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과 카메라의 ‘세월호 연대기’
  • 전혜원 기자
  • 호수 395
  • 승인 2015.04.14 0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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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사의 현장에 그들의 펜과 카메라가 있었다. ‘할 수 있는 일을 하자’는 마음이었다. 세대도, 직업도, 기록 방식도 다른 6명의 이야기는 결국 하나의 질문 앞에서 만났다. 우리는 세월호를 왜 잊지 말아야 하는가.
그날이 1년을 바꿨다. 어떤 이들에게는 그랬다. 2014년 4월16일 이전까지 각자의 위치에서 살아가던 이들은 그날 다른 이들처럼 우왕좌왕했다. 불어나는 실종자 수를 보며 마음 아파했다. 그리고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하기 시작했다. 연필, 카메라 등 저마다의 ‘무기’를 들었다. 대단한 사명감보다도 ‘할 수 있는 일을 하자’는 마음이었다.

〈시사IN〉은 지난 1년 동안 각자의 방식으로 세월호를 기록해온 사람들을 만났다. 세대도, 직업도, 기록 방식도 다른 이들 6명의 이야기는 결국 하나로 모였다. 우리는 세월호를 왜 잊지 말아야 하는가.

그 아이가 먹던 밥을 먹었다

김순천씨(51)는 ‘4·16 세월호 참사 시민기록위원회 작가기록단’ 단장으로, 유가족의 구술을 모은 책 〈금요일엔 돌아오렴〉의 기록자 12명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녀는 9년째 경기도 안산 선부동에서 산다. 이 동네에서만 단원고 학생 70명이 희생됐고, 그녀가 사는 아파트로 좁혀도 15명이다. 김씨는 사고 첫날 진도 팽목항으로 가는 버스를 향해 가슴을 움켜쥐고 뛰는 단원고 학부모들을 목격했다. 그날 온 동네에 침묵이 내리는 걸 온몸으로 느꼈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시사IN 신선영〈/font〉〈/div〉르포 작가 김순천씨는 ‘4·16 세월호 참사 시민기록위원회 작가기록단’ 단장으로 참사를 기록했다.
김씨는 르포 작가다. 두산중공업 배달호씨 평전을 쓰고 삼성전자 노동자를 인터뷰했다. 사회에서 고통받는 개인의 이야기를 글로 전해온 사람이다. 그런데도 세월호 참사는 달랐다. 현장에 갔지만 글을 쓸 수가 없었다. 아이들 250명이 포함된 수백명의 영혼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도망치기도 했다. 자신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 끊임없이 고민했다. ‘유가족 곁에 있는 게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하나둘 유가족을 만났다.

책에 실린 13명 중 김씨가 기록한 유가족은 2명이지만, 김씨는 30명이 넘는 유가족을 인터뷰했다. 인터뷰 한 번에 하루 이틀은 몸져누웠다. 녹취를 풀 때도 10분마다 쉬곤 했다. “다른 작업은 조금 거리를 두는 게 가능했는데 이건 거리두기가 불가능했어요. 그래서 같이 아픈 상태에서 기록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기록자의 기본이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일을 한 거죠.”

책은 부모들이 겪은 아픔을 생생히 전달한다. 아이의 이름이 생존자 명단에 있다가 실종자 명단으로 가기를 세 번 반복하는 걸 지켜봐야 했던 경험, 유실 방지 조치를 요청한 이틀 후 아이가 첫 번째 유실된 시신으로 올라온 일, 아이 얼굴이 없느냐고 물어보니 “5분의 1 정도는 확인할 수 있습니다. 보시겠어요?”라고 말하던 과학수사대….

