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26일 전남 영암군의 달뜬꾸러미 공동체 13가구가 작업장에 옹기종기 모였다. 각자 농사지어 수확한 풋마늘·고구마·돼지감자 등을 선별하고 포장하기 위해서다. 회원 200명에게 보낼, 당일 수확한 물품 8가지를 한 상자씩 나눠 담았다. 시래기된장국에 들어갈 무청된장과 표고버섯 육수가 담겼다. 유정란·요구르트·두부·돼지감자 말랭이·밤호박즙과 고구마 중에서 소비자의 취향에 따라 4가지 품목을 추가로 넣었다.

배송한 지 하루 만인 3월27일, 광주광역시에 사는 박고형준씨(31)는 달뜬꾸러미를 받았다. 가입비 따로 없이, 한 달에 한 번 이용하는 데 3만원을 낸다. 표고버섯 육수처럼 바로 먹어야 할 음식이 있는가 하면 밤호박즙처럼 오래 두고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섞여 있어 남길 염려가 없다. 마트에 가서도 꾸러미 물품과 함께 요리할 재료만 구입하면 되기 때문에 절약 효과도 크다. 개별 포장된 물품에는 생산자의 이름이 적혀 있다. 생후 3개월 된 딸을 둔 박고씨는 아이의 안전한 먹을거리를 위해 달뜬꾸러미를 계속 이용할 생각이다.
 

ⓒ시사IN 윤무영꾸러미에는 소규모 농가에서 키운 다양한 농산물이 담긴다. 꾸러미 농산물을 이용하면 계절마다 제철 식품을 알고 먹을 수 있다.

농산물 꾸러미는 소규모 농가에서 재배한 모둠 채소(과일·우유 등 포함)를 가정에 택배로 배송하는 농산물 직거래 방식 중 하나다. 중간상인의 개입이 없어서 생산자에게 돌아가는 이윤의 폭이 크고, 소비자 역시 저렴한 가격에 자연 그대로의 맛을 즐길 수 있다. 1인 꾸러미의 한 차례 이용 요금은 평균 2만∼2만5000원 선. 농작물 수확량은 ‘하늘의 뜻’에 따라 매년 달라질 수밖에 없지만, 판로가 안정적인 만큼 가격 변동도 거의 없다.

소비자들 사이에서는 계절마다 제철 식품을 알고 먹을 수 있는 게 큰 기쁨이라는 얘기가 나온다. ‘언니네 텃밭’ 꾸러미를 이용하는 김민지씨(31)는 “슈퍼를 이용하면 양파, 감자, 콩나물만 샀을 텐데 꾸러미 물품에 봄동이나 연근, 강낭콩이 포함돼 있어 계절을 느낄 수 있다. 새로운 재료로 음식 만들기에 도전하다 보면 성취감이 든다”라고 말했다. 지난해에는 꾸러미에 콩물이 들어 있기에 레시피를 찾아가며 두부를 만들어 먹기도 했다.

공동체 형태로 꾸러미 사업에 참여하는 이들은 주로 중소 규모의 농가다. 공동체 내에서 가구마다 재배 작물을 서너 종씩 배분한 다음 소량으로 생산한다. 그러나 소량으로 생산된 농작물을 유통시키기는 의외로 힘들다. 단일 작물을 대량 재배해서 대형 유통업체에 넘기는 것이 일반적 방식이기 때문이다. 즉, 소량으로 생산한 다양한 작물들에 제대로 된 값을 치르고 가져가는 유통업체는 찾기 힘들다. 달뜬꾸러미 공동체에서 농사를 짓는 이경훈씨는 “지인에게 나눠주거나 자가 소비를 하기도 어중간하다. 그래서 꾸러미를 이용해 소량 생산한 다양한 품목들을 소화할 수 있는 판로를 개척했다”라고 말했다.

어느 지역의 누가 재배했는지 알 수 있어

기본적으로 꾸러미에는 유기농, 저농약, 무농약 등 친환경으로 재배한 채소를 담는다. 복잡한 절차상의 이유로 유기농 인증을 받지 못한 곳도 있지만, 소비자에게는 인증만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유기농 인증 서류보다 농부와의 ‘인연’에 바탕을 둔 신뢰의 무게가 더 크다. 꾸러미에는 어느 지역의 누가, 무엇을 재배했는지 농부의 얼굴 사진과 연락처까지 기재되어 있다. 소비자가 생산자의 마을을 방문할 수 있는 시스템도 마련돼 있다. 농산물 꾸러미가 ‘얼굴 있는 먹을거리’라고 불리는 이유다.

