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희생자와 실종자 304명은 세월호가 뒤집힌 2014년 4월16일, 이 하루를 넘기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을 것이다. 따져보면 이 글을 쓰고 있는 2015년 4월16일은 304명의 제삿날이다. 이 제삿날 박근혜 대통령은 진도 팽목항에 내려가서 “가능한 한 빠른 시일 내에 선체 인양에 나서도록 하겠다”라는 내용의 담화를 발표했다. 선체 인양은 이미 여러 경로로 공식화된 이야기였다. 세월호는 현재 한국 사회에서 가장 첨예한 사안이다. 그런 사안에 대해 대통령이 장관을 대동하고 팽목항까지 가서 마이크 앞에 섰는데, 뭐 하나 새로울 것 없는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이 억지스러운 담화에서 작은 희망을 보았다. 해양수산부 장관을 포함해 대통령 옆에 선 이들 모두가 세월호의 상징인 노란 리본을 달았던 것이다. 그것도 화면에 잘 나오라고 아주 커다란 노란색 목도리를 감아 리본을 표현했다. 대한민국은 불과 8개월 전 프란치스코 교황이 세월호 리본을 달자 “중립을 지켜야 하니 그것을 떼는 게 좋지 않겠느냐”라고 압박을 하던 나라였다. 그 나라의 대통령이 이제는 노란 리본 속에서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무엇 하나 제대로 바뀐 것이 없지만, 그래도 여기까지 왔구나 싶었다. 묵묵부답이었던 대통령을 최소한 노란색 리본 옆에는 세울 수 있게 된 것이다. 대통령만일까. 여당 원내대표도 “희생자와 실종자 가족들에게 국가는 왜 존재합니까?”라며 자신들의 책임을 고백했다. 그 이면에 깔린 정치적 계산을 떠나서, 분명한 변화다. 유기준 해양수산부 장관이 선체 인양에 대한 찬성 여론이 높아서 굳이 여론조사를 따로 할 필요가 있겠냐고 할 정도로 분위기도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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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유가족 덕분이다. 유가족들은 가족의 죽음 앞에서 계산도 타협도 할 수 없었다. 굶고, 삭발하고, 길바닥에서 밤을 새우고, 통곡했다. 그렇게 1년, 세상의 손가락질과 정치권의 술수 앞에서도 유가족들은 고집스럽게 “내 자식들이 왜 죽었는지 알려달라”고 했다. 사실 그 1년 동안 세월호는 언제든 조용히 가라앉을 수 있었다. 요란하게 시작한 국회 청문회는 파행으로 끝났고, 특별법은 수차례 미끄러지길 반복했다. 보상 문제에 대한 유언비어는 퍼질 만큼 퍼졌고, 매체들은 세월호 때문에 경제가 죽는다며 경제 회복의 골든타임을 잡아야 한다고 떠들어댔다. 오랜 무기력감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도 “저런다고 뭐가 바뀌겠나” 하는 심정으로 이제 세월호 얘기는 그만하자고 고개를 돌렸다.

바닷속에서 잠들어간 이들도 당신을 자랑스러워할 것입니다

그래도 유가족이 있었다. 자식이 죽은 뒤 장례를 치르지 못해, 자신들의 삶이 장례식이 된 사람들이 있었다(한강의 소설 〈소년이 온다〉). 지난 1년 유가족은 거리에서, 국회에서, 법원에서 ‘진실’을 밝히기 위해 싸웠다. 오준호의 〈세월호를 기록하다〉를 보면 권위로 가득한 법정에서조차 유가족들은 펜과 수첩을 들고 앉아 하나하나를 기록하고 재판부를 통해 피고인과 증인에게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그들은 재판부를 향해서도, 기소된 피고인을 향해서도 외쳤다. “제발, 제발 진실을 말해주세요.”

1주기인 오늘, 희생자들에게 추모의 고개를 숙이면서 유가족들에게는 존경의 고개를 숙인다. 바닷속에서 잠들어간 가족들이 당신과 같은 가족을 가졌다는 걸 분명 자랑스러워할 것이라고 감히 말씀드리고 싶다. 세월호 이후 한국 사회가 조금이나마 달라질 수 있는 기회를 잉태했다면 그건 유가족 덕분이다. 같은 사회를 나누는 사람으로서, 당신들의 그 처절한 희생으로 여기까지 온 것에 감사하면서도 부끄럽기만 하다. 세월호는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더 이상 당신의 고독한 절규만으로 세월호를 끌어올리도록 놓아두지 않겠다.

기자명 임재성 (평화 연구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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