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보다 몇 년 늦더라도 승진을 기대할 수 있고 비슷한 임금을 꿈꿀 수 있다면 그나마 낫다고 해야 할까. 우리투자증권 업무지원직으로 근무하는 이연희씨(35·가명)는 승진은커녕 경력 이동도 기대할 수 없는 무기근로계약직이다.

무기근로계약직이란 비정규직법이 시행되면서 ‘계약직의 정규직화’의 일환으로 도입된 고용 형태다. 무기근로계약직은 정년이 보장되고 복지 혜택이 정규직과 동일하다. 그러나 임금과 승진 체계가 정규직과 다르다. 이씨가 받는 임금은 정규직의 3분의 2 수준이다. 정규직과 하는 일은 똑같다. 이씨는 “착취당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무기근로계약직은 계약 연장이 없는 무늬만 정규직이다. 정년 보장이 된다지만 경력 이동이나 승진 없이 정년까지 일하는 것은 희망이 없다”라고 말했다.

2007년 7월1일 비정규직법이 시행되면서 이씨처럼 승진은커녕 경력 이동도 안 되고, 임금 출발선부터 달라 평생 ‘88만원 세대’로 살아야 하는 이들이 크게 늘었다. 직접 고용 정규직화를 추진하라고 했더니, 기업이 무기근로계약직·분리직군제·하위직급 신설 등 차별을 고착화하는 유사 정규직 고용 형태를 고안해냈기 때문이다. 우리은행이 분리직군제를 도입하면서 금융권에 확산되었고, 제조업체의 사무직과 유통업계, 그리고 서비스업 전반으로 광범위하게 퍼졌다. 우리투자증권 노동조합 강은영 부위원장은 “전에는 해마다 계약직의 일부가 정규직으로 전환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기회마저 원천적으로 차단되었다. 이런 고용 형태로 내몰린 대상은 주로 여성이다”라고 말했다. 금융권은 남녀고용평등법 도입 이후 법망을 피하기 위해 남녀 단일호봉제를 실시했지만, 실제로는 여성을 비정규직으로 채용하고, 승진을 차별하는 형태로 ‘유리 천장’을 만들어왔다. 강 부위원장은 “비정규직법 시행 이후에는 그 유리 천장 너머에 차별과 저임금 형태를 고착화하는 ‘유리 절벽’까지 생긴 셈이다”라고 말했다.

금융권에서 일하는 여성 절반 이상은 이런 유사정규직 형태로 고용되어 ‘88만원 세대’의 굴레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처지가 됐다. 이화여대 이주희 교수(사회학)는 “금융권 유사정규직 대부분이 여성 노동자로 성차별이 구조화되는 경향이 있다. 가뜩이나 한국의 남녀 간 임금격차는 선진국 중 최하위 수준인데, 앞으로 더 벌어질 가능성이 높다”라고 걱정했다. 여성 노동계에서는 여성 임금이 상대적으로 낮으면 육아나 가사 비용으로 지불해야 하는 돈을 감당하지 못해 여성들로 하여금 결국 일 대신 가정을 선택하게끔 만들 것이라고 전망한다.

기자명 안은주 기자 다른기사 보기 anjo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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