“4월16일 오전 9시4분에 전화가 한 통 왔어요. 나중에 확인해보니 같은 반 친구 전화기였어요. 친구 전화를 복구했는데 거기에 있는 몇 초짜리 짧은 동영상 맨 마지막 장면에 지성이가 친구에게 ‘야, 핸드폰 좀 빌려줘. 아빠에게 전화하게’(울음) 지성이 핸드폰이 2G였거든요. 지성이 언니가 그래요. 아빠, 지성이 밖에 나가면 핸드폰을 가방에 넣어버려. 2G 폰이라 부끄러웠던 거예요. 나는 그런지 전혀 몰랐어요(울음).”(책 163쪽, 2학년 1반 문지성 학생의 아버지 문종택씨 이야기 중에서)

“4월16일 오전 9시50분에 일하다가 소연이와 통화했어유. 아빠, 뭐 해요? 일하지 뭐 허냐. 아빠, 나 데려가주면 안 돼요? 어딘데 아빠가 가냐. 여기 어딘지 모르겠는데 배에 물이 들어와요. 소연아, 니 옆에 누구 있는데? 담임 선생님 있어요. 선생님이 뭐라구 허셔? 구명조끼 입으라 했어요. 그럼, 선생님 말씀에 잘 따라. 우리나라가 후진국이 아니니까 구명조끼 입고 바다에 떠 있으면 구해줄 거라 생각했시유. 왜 선생님은 배가 뒤집어질 판인데 뛰쳐나가란 말을 안 혔을까요. 내가 내 자식을 죽였어유. 그 생각을 하면 마음이 괴롭고 눈물이 나유. 아빠가 판단을 잘못해갖고 애를 죽인 것 같아(울음).”(책 105쪽, 2학년 3반 김소연 학생의 아버지 김진철씨 이야기 중에서)

부모들 삶의 유일한 원동력은 아이 얘기였다. 우리 애가 어땠어, 하고 얘기하면 에너지가 조금 생기는 듯했다. 김씨가 한 일은 그 얘기를 옆에서 조용히 듣는 것이었다. 딸과 자주 가던 식당에 김씨를 데려가 딸이 먹던 대로 밥을 두 그릇 대접한 아버지도 있었다.

엄마 아빠들의 ‘숨도 잘 쉬어지지 않는 울음’을 그대로 담은 〈금요일엔 돌아오렴〉은 책장을 넘기기 어려울 만큼 절절하다. 하지만 김씨는 이 기록이 단순히 슬프기만 한 글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와 동시에 유가족이 팽목항에서, 안산에서, 서울 한복판에서 직접 겪은 사회의 밑바닥이 증언을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책에는 ‘한국 사회의 끝’을 본 부모들이 타인의 고통에 무관심했던 과거를 성찰하고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지 고민하는 과정 또한 생생히 담겨 있다. “사회활동가, 안전교육 전문가가 되겠다는 분도 있고 잠수사 자격증을 따서 아이들을 구해주겠다는 분도 있어요. 아픔을 겪은 그분들이 고민하는 지점에 우리도 같이 서서 무엇을 할 것인지 고민할 시기가 아닌가 싶어요.”

30권 넘게 쌓인 수첩에 담긴 ‘사실’

세월호 사고 초기부터 각종 의혹 제기가 끊이지 않았다. 정부의 불투명함과 무책임이 더해지면서 의혹은 증폭됐다. 고의로 침몰시켰다, 국정원이 실소유주다, 잠수함과 충돌했다, 지그재그로 운항했다, 핵물질을 수송 중이었다…. “하나도 밝혀진 게 없다”라는 주장은 그래서 나왔다. 그러자 동전의 양면처럼 “이미 다 밝혀진 것 아니냐”는 주장도 힘을 얻었다. 무엇이 밝혀졌고 무엇을 더 밝혀야 하는지부터 합의되지 않는 상황이 되었다.

