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리스마형 리더의 시대는 끝났다. 정치와 경제, 사회 분야를 두루 살펴봐도 카리스마를 지닌 리더를 찾기 힘들다. 이런 리더는 오히려 ‘권위형 리더’라는 비판을 받는다. 그렇다고 민주형 리더가 대안이 되지도 못하는 것 같다. 민주형 리더는 ‘구성원의 목소리는 열심히 듣지만 성과를 내지는 못하는 리더’의 이미지 정도다. 소통형 리더가 주목받고 있기도 하다. 과연 이런 리더가 대안이 될 수 있을까?

지금 시대에 맞는 리더의 모형을 찾아보는, ‘리더십의 재해석’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에 대중문화 영역에서 성과를 낸 리더들에게서 새로운 리더십을 찾아보았다. 대중이 원하는 바를 기민하게 파악해 이를 만족시키는 성과물을 만들어낸 문화 리더들이 조직을 이끄는 방식이 궁금해서다. 먼저 KBS에서 〈1박2일〉을 성공시킨 후 tvN으로 옮겨 ‘꽃보다’ 시리즈(〈꽃보다 할배〉 〈꽃보다 누나〉 〈꽃보다 청춘〉)와 〈삼시세끼〉를 히트시킨 나영석 PD를 만났다.

 

ⓒ시사IN 신선영‘꽃보다’ 시리즈와 <삼시세끼>를 연출해 히트시킨 tvN의 나영석 PD.
긴 회의를 즐긴다고 들었다. 대부분의 직장인들은 회의를 소모적인 일이라고 생각한다. 회의에 대한 생각이 일반인과 다른 것 같다. 회의에서 정답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 노하우라면 노하우인 것 같다. 어차피 정답이 무엇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경험이 많은 사람이 확률 높은 답을 내놓을 수는 있겠지만 아무도 정답을 확신할 수는 없다. 그런데 회의에서는 연차가 낮을수록 말을 잘 안 하게 된다. 자기 생각에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의 말을 다 들어보려고 일부러라도 의견을 묻는다. 그들은 그들 또래를 대표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의 취향이나 성격을 평소에 파악해두고 있다. 그래서 누구를 대변하는지 다 파악하고 있다. 그들의 반응을 취합하면 그 아이템에 대한 대강의 그림이 그려진다. 그 정보를 가지고 판단을 내린다.

너무 빨리 결론이 나면 뭔가 잘못된 것이라 보고 회의를 다시 한다고 들었다. 결론이 빨리 난다는 것은 뒤집어 말하면 빤한 아이템이라는 얘기다. 모두가 동의하는 아이템은 가장 위험한 아이템이다. 기승전결이 쉽게 읽히는 아이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론이 빨리 나면 아 이건 다시 생각해봐야지, 하고 회의를 되돌린다.

사람들은 회의에서 갈등을 빚는 것을 꺼린다. 나는 갈등이 오히려 재미있다.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니까 당연히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각자 다른 생각을 하고 다른 이야기를 할 때 짜릿짜릿하다. 회의실에서 그런 싸움이 자주 붙는데, 그런 선택의 기로가 계속 생기고 각이 설 때 그것들을 조율해가는 과정이 재미있다. 각자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재미있다. 이젠 리더의 위치가 되니까 갈등이 나한테까지 튀지는 않으니 무심할 수도 있다.  

ⓒtvN <삼시세끼> 화면 갈무리<삼시세끼>(위)는 기획 단계에서 반대가 많았던 프로그램이다.
〈삼시세끼〉는 기획으로만 보면 상당히 밋밋한 프로그램이다. 이런 프로그램을 확신할 수 있었던 이유가 궁금하다. 〈삼시세끼〉는 제일 확신 없이 제작에 들어갔던 프로그램이다. 이전 프로그램보다 연령대가 높은 취향의 프로그램이기 때문이다. 팀원들 중에서 내가 가장 나이가 많고 그다음이 이우정 작가인데 〈삼시세끼〉의 경우 나와 이우정 작가밖에 좋아하는 사람이 없었다. 다른 스태프들은 메인이 결정하니 그냥 따라온 것이었다.

