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에는 청문회가 없었거든?
  • 김은지 기자
  • 호수 398
  • 승인 2015.05.04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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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수사팀장이던 신창언 검사가 헌법재판소 재판관이 될 때는 가만히 있더니, 수사검사였던 박상옥 후보자가 대법관이 되는 건 왜 반대하느냐?’ 박 후보자를 감싸는 새누리당의 주요 논거다. 더 책임을 져야 할 자리에 있던 사람도 영전했다며, 박 후보자에 대한 반대가 애먼 사람 발목잡기라는 식으로 치부한다.

‘민주열사 박종철 기념사업회’ 등 박 후보자를 반대하는 이들은 ‘물타기’라고 지적한다. 1994년 당시만 하더라도 헌법재판소 재판관의 청문회가 없었다. 그때도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 등은 사건 수사 은폐·축소의 책임을 물으며 사퇴를 요구했다. 무엇보다 검찰의 책임은 2009년 국가기관의 보고서로 명시적으로 확인됐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연합뉴스</font></div>1987년 1월19일 박종철을 고문한 두 형사를 태운 차량이 보도진에 둘러싸여 있다.
박종철의 아버지 박정기씨가 신청한 ‘관계기관대책회의(안기부·법무부·내무부·검찰·청와대 비서실 및 이들 기관의 기관장이 참여한 대책회의) 은폐·조작 의혹’에 대해 2009년 5월11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는 결정문을 냈다. 박종철 사건은 애꿎은 대학생이 잡혀가 물고문을 당하다 죽은 사건만이 아니라, 그것을 은폐하고 윗선을 보호하려는 국가권력의 집요한 거짓말이 뒤얽힌 사건이라는 점을 국가가 공식 인정한 셈이다.

“검찰 또한 사건의 진상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직무를 유기하여 수사를 제대로 진행하지 못했다. 그러다 은폐 사실이 폭로된 이후에야 추가 공범을 포함, 치안본부 관계자 등 은폐에 가담한 책임자를 최소한만 기소해 결과적으로 관계기관대책회의의 부당한 개입을 방조하고 은폐한 잘못이 있다.”

보고서에는 또 당시 검사들이 범인이 더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의혹을 뒷받침하는 증언도 실려 있다. 부검을 지휘했던 당시 서울지검 최환 공안2부장은 “2명을 기소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화가 나 안상수에게 전화해 ‘둘밖에 없어?’라고 하자, ‘3명이 더 있는 것 같다’고 하였고, 총장을 만나 이야기를 했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라고 진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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