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나 그림
몇 주일 전, 〈시사IN〉 편집국 기획회의에서다. 브레인스토밍 수준의 이야기가 오가던 중, 국장이 한마디 던졌다. “요즘 여풍(女風)이 센데, 심층적으로 들여다보면 재미있지 않을까? 이러다 세상이 온통 여자들 차지가 되는 거 아닌가?” 주요 고시의 여성 합격자 비율 증가, 사회 각층에서 여성 리더 비율이 증가하고 있으니 ‘여풍당당’의 실체를 들여다보자는 제안이었다. 그러나 국장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여기자들이 반론을 제기했다. “여풍이라고라? 아직 멀었습니다. 우리 사회 주요 권력과 요직은 여전히 남성들 차지고, 여성의 성공을 가로막는 장애 요인이 얼마나 많은데요. 위 아 스틸 헝그리(We are still hungry)입니다.” 이날 편집국 기자들은 ‘화성에서 온 남자’와 ‘금성에서 온 여자’로 나뉘어 한바탕 ‘설전’을 치렀다.

일부에서 ‘알파걸’이니 ‘여풍당당’이니 하며 호들갑을 떨 만큼 최근 몇 년 새 여성의 약진이 두드러져 보인 것은 사실이다. 지난 10년 동안 여성의 주요 고시 합격자 비율은 4~6배까지 늘었다(72~74쪽 딸린 기사 참조). 정치, 언론, 기업 및 학계를 막론하고 여성 리더의 비율도 증가하고 있다. 지난해 봄 〈여성 리더계층의 부상과 전망〉이라는 보고서를 낸 삼성경제연구소는 “리더가 되기 위해 거쳐야 할 ‘파이프라인’에 여성의 진입이 크게 늘고 있어 여성 리더 계층의 확대 속도가 더욱 빨라질 것이다”라고 전망했다. 2012년이면 여성 리더 비율이 서구 선진국 수준은 아니어도 동구권과 일부 중남미 국가를 추월하리라고 예상했다. 

최근 촛불 정국에서도 여성의 활약은 눈부셨다. ‘여성이 밝힌 촛불’이라는 표현대로, 촛불집회 점화부터 주요 고비마다 여성이 주도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5월2일 첫 촛불집회 때는 10대 여학생이 70%를 차지했고, 그 뒤를 이어 유모차 부대가 등장했다. 이어 82쿡닷컴, 마이클럽, 소울드레서처럼 여성 회원 중심의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활동하던 여성들이 촛불집회에 쏟아져 나와 힘을 불어넣었다. 이런 현상을 놓고 학자들은 일상의 삶에 가까이 서 있는 여성이 목소리를 낸 ‘생활 정치’의 등장으로 해석하기도 했다. 그러나 오히려 제도권 내에서 여성의 지위와 권력이 취약하기 때문에 촛불을 든 여성이 더 부각된 경향이 있다(75쪽 딸린 기사 참조).

한국 여성 평균소득은 남성의 46%

까놓고 이야기하자면, 한국은 아직 멀었다. 다른 나라들과 비교해 한국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여전히

 
꼴찌 수준이다. 유엔이 2년마다 발표하는 여성권한척도(Gender Empowerment Measure) 조사에서 한국은 전체 조사 대상 75개국 가운데 53위를 차지했다(2006년). 국회의원·행정관리직·전문기술직 여성 비율에서 OECD 평균치보다 떨어지는 것은 물론 평균 소득에서도 형편없다. 한국 남성 평균 소득 대비 한국 여성의 평균 소득은 46%로 OECD 27개국 평균치(59.3%)보다 한참 떨어진다. 일하는 여성 대다수가 고부가가치 직종이나 직위보다는 경력 개발과 승진이 제한된 특수한 직무·직군에 갇히거나 비정규직 일자리를 전전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71쪽 딸린 기사 참조).

