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저출산 놔두고 국민연금 해결?
4일 만에 무너진 4개월 공든 탑
산통 깨놓고 “정치, 병 걸리셨어요?”
연금에 대한 ‘불신’ 지핀 주무 장관

공든 탑이 쉽게 무너졌다. 5월6일 공무원연금 개혁안이 여당 일부 의원과 정부의 반대로 끝내 무산됐다. 총 4개월, 수천 장에 이르는 참고자료. 36회에 걸친 회의 끝에 만들어진 합의안이 엎어지기까지 나흘이면 충분했다. ‘정치의 성과’라 자평했던 결과물이 순식간에 ‘정치의 실종’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연장전에 걸친 긴 합의였다. 공무원연금 개혁안 합의는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1월부터 3월 말까지 예정되어 있던 공무원연금개혁 특별위원회 기한을 한 차례 늘리고 나서야 합의가 완료되었다. 최종 합의안도 특위 시한이 끝나는 5월1일 저녁에야 완성됐다. 청와대가 문제 삼고 있는 국민연금 소득대체율 인상안과 공무원연금 개혁을 통한 재정 절감액 가운데 얼마를 공적연금 강화에 투입할 것인지도 이날 합의했다. 최종 합의 직전까지 청와대와의 의견 교환도 수시로 이뤄졌다는 것이 각 당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합의 파기로 잃어버린 것 중 하나는 정치 과정의 정당성이다. 적극적 중재자로서 입법부의 역할에 흠집이 생겼다. 사실 공무원연금 개혁안은 특수한 조건 때문에 합의가 쉽지 않은 이슈였다. 여야 정치권이 ‘대리’해야 할 존재가 기본적으로 부담이었다. 여야는 각각 표면적으로 정부와 공무원단체를 대리했으나, 모두 정치적 후폭풍을 염두에 두어야 했다.

국민연금 개혁과 달리, 공무원연금 개혁은 특정 직군이라는 조건이 붙어 있다. 연금 개혁에 반발하는 공무원 집단은 ‘잘 조직화된 소수’다. 약 100만명에 이르는 공무원 집단은 전체 유권자에 비하면 적지만, 이들의 가족까지 생각하면 무시하기 어렵다. 공무원의 표심이 특정 정당에 적대적으로 흘러간다면 양당 구도 선거에서 치명적일 수 있다. 여당 처지에서는 개혁안을 밀어붙이되, 공무원의 반발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했다.
 

ⓒ연합뉴스5월2일 ‘공무원연금 개혁 및 국민연금 강화를 위한 양당 대표 합의문’을 발표한 새누리당·새정치민주연합 지도부. 하지만 금세 합의가 깨졌다.

그렇다고 야당이 적극적으로 공무원을 대리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공무원 집단의 표심을 얻자고 소수 세력의 대변인으로 비치는 것은 더욱 피해야 했다. 일반 대중의 상대적 박탈감은 야당에게도 정치적 부담을 지운다. 여당과 마찬가지로 야당도 긁어 부스럼은 피해야 했다.

역설적이게도 이런 조건이 정치적 합의에 이르는 열쇠가 되었다. 여야 모두 자신이 대리하는 세력 편만 들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국회 특위 기한을 연장한 3월 말, 한 야당 관계자는 “현재 서로의 카드를 뻔히 알고 있는 상태다. 99.9% 합의에 이른 것과 다름없다. 공무원연금 개혁안은 여야 모두 빨리 털고 싶은 이슈다”라고 말했다. 정치의 사회적 기능을 선보이고, 서둘러 여야가 각자 원하는 다른 이슈로 넘어가야 한다는 말이었다. 각각 ‘많이 양보했지만 승리한 경기’ ‘지더라도 이긴 것과 마찬가지인 경기’를 하고 싶었다는 설명이다.

청와대가 반발한 국민연금 강화 이슈도 이러한 배경에서 생겨났다. 원래 공적연금 강화는 야당과 공무원 집단을 이어주는 중요한 연결고리였다. 공무원 집단은 상향 평준화를 지향해야 할 연금정책이 공무원연금 삭감을 통해 하향 평준화되고 있다며 반발했다. 공무원 집단 처지에서 국민연금을 강화하는 것이 실리와 명분을 모두 챙길 수 있는 대안이었다.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논거였다. 공무원 집단 스스로도 여론이 공무원연금에 호의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무원연금 개혁의 성과로 얻은 재정 여력 중 일부를 국민연금에 투여하는 것은 여론의 호의를 얻으면서 장기적인 격차를 줄이는 방법이었다. ‘지고도 이기는 경기’라는 이야기다.

