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미국 오바마 대통령은 연두교서에서 아시아 경제 맹주를 노리는 중국을 겨냥해 “세계의 경제 규칙은 중국이 아닌 우리가 정한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미국 주도의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의 조속한 타결 필요성을 역설했다. 당시 오바마 대통령의 호소에 우군인 민주당은 물론 공화당도 꿈쩍하지 않았다. 그런데 최근 중국이 주도하는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의 창립 회원국이 57개국에 달하자 충격을 받은 미국 의회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바마 행정부가 TPP를 조속히 타결할 수 있도록 무역협상촉진권한(TPA)을 부여하기로 한 것이다.

무역협상촉진권한을 받으면 의회가 행정부의 협상안에 찬반 투표를 할 수 있어도 수정은 불가하다. 의회가 협상안에 간섭하면 타결이 힘들어지기 때문에 역대 행정부는 주요 무역협상을 벌일 때마다 의회에 이 같은 권한을 요청해왔다. 2011년 10월 한·미 FTA가 미국에서 신속하게 처리될 수 있었던 것도 무역협상촉진권한 때문이었다. 오바마 행정부는 2012년부터 번번이 TPP 협상 기한을 넘기는 의회에 무역협상촉진권한을 끈질기게 요청해왔다. 그때마다 의회는 근로기준과 통화 조작 등 문제를 제기했는데, 이번에 태도를 바꾸었다.

ⓒAP Photo1월27일 의회에 출석한 마이클 프로먼 미국 무역대표부 대표(왼쪽)가 TPP 협상과 관련해 발언하는 동안 한 방청객이 일자리에 대한 우려를 나타내는 피켓을 들어 보이고 있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의회의 이번 조치는 미국의 우방을 포함해 50개국 이상이 AIIB에 참여하면서 나왔다”라고 지적했다. 의회가 중국의 AIIB 급부상에 압박을 받았다는 뜻이다. 일본 국제문제연구소 다카기 세이치로 연구원은 〈블룸버그 뉴스〉에서 “독일과 같은 미국의 우방국은 AIIB에 가입하지 말라는 미국과 일본의 요청을 거부함으로써 미국 외교가 실패한 사실을 알려주고, 일본은 미국의 실패한 전략을 추구하는 인상을 주었다. 그런 차원에서 TPP 협상을 촉진할 수 있는 자극이 됐다”라고 말했다.

TPP 12개국의 경제 규모는 전 세계 국내총생산(GDP)의 40%를 차지할 정도로 막강하다. 하지만 미국이 TPP 협상에 가속페달을 밟기로 한 것은 경제적 요인만은 아니다. 미국은 오바마 행정부가 집권한 뒤 이른바 ‘아시아 재균형’(Asia Rebalancing) 혹은 ‘아시아 중심축’(Asia Pivot)이라는 슬로건을 앞세워 중국의 급부상을 견제하기 위해 각방으로 노력해왔고, TPP 협상도 그런 노력의 일환으로 볼 필요가 있다. 이런 기류는 애슈턴 카터 국방장관이 “TPP는 항공모함 한 척을 추가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일이다”라며 이례적으로 안보 측면을 부각한 데서도 잘 드러난다.

ⓒEPA2014년 10월26일 시드니에서 열린 TPP 협상 기자회견. 올해 TPP가 체결되지 않으면 내년 미국 대선과 겹치며 차기 행정부로 넘어갈 가능성이 높다.
중국이 미국을 AIIB에 초청한 것과 달리 미국은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TPP에서 중국을 배제했다. 미국이 AIIB에 가입했다면 제반 환경을 만드는 데 영향을 끼칠 수 있었지만, 기회를 스스로 내쳤다. 이를 두고 중국 언론은 “미국이 TPP를 만들려는 진짜 목적은 세계무역기구(WTO)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중국의 경제성장을 막으려는 데 있다. TPP는 경제적 측면의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나 다름없다”라고 신랄하게 비난했다.

오바마 행정부가 TPP 협상을 서두르고 있지만 최종 타결까지는 갈 길이 멀다. 당장 TPP 회원국 경제 규모의 80%를 차지하는 미국과 일본이 먼저 협상을 마무리해야 한다. 양국은 자국의 핵심 산업을 얼마나 보호할지를 두고 치열한 협상을 벌여왔다.

