 한민구 합참의장이 월터 샤프 한·미 연합사 사령관에게 가부를 물었다고 한다. 미국 정부가 시키는 대로 하는 장군들에게 무슨 정신전력이 있겠나? 2005∼2007년에 우리가 쓴 국방 예산은 23조원이었다. 북한은 1조원을 썼다. 국방부 공식 발표에 따르면 남북의 국방비 차이는 무려 34배다. 그런데도 국방부는 “1대1로 싸우면 남한이 진다”라는 말을 태연하게 한다. 아아, “한산섬 달 밝은 밤”이여! 김종대·정욱식은 이 시대에 가장 뛰어난 병가(兵家)다. 이들의 오른편에 설 보수 진영의 군사평론가나 국방통은 없다. 다음번에 정욱식의 〈MD본색〉(서해문집, 2015)을 다루면서 이 책을 다시 거론하고자 한다.

기자명 장정일 (소설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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