야당에게도 공적연금 강화는 중요한 이슈였다. 공무원연금 개혁안은 어떤 식으로 통과되든 야당의 ‘성과’로 자랑하기는 어려운 이슈였다. 그런데 공적연금 전반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움직일 경우, 소수 이익의 대변자가 아닌 연금정책 전반에 대한 조정자 지위를 어필할 수 있다. 야당과 공무원단체의 명분과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는 지점이었다.

연금 개혁 논의 시작 단계에서 공무원 집단과 야당을 엮어준 고리가 공적연금 강화였던 만큼, 이를 정부가 뒤집은 것은 일방적인 약속 파기라는 게 야당의 주장이다. 특별위원회에서 활동한 새정치민주연합 김용익 의원은 5월6일 “우리 당 위원들은 시작 단계부터 국민연금의 소득대체율 향상을 주요 의제로 설정해두고 있었다. 논의가 없었던 것도 아니고 갑자기 들어간 것도 절대 아니다”라고 밝혔다. 지난 1월 국민대통합기구 설립 당시 ‘노후소득 보장 분권위’를 구성하는 단계에서 이미 공적연금 전반에 대한 접근이 이어져왔다는 설명이다.

여당의 최우선 목표는 ‘시한 내 합의’였으나…

반면 여당은 공무원연금 개혁안 통과 자체가 중요했다. 국민연금과 연계한 협상이 가능했던 것은 시한 내 합의가 여당의 최우선 목표였기 때문이다. 공무원연금 개혁으로 발생하는 총 재정절감액(약 333조원) 중 공적연금제도 개선에 활용하는 비율이 협상 막판 쟁점으로 떠올랐지만, 결국 20%에 합의한 것도 협상시한 내에 협상을 끝내기 위해서라는 설명이다. 막판까지 여당 측에서는 이 비율을 줄이려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공무원연금 개혁을 통해 정부가 쥐는 돈’을 최대화하기 위해서다.

5월2일 조윤선 청와대 정무수석과 문형표 보건복지부 장관이 합의안에 반대했지만, 여당 지도부가 최종 합의를 밀어붙였다. 실무기구 합의 과정에도 이미 인사혁신처, 행정자치부 등 정부 관계자가 참석한 상태였다. 합의 자체의 정치·사회적 자산도 컸다. 여당 추천 전문위원인 김용하 순천향대 교수도 이날 〈뉴시스〉와의 인터뷰에서 “구조개혁을 이루지 못한 점은 아쉽지만 재정 절감 목표를 달성했다는 점에서 만족스럽다”라고 말했다.

여야 당 대표가 직접 합의문을 들고 포토라인에 선다는 것은 입법에 이견이 없다는 뜻과 마찬가지다. 주요 정책 수립의 중심이 입법부라는 것도 내세울 수 있었다. 2013년 12월 철도노조와 정부 간의 합의를 중재했을 때와 비슷한 효과다. 최장기 파업 기록을 세웠던 당시 철도노조와 정부 간의 갈등은 여야 국토교통위 의원들의 중재로 최악의 상황을 피할 수 있었다. 정치권 스스로가 치적으로 삼기 좋은 이슈였던 셈이다. 5월2일 합의문 발표 현장에서 양당 대표는 각각 “사회 갈등을 최소화하는 안으로, 무엇보다 국민 대합의의 의미가 있다”(김무성), “이해관계자인 단체들이 동의한 사회적 합의를 통해 연금을 개혁할 수 있어 의미가 있었다”(문재인)라고 말했다.

하지만 청와대의 반발로 합의안이 무너진 뒤 양측은 뒤늦게 진실 공방만 반복하고 있다. 공식적으로는 추가 논의를 이어가겠다고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공무원연금과 국민연금을 별건으로 처리해달라는 청와대의 요청에 여당이 동조하는 구도로 흘러간다.

여야 협상 당사자가 바뀐 것도 난제로 꼽힌다. 5월7일 야당 새 원내대표에 이종걸 의원이 선출되면서 여야 원내지도부 간 협상이 원점으로 돌아갔다. 일각에서는 5월6일까지 본회의 통과를 위해 협상 테이블을 유지했던 유승민 원내대표의 리더십도 흔들릴 위험이 있다고 본다. 여야 모두 서둘러 털고 싶었던 공무원연금 개혁안은 정치권의 무기력만 드러낸 채 정국의 주요 이슈로 계속 살아 움직일 전망이다.

기자명 김동인 기자 다른기사 보기 astoria@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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