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년 일제강점기가 남긴 유산은 알게 모르게 우리 사이에 스며들어 있단다. 이를테면 아빠는 “조선 놈들은 맞아야 정신 차린다”라는 말을 듣고 자랐어. 대한민국의 교사나 군인이나 학생이 바로 그런 말을 하면서 제자를, 졸병을, 후배를 때렸다. 식민지 시절 일본이 지겹게 부르짖던 소리가 고스란히 주입됐던 거지. 일본이 조선인의 머릿속에 집어넣으려고 했던 생각 중에 이런 것도 있어. “일본인과 조선인의 조상은 같고 한 뿌리에서 나왔다”라는 거였단다.

이건 조선인에 대한 친밀감에서 나온 얘기가 아니야. 너희랑 우리랑 원래는 하나였으니 지금 일본이 조선을 먹은 것도 새삼스러운 게 아니라는 논리를 펼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지. 조선과 일본이 ‘형제’라면 당연히 일본이 형이니 조선 사람들은 찍소리 말고 일본에 복종하라는 뜻이었고 말이야.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고 하고 싶지?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아빠는 가끔 한국 사람과 일본 사람이 쌍둥이처럼 닮은 점을 발견하고 혀를 찰 때가 있어.

최근 일본 문부과학성 검정을 통과한 중학교 역사 교과서에 ‘임나일본부’라는 게 등장했다고 시끌시끌했지. 임나일본부란 4~6세기 일본이 백제와 신라를 정복해 설치했다는 일종의 식민 통치 기구 같은 거야. 〈일본서기〉 같은 일본의 역사서에 나오지만 한국이나 중국의 기록과 들어맞지 않고 현실성이 부족해서 2010년 한·일 역사학계가 공식 폐기를 선언한 학설이야. 하지만 많은 일본인들은 이걸 진실로 받아들여 왔어.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그렇게 믿었으며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일본 고등학생들은 선조들의 옛 땅을 밟는 기분으로 부여·공주·경주를 누비기도 했지. 이런 식으로 자신들 보기에 흐뭇한 역사를 창조(?)하고 그걸 진실로 믿어버리는 습관이 낳은 최악의 참사 역시 일본인들의 것이었어.
 

ⓒ시사IN 정희상4월7일 고엽제전우회 회원 300여 명이 서울 조계사 건너편에서 집회를 열고 방한한 베트남인들을 돌려보내라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후지무라 신이치라는 일본의 고고학자가 있었어. 그의 별명은 ‘신의 손’이었다. 축구 골키퍼를 잘해서 붙은 별명이 아니야. 손대는 유적마다 기적에 가까운 고고학 유물을 발견했고 심지어 70만 년 전 구석기 유물을 찾아내 일본 열도를 떠들썩하게 만들어 얻은 별명이지. 일본의 대표 극우단체인 ‘새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 만든 〈국민의 역사〉라는 책에서 후지무라의 발견을 근거로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문명보다 연대가 앞선 문명이 일본에 존재했다”라고 어이없는 소리를 해댈 정도였어. 그런데 이 ‘신의 손’ 후지무라 신이치의 발견이 몽땅 조작이었음이 익명의 제보로 밝혀지면서 일본 고고학계는 초상집이 되고 말아. 유물을 몰래 파묻어놓고 자기가 파헤쳐 “유레카!”를 부르짖는 〈개그 콘서트〉 같은 사기에 온 일본이 속아 넘어갔으니 얼마나 창피했겠어.

그런데 이런 모습을 마냥 비웃을 수만은 없는 게, 한국에서도 종종 이런 모습이 나온다는 거야. 2013년 8·15 경축사에서 박근혜 대통령은 이런 말을 했어. “고려 말의 대학자 이암 선생은 ‘나라는 인간에 있어 몸과 같고, 역사는 혼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지당한 말씀이긴 한데 문제는 이 말이 이암이 지었다는 〈단군세기〉를 인용했다는 사실이었어. 이 〈단군세기〉 기록은 〈환단고기〉라는 책에 담겨 있는데 이 〈환단고기〉라는 책은 위서(僞書), 즉 후세에 조작됐다는 논란에 휩싸여 있거든.

이 〈환단고기〉 내용을 뼈대로 해서 어떤 사람들은 우리 민족이 아득한 옛날 동북아시아의 태반을 지배한 대제국을 건설했고 수메르 문명 같은 고대 문명의 시원이라고까지 주장해. 곧 우리 민족이 세계 문명의 시작이라는 식이지. 왠지 후지무라 신이치의 냄새가 나지 않니? 70만 년 전 구석기 유적을 근거로 세계 4대 문명의 발상지 일본을 주장한 일본인과 8000년 전 ‘동이족’의 대제국을 얘기하는 한국인은 형제 이상으로 닮아 있지 않을까?