생산자는 꾸러미에 소소한 농가 이야기, 무엇을 해먹으면 좋은지 등을 담은 편지를 동봉한다. 충남 홍성의 재승이네 꾸러미는 회원 10여 명에게 밭 소식을 꾸준히 알리고 있다. “고추는 2년째 자가 채종한 자연 재배 고추씨를 뿌렸어요. 씨 뿌린 지 10여 일이 지나 싹이 올라오더니 어느새 본잎이 나기 시작합니다. (…) 튼튼하고 건강한 모종을 키우는 일이 농사의 반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침저녁으로 아이 돌보듯 들여다보며 애정을 듬뿍 줘야 하지요.(3월 첫 번째 꾸러미 편지)”

농산물 꾸러미의 생산자 형태도 다양하다. 귀농민이 공동체를 일구어 생산과 수확, 공급을 도맡아 하는 곳이 있는가 하면, 생산자와 소비자가 공동으로 재배 품목과 배송 방법까지 의논하고 결정하면서 수확물을 나누는 경기도 이천시 콩세알나눔마을 같은 곳도 있다. 지자체가 나서기도 한다. 전북 완주군이 운영하는 건강한 꾸러미가 대표적이다. 농협도 참여하는데, 충북 오창농협은 2만여 소비자를 확보할 정도로 규모가 크다. 오창농협의 꾸러미 사업은 대기업과의 긴밀한 협력관계를 발전의 디딤돌로 삼고 있다. SK그룹은 직원 복지를 위해 꾸러미 제공을 협약했고, SK건설이나 SK텔레콤 등 주요 계열사 임직원 2만1000명은 월 10만원 내외의 꾸러미 회비 중 50%를 회사에서 지원받는다. 또 제주도 서귀포시 무릉2리는 벤타 에어워셔 공식 수입사인 벤타코리아와 자매결연을 해 영농법인 무릉외갓집을 만들었다.
 

ⓒ시사IN 조남진소비자가 수확 체험을 하는 전북 완주군의 한 농가. 이처럼 소비자가 생산지를 방문하는 시스템을 운용하는 꾸러미 농가가 많다.

꾸러미 사업의 핵심은 결국 회원들의 신뢰다. 이에 부응하려면 전문 유통업체에 버금가는 품질 관리와 이에 걸맞은 시스템을 개발해야 한다. 하지만 생산자가 포장과 공급까지 도맡아 하는 농가의 경우, 회원이 느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생산 품목이 한정돼 있는 데다 채소를 수확하고 선별하고 포장·배송하기까지 손이 많이 간다. 달뜬꾸러미 김기천 운영위원장은 “일부 소비자는 농가의 회원이 늘어나면 꾸러미의 품질이 저하될까 봐 걱정하기도 한다”라고 말했다.

현재 달뜬꾸러미에 참여하는 한 농부가 한 작물을 수확했을 때 얻는 수익은 한 달에 40만∼50만원이다. 농산물 꾸러미만으로는 안정적인 소득을 확보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이런 농가는 명절이나 한가위 등 때에 맞춘 꾸러미를 추가로 만들어 판매하거나 농산물 직거래 매장으로 판로를 개척하기도 한다.

이런 가운데 롯데마트와 홈플러스, 하나로마트에서도 농산물 꾸러미 사업을 선보이고 있다. 마트 한쪽에 직거래 코너를 마련하는 식인데, 아직은 구색 맞추기에 불과하다. 이들은 직거래 농부에게 유통 마진 명목으로 20%가량을 요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달뜬꾸러미 김기천 운영위원장은 “꾸러미는 유통비용을 절감하는 동시에 생산자와 소비자 간 상호 신뢰를 구축하는 연대 체계를 만들자는 취지에서 탄생했다. 양적 확대에 연연해하기보다 지금은 농산물의 가치와 철학을 더욱 연구해야 할 때다”라고 말했다.

기자명 송지혜 기자 다른기사 보기 song@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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