인문사회 분야 책을 쓰는 작가이자 번역가인 오준호씨(40)는 세월호 재판에 주목했다. 그는 진실이 어딘가에 따로 숨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논쟁하고 입증하고 반박하는 과정에서 실마리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보았다. 재판은 진실의 실마리를 찾아낼 소중한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는 2014년 6월부터 다섯 달에 걸쳐 진행된 세월호 1심 재판을 방청하고 기록해 책 〈세월호를 기록하다〉를 썼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시사IN 신선영〈/font〉〈/div〉세월호 법정 기록 〈세월호를 기록하다〉를 펴낸 오준호 작가(양복 입은 이)가 3월19일 전명선 가족대책위원장에게 책을 전달하고 있다.
그는 선원 재판에 33회 갔다. 절반은 새벽 5시 유가족들과 버스를 타고 광주에 가서 봤고, 절반은 안산의 생중계 법정에서 방청했다. 노트북이 허용되지 않아 손으로 수첩에 내용을 적어 내려갔다. 수첩이 30권 가까이 쌓였다. 판결문 외에도 증거 기록 2만 쪽, 공판 기록 1만 쪽을 읽었다. 80명이 넘는 이들의 증언을 들었다. 연말에 시작된 해경 재판에도 갔다. 이를 바탕으로 사건을 재구성해 나갔다.

단순한 설명이 가능할 때는 복잡한 가정을 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웠다. 선원과 해경 개개인의 행동을 표로 만들어 10분 단위로 교차 비교했다. 도서관에서 책을 보며 선체공학을 공부했다. 증거와 증언을 토대로 받아들일 만한 사실을 재구성했다. 그래도 해소되지 않는 의문은 물음표로 남겨뒀다. 330쪽 분량의 책은 침몰·구조·출항·선원으로 나뉜다. 처음부터 끝까지 건조한 문체로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검찰 공소장, 판결문, 공판 조서를 바탕으로 짚어간다.

이런 식이다. 참사 이후 일부 언론과 인터넷에서는 세월호의 AIS(항적 위치정보 발송장치) 신호에 나타나는 선수 방위가 변화하는 것을 근거로 “배를 일부러 지그재그로 틀어 쓰러뜨린 증거”라는 의혹이 나왔다. 오씨는 의혹을 회피하지도 추종하지도 않는다. 취재와 재판 기록을 통해 자신이 생각하는 최선의 결론으로 다가간다. “사고 당시 세월호의 속력인 17노트로 29초간 운항했다고 하면 그 거리는 약 260m이고, 이는 세월호 전체 길이인 146m의 두 배가 채 안 되는 거리다. 29초 후부터는 선수 방위가 급히 돌아갔으므로, 그사이에 대각도 조타가 있었다고 재판부는 추정한다. 세월호의 길이나 운항 거리, 선체 운동의 특징을 고려할 때 그사이에 좌우로 지그재그 운항을 했다고 보기는 힘들다.”(책 60~61쪽)

그가 보기에 참사의 배후에 있는 것은 거대한 악의 치밀한 기획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선원·해경 등 개인의 비겁하고 이기적이고 무책임하고 무능한 행동들이 겹친 결과였다. 이른바 ‘신자유주의적 규제 완화’라는, “어느 문제에 갖다 붙여도 될 것 같은 말”로 설명될 일도 아니었다. 단지 규제가 없어서 일어난 게 아니라, 있는 규제조차 무력화되어 일어난 일이었다.

그래서 오씨는 확인된 사실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재판에서 밝혀진 것들이 미약하고 불완전하더라도 그 역시 진실 규명의 중요한 단계였음을 인정하고 다음 단계를 찾아야 한다고 믿는다. “수현군 아버님이 객관적으로 잘 정리했다며 이 책을 꼭 조사위원들에게 줘야겠다고 말씀하셨을 때 정말 감사했다. 앞으로의 진상 조사 과정에서 여론에 따라 의혹을 쫓기보다는 효율적으로 진상을 규명하고 재발 방지 대책까지 마련할 수 있다면 가장 큰 보람일 것 같다.”

‘주인 잃은 방’에서 누른 셔터

2014년 4월15일. 우리 딸 수학여행. 2014년 4월16일. 우리 딸 수학여행. 2014년 4월17일. 우리 딸 수학여행….