닮은 건 그뿐만이 아니야.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졌을 때 일이다. 인류역사상 전무후무한 대재앙 속에서 수십만명이 죽고 부상했어. 시신이 나뒹굴고 살이 타들어가는 고통으로 사람들이 울부짖는 와중에 경관 몇 명이 자신들도 부상당한 몸으로 뭔가를 떠메고 시내를 달렸어. 그들은 이렇게 외쳤지. “어진(御眞)이다. 어진이다.” 어진이란 건 왕의 초상화, 즉 일본 덴노 히로히토의 초상이었어. 그러자 믿기 어려운 일이 일어났어. 일어서 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머리를 숙여 경의를 표했고 부상당해 움직이기 힘든 이들도 몸을 굴려 길을 터줬던 거야. 원자폭탄을 뒤집어쓴 사람들이, 살이 녹고 뼈가 부러지는 고통 속에서도 말이야.

우리는 왜 이렇게 닮아 있는 걸까

역시 일본 사람들은 이상해! 하고 혀를 차겠지만 유감스럽게도 똑같은 상황이 단군의 자손 사이에서도 발생한 바 있어. 2004년 4월22일 평안북도 용천역에서 대규모 폭발 사고가 있었단다. 54명이 죽었고 1000명이 넘게 부상당한 대참사였어. 그런데 북한 중앙통신은 감격에 겨운 어조로 이런 보도를 한다. “조선 인민의 수령결사옹위정신은 말로써가 아니라 실천 행동에서 더욱 뚜렷이 발휘되고 있다.”

 

ⓒ마이니치 신문 제공후지무라 신이치가 2000년 10월 가미타카모리 유적 주변에 미리 준비한 석기를 파묻고 있다.
무슨 소리인가 하면 원폭 후의 히로시마처럼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에서도 주민들은 가정이나 학교, 직장에 걸려 있던 김일성 부자의 초상화를 먼저 건지려고 했다는 말이야. 용천소학교(인민학교) 교사인 한은숙씨는 학교 건물이 붕괴되면서 교실에 불이 나자 3층 교실에 있던 김일성 부자 초상화를 안전한 곳으로 옮긴 후 제자 7명을 구해내고 자신은 숨졌다고 해. 제자들을 구하고 자신의 목숨을 버린 건 숭고한 일이야. 하지만 제자보다 먼저 초상화를 옮긴 건 대관절 어떤 정신세계일까? 히로시마의 일본인과는 어디가 어떻게 다를까?

어디까지나 북한 얘기 아니냐고 애써 외면해보지만 며칠 전 아빠는 전철이나 거리에서 흔히 마주치는 한국 사람들 가운데 일본적인(?) 모습을 발견하고 멘붕에 빠지고 말았단다. 바로 일부 ‘월남(베트남) 참전용사’들의 시위 때문이었어. 그들은 베트남에서 있었던 한국군 민간인 학살을 증언하러 온 베트남 사람들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며 베트남 사람들의 증언 자체를 막으려 들었고 실력 행사를 하겠다는 둥 협박도 서슴지 않았다. ‘자유 수호’를 위해서건 ‘조국 근대화의 초석’을 위해서건 그들 가운데 스스로 베트남에 가신 분은 거의 없을 거야. 나라에서 가라고 하니 갔고 누구인지 모를 적과 싸웠고 죽고 죽였지. 그분들 역시 전쟁의 희생자로서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해.

하지만 뻔히 눈에 보이는 사실을 부인하고 자신의 신념을 위해 진실을 외면하는 것은 너무나 ‘일본적’이야. 일부 한국군이 베트남에서 행한 민간인 학살은 이미 객관적인 증거와 증언으로 입증돼 있는데 죽어간 사람들이 민간인이 아니라 베트콩이었다고 우기는 건, 일제강점기 시절 주민들을 교회로 몰아넣고 불 질러 죽여놓고도 “명령을 오해했을 뿐이므로 무죄”라고 우겼던 일본군을 빼닮았지 않니. 전 세계가 월남은 ‘패망’한 게 아니라 통일된 것이라고 하는데, 한국과 외교관계를 맺은 베트남이 엄존하는데도 자신들은 월남 ‘패망’을 막기 위한 자유의 십자군이었다고 우기는 건 또 뭘까. 자신들이 한국을 침략한 게 아니라 ‘진출’했을 뿐이며 일본 식민 통치가 한국에 도움을 주었다고 뻗대는 일부 일본인의 행동과 복제한 듯이 똑같지 않니. 한국과 일본은 조상이 같고 뿌리가 같다고 침을 튀기던 일본 학자들의 뺨을 후려치려던 손에 힘이 빠진다. 왜 이렇게 닮아 있는 걸까.

기자명 김형민(SBS Biz PD)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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