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1년 5월16일 새벽이었어. 김포에서 출발한 해병대 트럭이 우릉우릉 소리를 내면서 서울로 들어오고 있었지. 지휘관은 해병여단장 김윤근 준장. 그는 국방장관이나 참모총장의 명령이 아닌 별 두 개짜리 장군의 명령을 받고 출동한 길이었단다. 별 두 개, 즉 소장(小將) 계급장을 단 장군의 이름은 박정희. 그는 서울 염창교 근처에서 해병대와 만난다. “다른 부대는 나오지 못했소. 해병여단만 가지고 강행해야겠소. 김 장군만 믿소.” 해병대는 다시 서울 시내를 질주하기 시작해 당시 한강에 하나뿐인 다리였던 한강대교를 건너. 이른바 5·16 ‘군사정변’, 즉 쿠데타가 본격화되는 순간이었지.

당시 정부가 제대로 된 정부였고 임무를 맡은 사람들이 제 몫만 했으면 이 ‘군사정변’은 한강을 건너지도 못하고 진압됐을지 몰라. 하지만 역사는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어. 참모총장은 해병대가 출동한다는 말을 듣고도 군사정변의 주모자를 ‘설득’하고 있었고 대통령(이때는 내각책임제여서 실제 권력은 총리에게 있었지만)은 “올 것이 왔구먼”이라는 묘한 말을 하면서 군사정변에 강력히 대응하지 않았지.

 

ⓒ연합뉴스5·18 민주화운동을 진압했던 전두환(앞줄 맨 오른쪽) 등 신군부 세력은 내란죄 등 혐의로 법정에 섰다.

그럼 정부의 수반, 즉 최고 권력을 쥔 총리는 무얼 하고 있었을까? 이름은 장면(張勉)이었던 이 대한민국 총리는 우리 현대사에서 매우 볼썽사나운 ‘장면’을 연출해. 쿠데타 소식을 듣자마자 숙소에서 뛰쳐나와 가톨릭 수녀원에 숨어버린 거야. 그 긴박한 상황에서 무려 54시간이나. 주한 미군 사령관 매그루더나 수십만 정예군을 거느린 1군 사령관 이한림은 쿠데타 진압을 주장했지만 막상 그걸 지휘하고 명령할 총리가 수녀원에서 숨을 죽이고 있었던 거야. “뭐 그런 사람이 다 있어? 세월호 선장 같아!” 하고 투덜거릴 네 모습이 눈에 선하구나. 결국 군사정변은 현실이 되고 말았어. 처음에 “혁명 과업이 성취되면 원대 복귀하겠다”라던 박정희 소장은 “다시는 나 같은 불행한 군인이 없기를” 기원하면서 전역한 후 대통령이 됐고 18년6개월 뒤 ‘불행한’ 최후를 맞기까지 그 자리를 지키게 되니까 말이야.

1961년 5월18일 육사생도들의 쿠데타 지지 행진

5·16 이틀 뒤 5월18일이면 쿠데타는 거의 성공 단계에 접어들었지만 아직 확고해진 건 아니었어. 당시 쿠데타군의 핵심이었던 김종필 중령의 회고록에 따르면 그날 오전 10시까지도 주한 미군 사령관은 “원대 복귀”를 요구하고 있었거든. 그런데 거의 비슷한 시간대에 서울 시민에게 군사정변이 사실상 성공했음을 각인시키는 이벤트가 펼쳐졌어.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이 열을 지어 ‘혁명 지지’ 퍼레이드를 벌인 거야. “육군사관학교의 사관생도와 장병들은 종로, 세종로, 태평로 등 수도의 심장부를 꿰뚫고 보무당당히 시가행진을 하면서 5·16 군사혁명을 지지 성원하였다… 연도에 모여든 수만 시민들로부터 박수를 받았다.”(〈동아일보〉 1961년 5월19일자)

아빠가 고2쯤 됐나, 〈제3공화국〉이라는 책을 읽었는데 한 대목이 기억에 선명하다. “한 애국심에 불타는 대위”가 박정희 소장을 방문하여 용감하게 거사의 이유를 물었다고 해. 책 속에서 이 대위는 무슨 어린 날의 이순신쯤으로 묘사돼 있었지. 새까만 대위 주제에 쿠데타 최고 지휘관에게 전혀 주눅 들지 않고 대드는 영명한 사람으로. 그도 그럴 것이 대위의 이름은 전두환이었거든. 아빠가 그 책을 읽을 즈음의 대한민국 대통령. 그는 박정희 소장의 ‘혁명의 대의’를 인정한 뒤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의 행진을 조직했다고 해. 육사 11기, 4년제 정규 육사로는 첫 기수였던 그는 후배들에게 ‘말발’이 먹혔다거든. 1961년 5월18일, 전두환이라는 이름은 그렇게 역사에 등장한다. 박정희 소장은 이 눈치 빠른 장교를 아껴 대통령이 된 뒤에도 끼고 다녔지. 대통령 박정희가 죽은 후, 역시 별 두 개였던 전두환 소장은 박정희 대통령과 비슷한 방식으로 피어나던 민주주의의 봄을 짓밟게 돼. ‘불행한 군인’ 이 또 나온 셈이야.
 