미국이 일본과 협상을 타결해도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TPP 회원국 가운데 베트남·말레이시아·칠레·페루 같은 개발도상국 처지에서는 관세 철폐 외에도 지적소유권과 서비스 부문, 환경과 노동 기준, 국영 기업체와 민간 기업체 간 경쟁관계 등 협상해야 할 지점이 상당하다. 당초 TPP의 강력한 지지국이던 필리핀은 미국이나 일본 같은 선진국이 무차별적으로 첨단기술 시장에 진입할 가능성을 우려해 TPP 가입을 포기한 바 있다.

대선 코앞에 두고 ‘정치적 짐’이 된 TPP

미국 내부의 정치적 상황도 혼란스럽다. 오바마 행정부는 의회가 제시한 요구 사항을 협상에 반영하지 못하면 비준을 받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미국 의회는 최종 협정에 담을 노동 기준과 환경 기준, 인권 등을 행정부에 제시하면서 요구 사항이 포함되지 않을 경우 상원의원 60명의 표결로 무역협상촉진권한을 폐지하고 의회가 협정 내용을 개정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압박 중이다. 최종 협정이 나오더라도 대통령이 승인하기에 앞서 60일 동안 일반이 열람할 수 있어야 하며, 그 뒤 의회는 비준 투표를 하기 전 최대 4개월간 심의할 수 있다. 이런 일정표대로 간다면 최종 협정이 5월 중 나와도 빨라야 오는 10월쯤에나 의회가 TPP 최종 협정을 심의할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문제는 10월부터 대선 예비주자들이 다음 해 1월 아이오와 주 예비경선을 염두에 두고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간다는 점이다. 득표에 방해가 된다면 TPP는 이들에게 정치적 짐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 이 같은 사정 때문에 민주당 대권 선두 후보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은 고민이 깊다. TPP를 가장 반대하는 측이 민주당의 전통적인 지지 세력인 노조이기 때문이다. 56개 직능별 산하 회원 1200만명을 거느린 전미 노조는 엄청난 광고비를 퍼부으며 TPP를 반대하는 동시에 특정 의원들을 상대로 행정부에 무역협상촉진권한을 주지 말라고 압박했다. 노조는 개발도상국이 대거 포함된 TPP 협상이 마무리될 경우 미국 노동자들의 일자리 상실과 임금 저하를 우려한다. 노조의 이런 위세 때문인지 민주당 하원의원 188명 가운데 TPP를 지지하는 의원은 15명도 안 된다.

이처럼 노조 차원의 반대가 극심한 상황에서 힐러리 전 국무장관이 TPP를 지지한다면 내년 대선에서 노조원들이 대거 몰려 있는 오하이오 주, 네바다 주를 비롯한 지역에서 참패를 각오해야 한다. 전통적으로 대선에서 승리하려면 표심이 변덕스러운 오하이오 주에서 이겨야만 한다. 하지만 그녀는 국무장관 재임 시절 외교의 중심을 유럽과 중동에서 아시아로 옮기는 ‘아시아 중심축’ 정책을 입안한 데다 자유무역 옹호론자를 자처해온 까닭에 정치적 실리 때문에 TPP를 반대할 수만은 없는 처지다. 힐러리가 TPP에 대한 명확한 견해를 유보한 채 “어느 무역협정이건 일자리 창출과 임금 인상은 물론 미국의 안보와 번영을 증진해야 한다”라는 원론적 얘기만 강조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올해 TPP 협정이 나오지 않으면 내년 대선과 겹치면서 차기 행정부로 넘어갈 수 있다는 전망까지 나온다. 지지부진한 미국과 달리 중국은 6월 말까지 AIIB 제반 운영 규정을 마무리하고, 늦어도 연내에 창업 자본금 1000억 달러 규모의 AIIB를 공식 출범시킨다는 계획이다. 1994년 발효한 나프타(북미자유무역협정) 이후 최대 규모인 TPP를 출범시켜 경제·외교·안보 카드로 활용하려던 미국은 복잡한 내부 사정 때문에 쾌속 순항 중인 중국에 완패가 불가피해 보인다.

기자명 워싱턴∙정재민 편집위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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