이는 한국 여성의 학력이나 실력이 형편없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한국 여성의 실력은 세계적으로 비교해도 우수한 편이다. 인적자원의 수준을 나타내는 여성개발지수(Gender-Relate d Development Index)를 놓고 볼 때, 한국 여성은 136개국 중 25위로 ‘우수 국가’로 분류된다. 여성개발지수는 여성의 기대수명, 문자가독률, 취학률 등을 기준으로 평가한다. 한국 남성과 비교해도 처지지 않는다. 교원 임용고사에서 상위 성적을 여성들이 독차지해 남자 교사를 뽑기 위해 오히려 ‘역차별’하는 사례가 대표 증거다. 성적순으로만 뽑는다면 여성이 더 많이 채용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기업체 인사 담당자들의 한결같은 이야기다. 한 공기업 인사담당자는 “성적만 놓고 보면, 신입사원을 100% 여성으로 채용해야 할 정도다”라고 털어놓았다.

〈시사IN〉과 커리어케어가 국내 기업 여성 간부 104명을 조사한 결과에서도 남성보다 여성이 일을 더 잘하는 것으로 평가되었다. ‘남성과 여성 중 어느 쪽이 일을 더 잘한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대다수 응답자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고 답했지만, 여성이라고 응답한 이가 남성이라고 답한 사람보다 61%나 많았다.

한국 여성이 뒤처지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에서 여성 리더가 부상하는 분야는 제한돼 있다. 고시나 자격증 취득처럼 ‘성적순’으로 진입할 수 있는 직종이나 정치 분야처럼 여성할당제가 적용되는 곳뿐이다. 그 외 분야에서는 여전히 두꺼운 ‘유리 천장(여성에 대한 보이지 않는 차별)’이 여성의 부상을 가로막는다. 가장 대표적인 분야가 경제 분야다. 국내 대기업 임원 가운데 여성 비율은 2007년 현재 고작 4.4%이고, 코스닥 기업 가운데 여성이 CEO인 기업은 0.93%에 지나지 않는다. 5인 이상 사업체의 과장급 이상 여성 관리직 비율도 7.3%(남성은 92.7%) 수준이다.

‘가슴 달린 남자’라야 성공한다?

〈시사IN〉의 이번 조사에서도, 경제계에 구축된 유리 천장이 드러났다. 조사 대상 여성 간부 가운데 여성이라는 이유로 실적에 대한 평가나 급여에서 차별을 받은 이가 꽤 많았다. 10명 중 4명(41.3%)은 차별을 받았다고 응답했고, 8.7%는 모르겠다고 답했다(67쪽 표 참조). 여성에 대한 차별은 외국계

 
기업(37.5%)이나 대기업(37.5%)보다 중소·중견 기업(47.5%)이 더 심했다. 차별을 당하는 이들은 남성 동료에 비해 평균 3~5년가량 승진이 늦었고, 한 대기업 간부는 12년 이상 손해를 봤다고 답했다. 이들 대다수는 남성 간부와 마찬가지로 가정보다는 일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집중했는데도 여자라는 이유로 불이익을 당했다. 가정과 일의 집중도를 나눠보라는 질문에 응답자 2명 중 1명(49%)은 ‘가정 20% 대 직장 80%’라고 답했다. 직장보다 가정에 더 집중하는 여성은 10명 중 1명꼴(13.5%)이었다. 

여성의 사회적 성공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역시 남성 중심의 조직 문화와 육아·가사다. 직장 생활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문제가 무엇인지 두 개만 선택하라는 질문에 ‘남성 중심의 조직 문화’를 꼽은 여성이 가장 많았다(42명). 육아와 가사(37명), 업무 과다(33명)라고 답한 여성도 적지 않았다(67쪽 표 참조). 커리어케어 경영기획실 임현선 부장은 “이직을 희망하는 여성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한국 기업에는 아직도 남성 중심 조직 문화가 뿌리 깊이 박혀 있는 것을 느낀다”라고 말했다. 예컨대 여직원에게는 성과를 낼 수 있는 일을 주지 않는 남자 상사, ‘여자라서 그래?’ ‘여자가 무슨~’ 이런 말을 입에 달고 다니는 남자가 아직까지 있다는 것이다. ‘퇴근 후 정치’가 인사고과의 중요한 평가 기준으로 작용하는 조직 문화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고 한다. 임 부장은 “이런 조직에서는 여성들이 승진 기회를 잡기가 어려울 뿐 아니라 버티는 것조차 힘들 수 있다”라고 덧붙였다.