ⓒ연합뉴스

그가 육사생도들을 채근해 행진에 나서던 1961년 5월18일로부터 정확히 19년 뒤인 1980년 5월18일이 밝았다. 그 전날 전두환 일파는 힘없는 정부를 압박해 비상계엄을 선포했고 전국 각 도시에 군인을 출동시키고 총칼로 사람들을 억누르려 들었지.

그리고 마침내 광주에서 비극은 폭발하고 말아. 네가 영화 〈26년〉에서 본 그대로. 전두환의 군인들은 학생과 시민을 가리지 않고 몽둥이로 머리를 깨뜨렸고 군홧발로 얼굴을 뭉개고 대검으로 사람을 찔렀어. 남편의 귀가를 기다리며 거리에 나온 임신부가 총에 맞았고, 살려달라고 사정하던 사람들이 싸늘한 시체로 변했어. 육사생도 시위를 조직해서 5·16 군사정변의 한 장을 장식했던 전두환은 어쩌면 자신의 군대가 위용을 갖춰 행진하고 여차하면 짓밟아버릴 경우 19년 전의 5·18처럼 사람들이 순순히 자기 맘대로 되리라 생각했던 게 아닐까. 그러나 광주는 달랐어. 광주 시민들은 전두환의 군대에 저항해 무기를 든다(위쪽 사진).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얘기해. 아무리 그래도 군대에 맞서 총을 든 건 잘못 아니냐고. 부산 가면 할아버지도 그러시지. 하지만 아니야. 민주공화국 국민은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에 복종할 의무가 있지만 부당한 권력에 항거할 권리 또한 있어. 그리고 그 권리를 제대로 행사하지 못할 때 국민은 노예가 되는 거야. 총을 들고 저항한 게 잘못이라면 왜 미국인은 영국에 대항하여 봉기한 독립선언을 기념하며 프랑스인은 시민들의 정부 요새 공격(프랑스 혁명일)을 기리며 요즘도 몇 날 며칠을 축제로 지새우겠니. 광주 시민은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대한민국의 자존심을 세웠던 거란다. 비록 고립되고 포위돼서 아무도 도와주지 못하는 가운데 처절하게 스러져 갔을지언정 말이다.

악몽 같은 1980년 5월18일 이후 수백명이 죽었어. 그중 가장 어린 희생자는 아빠랑 동갑이다. 1970년생 개띠였어. 우리 나이로 열한 살. 이름은 전재수. 동갑이니까 막 부른다고 치고, 재수는 동네 아이들과 놀다가 군인 아저씨들이 트럭을 타고 지나가는 걸 봐. 아빠가 어렸을 때 장래 희망을 물으면 꽤 많은 아이들이 ‘군인’이라고 대답했으니 아마 재수도 신이 나서 군인 아저씨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을지도 몰라. 그런데 그 아저씨들은 재수를 향해 총을 겨눈다. 시민에게 쫓겨 달아나다가 광주시 바깥에 진을 치고 있던 동료 군인들이 오해하고 쏜 총에 여럿이 죽고 다친 원한을 풀려던 거였을까. 아니면 열한 살 아이도 용서 못할 폭도로 보였을까. 아빠랑 동갑이었던 재수는 무려 열 발이 넘는 총탄을 맞고 죽어갔단다.

그 총을 쏜 군인 아저씨도 아마 부모가 있었을 것이고 재수만 한 조카가 있었을 거야. 하지만 그들은 열한 살 어린아이의 작은 몸뚱이에 총알 열 발을 박아넣는 악귀로 돌변했다. 그들을 악귀로 만든 건 누구였을까. 바로 전두환이었어. 1961년 5월18일 쿠데타군에게 승리의 신호를 보낸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의 퍼레이드 연출자이며 1980년 5월18일 광주를 피눈물의 도시로 만들고 선량한 청년을 사람 잡는 악귀로 만들었던 사람. 눈치 챘는지 모르겠지만 아빠는 가급적 그 이름 뒤에는 대통령 칭호를 붙이지 않아. 그는 민주공화국에서 있어서는 안 될 ‘불행한 대통령’이었으니까. 해마다 5월18일은 돌아오고 많은 이들이 그를 새삼 기억 밖으로 끄집어낸다. 아마 그에게도 5월18일은 잊기 힘든 날일 거야. 육사생도들의 행진과 공수부대의 ‘활약’으로. 2015년 5월18일, 그는 오늘도 아주 잘살고 있네.

기자명 김형민(SBS Biz PD)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