금요일에 돌아온다던 아이는 끝내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탁상달력은 부모의 글씨로 빼곡했다. 수학여행이라는 글자가 날마다 적혀 있었다. ‘우리 딸 수학여행 중’ ‘우리 딸 하늘나라로 수학여행 중’ ‘아, 보고 싶다’…. 부모는 그렇게 다섯 달 가까이를 매일 적었다. 아이가 수학여행 중이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상기하고 기록했다. 기적이 일어나길 바라면서.

사진을 전공하는 대학생 김민호씨(21)는 달력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김씨는 ‘4·16 세월호 참사 기억 프로젝트-아이들의 방’에 참여한 사진가 16명 중 한 사람이다. 지난해 12월부터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학생 20명의 빈 방과 유품을 사진으로 기록하는 일에 참여했다. “희생자가 304명이니 이야기 304개가 사라졌다고들 말해요. 그런데 부모가, 형제자매가, 친구가 기억하는 희생자의 모습은 서로 달라요. 주인 잃은 방은 304개이지만 그 안에는 304개가 아니라 수천, 수만 가지 이야기가 있어요. 어떻게 해야 그 아이들의 흔적을 온전히 남길 수 있을까…. 방 안에서는 유난히 셔터 소리가 크게 들리는 것 같아요.”

스스로를 ‘평범한 사진 전공 대학생’이라고 표현하는 김씨는 세월호 참사 당일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다른 이들처럼 뉴스를 보며 안타까워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안타까움은 더 커졌다. ‘이건 진짜 아닌데….’ 한 달 가까이 지나 추모 집회에 카메라를 들고 나갔다. 그때부터 세월호 집회 현장을 찍어 SNS에 올리기 시작했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시사IN 신선영〈/font〉〈/div〉대학에서 사진을 전공하는 김민호씨는 ‘아이들의 방’ 전시에 참여한 사진가 12명 중 한 명이다.
유가족이 처음 국회에서 농성을 시작한 날이었다. 한 어머니에게 “아이 학생증을 걸고 계시네요”라고 말을 건넸다. “학생증을 걸 수 있는 희영이(가명)가 없잖아”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 학생증을 찍은 사진이 인터넷에 올랐다. 생존 학생들이 “희영이 예쁘다”라고 댓글을 달았다. 한 번도 만나지 않은 채 이런 일로 사진을 찍은 게 미안했다고 김씨는 말했다. 김씨는 지난 1년 동안 국회와 청운동, 광화문과 안산을 오가며 유가족을 찍었다. 부모들이 갖고 있는 아이들 사진을 파일로 받아 출력해주기도 했다. 그러면 엄마 아빠들은 기뻐하면서도 눈물을 흘렸다. 김씨는 묵묵히 사진을 뽑았다.

그는 자신의 위로가 어쩌면 또 다른 상처를 주는지도 모른다고 느낀다. 그럼에도 카메라를 놓지 않는 이유는 질문하고 싶어서다. “제 사진으로 스스로에게 묻고 싶어요. 네가 현장에서 사진을 찍는다고 해서 세월호를 완전히 기억한다고 할 수 있느냐고. 그리고 사람들에게도 묻고 싶어요. 우리는 벌써 잊은 게 아닌가라고요.”

김씨는 4월21일 입대한다. 그때까지는 물론이고 돌아와서도 세월호를 기록하는 작업을 계속하고 싶다. “10년, 20년이 지나도 계속하고 싶어요. 누군가는 기억하고 있다고. 2014년에 그 아이들이 탔던 배가 있었고, 그 가족들이 많이 아팠다고 말하고 싶어요.”