ⓒ시사IN 한향란여성 리더를 더 양성하려면 육아시설을 좀더 강화해야 한다. 위는 아모레퍼시픽 직장 보육시설.
남성 중심 조직 문화가 만들어놓은 유리 천장을 극복하기 위해 이들이 선택한 방법은 무엇일까. ‘가슴 달린 남자’가 되든지 여성으로서 장점을 최대한 살리는 두 가지 선택지 중에 골라잡은 이들이 가장 많았다. 여성 간부들은 남성 동료처럼 조직 생활을 하거나(34.9%) 남성 동료보다 더 남성적으로 조직 생활을 했다(4.7%). 나머지 절반은 여성으로서의 장점을 극대화하거나(34.9%) 학위나 자격증 등을 따는 우회 전술(11.6%)을 택했다(68쪽 표 참조).

여성이 일하는 데 부모나 친·인척의 도움은 가장 든든한 자산이다. 육아와 가사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는 질문에 ‘부모나 친·인척의 도움을 받았다’고 응답한 이가 40.3%였다. 육아와 가사에 대한 부부 분담 문화는 이들 가정에서도 정착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육아와 가사를 남편과 분담한다고 응답한 이는 겨우 1%였다. 전문 도우미나 보육시설을 이용하는 경우(17.3%)보다 현저히 적었다.

리더십과 정치력에서 취약한 여성

삼성경제연구소에 따르면, 능력과 의욕을 갖춘 여성 리더가 사회나 조직에서 성장하려면 세 가지 장애물을 뛰어넘어야 한다. 교육 장애물, 계속근무 장애물, 리더역량 장애물이 그것이다. 한국의 경우 여성의 고학력화로 첫 번째 장애물은 이미 극복된 상태다. 그러나 계속근무 장애물과 리더역량 장애물은 리더가 될 여성의 발목을 잡는 요인으로 여전히 작용한다.

인테리어 회사 디자인 실장으로 일하던 김지영씨(38)는 육아 때문에 올해 초 회사를 그만두었다. 김씨는 “직업 특성상 야근이 많은데, 초등학교에 다니는 두 아이의 뒷바라지를 제대로 할 수 없어 일을 그만두었다. 아이들이 어느 정도 큰 뒤에나 다시 시작해볼 생각이다”라고 말했다. 김씨처럼 고학력 여성이 일과 가정을 병행하지 못해 경제활동을 포기하는 사례는 꽤 많다. 육아와 가사에 대한 여성 부담이 줄지 않는 한 계속근무 장애물은 여성 리더의 부상을 가로막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여성 간부들은 육아시설과 공교육 시스템이 지금보다 강화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성이 사회적으로 성공하기 위해 꼭 필요한 제도적 장치가 무엇이냐’고 묻는 질문에 가장 많은 응답자가 육아시설(54명)과 공교육 강화(45명), 탄력근무제(35명) 등을 꼽았다(68쪽 표 참조).