800시간의 영상에 담긴 국가의 민낯

재난 전문 PD. 독립 PD 이승구씨(43)에게 따라붙는 수식어다. 2003년 대구지하철 참사 생존자를 1년간 취재한 것을 시작으로 중국 쓰촨성 대지진,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 등 국내외 재난 현장을 10년 넘게 다녔다. 그런 그에게도 세월호 참사는 “너무 큰 것”이었다. 너무 많은 사람을 구조하지 못한 장면이 전국에 생중계됐다. 이 일에 뛰어든다면 진행되던 다른 기획을 접어야 하는 상황이기도 했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시사IN 이명익〈/font〉〈/div〉이승구 독립 PD는 진도에서 실종자 가족과 함께 머물면서 참사를 기록했다.
사고 다음 날 새벽 5시.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조카가 세월호에 탔는데, 수색과 구조가 전혀 안 되고 있는데도 언론이 거짓말을 한다고 했다. 너는 독립 PD니 다르지 않냐고 친구는 물어왔다. 해야겠다 싶었다. 같은 뜻을 가진 독립 PD 6명이 모였다. 모아놓은 제작비도, 지원해줄 방송사도 없었다. 박봉남 PD가 다른 다큐멘터리 작업에 쓰려고 모은 돈 1800만원을 깼다. 인건비는 두 달 만에 동이 났다. PD들은 현장을 기록하며 틈틈이 아르바이트로 생계비를 벌었다.

관계 형성 없이 하는 기록에는 한계가 있었다. 6월1일 이씨는 진도 실내체육관 한가운데에 이부자리를 폈다. 눈에 띄게 휑해진 체육관이었다. “PD님이 거기 자릴 잡으니 그래도 사람이 좀 있어 보인다”라는 실종자 가족의 말에 끝까지 자리를 바꾸지 못했다. 여름에서 겨울로 바뀌는 계절을 보았다. 선크림을 다섯 통 비웠다. 가족들과는 서로의 잠버릇을 훤히 알 만큼 가까워졌다. ‘월급도 안 받는 것 같은데 국정원 직원 아니냐’는 오해도 받았다.

11월에 수색이 종료된 뒤에도 1월까지 일곱 달을 진도에서, 팽목항에서 살았다. 유니나 선생님, 안중근 학생 등 실종자가 발견되고 떠나는 모습을 담았다. 시신을 찾은 가족과 그렇지 않은 가족이 서로 미안해하고 축하하는 아이러니를 찍었다. 진도군청과 대책본부가 하는 모든 브리핑도 기록했다. “마지막 한 명까지 찾겠다”라는 정부 관계자의 말이 고스란히 이씨의 카메라에 남아 있다.

이씨가 가족에게 다가간 방법은 먼저 자기 삶을 털어놓는 것이었다. 가끔씩 썰렁한 유머도 곁들였다. 그러자 가족들이 속에 있는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민트색만 보면 그 색깔을 좋아하던 딸 얘기를 했고, 반 공기도 안 되는 밥을 먹으며 “이거 우리 딸이 좋아하던 반찬인데…” 했다. 그러면 이씨도 목구멍에 밥이 얹히곤 했다.

스스로를 ‘관계형성형 다큐멘터리 감독’이라 칭하는 이씨는 상황에 개입하거나 ‘그림’을 만들기 위해 연출하지 않는다고 했다. 대신 자기가 예측해서 움직이고 기다린다. “결과물은 아마 기록영화가 될 텐데, 기록자가 직접 이야기를 하기보다는 당시에 정부가 이랬고, 유가족은 이렇게 대처했고, 실종자 가족은 이랬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답일 거라고 생각한다. 영상을 통해 ‘앞으로 당신은 어떤 사회에서 살 것인가’라고 묻고 싶다.” 지금까지 이씨가 기록한 세월호 영상의 총 길이는 800시간이 넘는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시사IN 신선영〈/font〉〈/div〉세월호 참사 백서 발간을 총괄한 이원목 변호사.
변호사들이 남긴 572쪽의 매뉴얼

대한변호사협회(변협)는 사고 직후 현장에 변호사를 파견했고 공익법률지원단을 모집했다. 변호사 514명이 자원했다. 변협은 ‘세월호 참사 피해자 지원 및 진상조사 특별위원회’(이하 특위)를 발족했다. 변협 소속 변호사들은 진도, 안산, 인천 등지에서 세월호 재판과 진상 규명, 언론 대응 등을 도왔다. 변협 60여 년 역사상 회원들이 조직을 구성해 대형 재난의 피해자를 위한 사회적 지원에 나선 것은 처음이다.

재난 현장은 책상에서 공부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었다. 전례가 없는 만큼 시행착오도 적지 않았다. 보고 시스템이 없어서 현장 변호사와 특위 활동 간에 유기적 연계가 이뤄지지 않은 측면이 있다. 재판 결과나 특별법 제정에서도 부족한 점이 있었다.

변협은 이런 과정과 고민을 기록으로 남기기로 했다. 특위는 지난 2월 〈4·16 세월호 참사 백서〉를 발간했다. 572쪽에 달하는 백서는 △진도와 안산에서의 현장 지원 활동 △입법 지원 활동 △진상조사 활동 △형사재판 지원 활동 △법률상담 활동 △언론 대응 활동 등 7개 활동 영역별로 특위가 어떻게 대응했으며, 그 과정에서의 어려움은 무엇이었는지를 자세히 기록했다. 향후에는 이렇게 대응해야겠다는 대안들도 담겨 있다. 백서제작팀에 참여해 원고를 부탁하고 수정 작업을 총괄한 이원목 변호사(59)는 “성과와 반성을 담을 것을 특별히 강조했다. 생생한 현장의 목소리가 담긴 이 백서가 귀중한 선례이자 참고 자료로 남기를 바란다”라고 말했다.

‘엄마의 이불’도 기록으로 남깁니다

권용찬씨(36)는 우연히 기록학 책을 읽은 이후 기록에 관심을 갖게 됐다. ‘기록이 없는 나라’라는 제목의 기획기사도 찾아 읽었다. 기록을 남기는 행위가 국가와 조직의 투명성과 책임을 증진시켜 건강한 민주주의에 기여한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 명지대 기록정보과학전문대학원에서 기록학 석·박사 과정을 밟았다.

박사 과정을 수료한 권씨는 세월호 참사를 지켜보며 충격을 받았다. 참사 자체보다도 이후 진행 과정에서 왜곡과 거짓말이 난무했다. 유가족에 대한 악의적 보도도 적지 않았다. “100년 뒤 역사가들이 세월호를 공공의 기록물로만 본다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제대로 알 수 없을 거라 생각했어요. 관이 아니라 시민이 직접 기록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믿었죠. 연구자로서 학자의 양심을 다하자고 결심했어요.”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시사IN 신선영〈/font〉〈/div〉권용찬 4·16 기억저장소 기록관리팀장이 유가족이 보내온 유품을 보여주며 수집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5월에 진도로 내려간 권씨는 자원봉사자의 경험을 구술로 받아 보관했다. 모든 것이 그에게는 기록이었다. 진도 철수가 이뤄질 때는 유가족이 진도체육관에서 덮고 자던 이불도 들고 왔다. 세월호 집회에서 사용된 피켓, 유가족이 만들어 입은 단체 티셔츠, 시민들이 곳곳에 단 노란 리본 등 모든 것을 안산 고잔동에 마련된 4·16 기억저장소에 모았다. 4·16 기억저장소 기록관리팀장인 그는 12월부터는 희생자의 빈 방과 유품을 사진으로 담거나 직접 보관하는 일을 하고 있다. 아이들이 수학여행을 떠나던 당시의 가방과 옷에서부터 부모가 품에 보관하던 배냇저고리까지 모든 것을 모으거나 찍는다.

서울에 살던 그는 얼마 전부터는 아예 안산으로 거주지를 옮겼다. 남은 시간을 세월호로 아파하는 이들의 기록을 남기는 데 쓰려고 한다. “대형 재난이 일어날 때마다 ‘어른들이 잘못해서 그렇지, 난 안 그럴 거야’ 이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새 내가 어른이 되어버렸다. 304명이 죽는 걸 생생히 봤는데 난 뭘 했나라는 자괴감이 뭐든지 하자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기록을 남겨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는 데 기여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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