여성이 리더로 부상하려면 리더역량 장애물도 극복해야 한다. 사회 네트워크를 쌓는 정치력을 보강하고 리더십을 계발할 수 있는 기회를 가져야 한다. 그러나 이번 조사 결과 여성 간부들은 아직까지 리더십과 네트워크 면에서 취약한 것으로 드러났다. 설문에 응한 여성 간부 대다수는 조직에서 승진하려면 전문성과 리더십은 물론 친화력과 줄서기를 포함한 네트워크 및 경영자 의지가 고루 중요하다고 인식하고 있다. 여러 요소가 적절히 필요하다. ‘당위성’과 달리 실제 본인들의 승진에는 네트워크 능력 같은 상대평가의 영역보다 ‘전문성’같은 절대평가의 영역이 더 많이 작용했다는 것이 이들의 평가다. ‘당신의 승진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전문성(66명)과 친화력(32명)이라고 답한 응답자가 일반적인 승진 요건에서 전문성(63명)과 친화력(25명)을 꼽은 응답자보다 많았다. 이 여성들이 승진하는 데 약점으로 작용한 것은 리더십과 줄서기를 포함한 네트워크 능력이었다. 간부로서의 일반적인 승진 요건으로 리더십(58명)과 네트워크(22명)를 꼽은 여성에 비하면 자기의 승진에 기여한 조건으로 리더십(40명)과 네트워크(14명)를 꼽은 여성은 훨씬 적었다(67쪽 표 참조).

외국계 반도체 기업 프리스케일의 재무팀 홍달원 부장(35)은 전문성을 먼저 키운 뒤 네트워크와 리더십을 갖춰 성공한 경우다. 첫 직장에서는 남자 상사가 전문적인 일은 주지 않고 허드렛일만 던져주곤 했다. 그녀는 그런 상사 밑에서는 전망이 없다고 판단해, 회계 분야를 집중 공부한 뒤 회계 전문 직원으로 일할 수 있는 직장으로 옮겼다. 그 직장에서 상사가 갑자기 그만두는 바람에 어린 나이에 재무팀을 도맡게 되었다. 그녀는 ‘위기보다는 기회다’ 싶은 마음에 새벽 두세 시까지 회사에 남아 일을 해냈다. 그 때 ‘올인’한 덕에 그녀는 리더로 올라서는 발판을 마련했다. 홍 부장은 “주어진 일만 기다렸다가는 승진 기회를 잡기가 어렵다. 어느 조직이나 정치싸움이 있기 마련이어서 내가 잘못하지 않았는데도 억울하게 당할 수 있다. 전문성은 기본이고, 조직 내 정치싸움에서 스스로 보호할 수 있도록 정치력도 키워야 한다. 아울러 작은 조직을 맡을 때부터 리더십을 키우는 노력을 해야 한다”라고 귀띔했다.

“자녀 세대에나 남녀평등 완성”

성공 경험이 있기 때문인지, 이번 조사 대상자의 상당수는 조직의 최고 리더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품었다. ‘당신 회사에서 임원으로 승진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사장이나 임원이 아닌 여성 10명 가운데 6명가량(63.2%)이 승진할 수 있다고 답했다. 현재 직위와 업무에 대한 만족도도 높은 편이었다. 응답자의 75%가 만족한다고 답했다. 불만족스럽다고 답한 응답자(25%)는 연봉 수준이 낮거나 승진 가능성이 적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밝혔다.

자기들의 현재와 미래에 대해서는 희망을 품고 있지만, 한국 사회 전체 여성의 미래에 대해서는 다소 부정적이었다. ‘한국 사회에서 여성이 주요 의사결정 주체의 절반이 될 수 있는 날이 언제 오겠느냐’는 질문에 10년 안에 가능하다고 답한 이는 10명 중 3명꼴(36.5%)이었다. 응답자 절반 이상(52.9%)은 자녀 세대 때나 가능하다고 응답했고, 10명 중 1명(9.6%)은 영원히 불가능하다고 전망했다(68쪽 표 참조). 자신은 어렵게 성공신화를 일궜지만 한국 사회의 뿌리 깊은 남성 중심 조직 문화와 유리 천장이 사회 전체에서 사라지기란 쉽지 않으리라고 본 것이다. 한국 여성은 ‘아직 배가 고프다’.

기자명 안은주 기자 다른기사 보기 anjo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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