반대가 많았는데 왜 했나? 대다수가 반대한다는 건 그만큼 리스크가 크다는 것이고 그만큼 새로운 기획이라는 뜻도 된다. 사람들은 익숙하지 않은 것에 거부감을 표시한다. 반대 또한 하나의 의견이다. ‘이 프로그램은 정말 새로운 프로그램이구나’ 하는 생각에 한 번쯤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꽃보다’ 시리즈에 정체되어 있어서는 안 될 것 같기도 하고, 망해도 한번 해보자는 심정으로 결단을 내렸다.

〈삼시세끼〉를 보면 출연진 역시 확신 없이 제작에 들어간 것처럼 보이는데 그들을 어떻게 설득했나? 이 바닥에 설득이라는 것은 없다. 설득의 힘은 성공이다. 성공을 끌어내야 그다음이 있다. 술마시면서 ‘형이라고 불러’라고 하는 관계가 형성되었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는다. 그들을 설득했다면 말의 힘이 아니라 전작의 성공 덕분이다.

막상 촬영을 해보니 어땠나? 막상 찍어보니까, 더 난감했다. ‘그래도 어쩌면 잘 나올지도 몰라’ 하는 생각이 전혀 안 맞아 들어갔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내가 지금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지’ 하는 생각이 들었고, ‘망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도 해보고 싶은 것이었고, 의미가 있는 것이니 자양분이 되겠지 하는 심정으로 버텼다.

그런데 성공했다. ‘이건 되겠다’라고 생각이 바뀐 것은 언제인가? 방송을 내보고 알았다. 사실 불안한 상태로 방송을 냈다. 그런데 예상 외로 시청자들이 우리가 기획했던 의도대로 따라와 주었다. 찍을 때는 우리 의도가 안 먹혔다고 생각했는데, 예상 외로 시청자들이 그 의미를 발견해주었다. 어쩌면 잘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그때서야 들었다.  

ⓒKBS 홍보실<1박2일>(위) 시절 출연자의 기여가 있다고 생각하면 어떻게든 출연 분량을 살리려 노력했다.
시청자들이 ‘나영석이 만들었으니까’ 하면서 봐준 것 아닌가? 명량해전도 질 게 빤한 싸움이지만 이순신이니까 병사들이 따라준 것처럼.
기본적인 기대치가 있었을 수 있다. 그런 것이 있어서 다행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시청자는 냉정하고 엄격하다. 예전에는 잘 안 되는 아이템도 오래 계속하면 조금씩 사랑을 받기도 했다. 요즘은 한순간에 평가받는다. 재미있고 볼만하면 보지만 그렇지 않으면 바로 외면한다.

전형적인 예능 PD와는 스타일이 다르다. 좀 투박한 편이다. 보통 예능 PD의 이미지는, 기도 세고 캐릭터도 독특한 연예인들과 일을 하니까 그들을 한순간에 휘어잡는 카리스마가 있어야 한다는 측면이 강했다. 내가 입사할 때까지만 해도 유재석·강호동도 한순간에 굴복시키는 그런 카리스마가 중요하게 생각되었다. 그런데 내 경우는 그런 타입이 아니다. 연예인들과 친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휘어잡는 타입도 아니다. 개별 인물보다는 프로그램의 기획과 아이디어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연예인과의 인간관계보다는 회의를 중요시하고 어떻게 촬영하느냐에 집중했다.

예능 PD로서 연예인들과 친하게 지내는 것이 중요할 것 같은데…. 성격인 것 같다. 연예인들과 살갑게 지내지 못하는 편이다. 일부러 그러는 측면도 좀 있다. 그 사람을 너무 잘 알면 그 사람 기준에서 생각하고 몰입하게 된다. 예를 들어 차승원씨를 너무 잘 알아서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알게 되면 그것이 기준이 된다. 그런데 프로그램을 하다 보면 좋아하는 것만 시킬 수 없다. 친해져서 싫어하는 부분을 안 시키면 프로그램이 객관적이지 않게 된다. 시청자를 위해 만드는 것이지 그 사람을 위해서 만드는 것은 아니니까. 시청자가 기준이어야 한다. 일을 하다 보니 그게 옳다는 생각을 한다.

위기관리가 리더의 임무다. 출연자였던 장근석씨의 탈세 논란이 불거지고 그의 출연 부분을 들어내면서 프로그램 호흡이 빨라졌다. 전체적으로 불안정해 보였다. 무척 불완전한 방송이다. 제작진의 만족도로만 보면 60~70%도 안 되는 방송이다. 이런 일을 몇 번 겪었는데 지나고 나면 결국 시청자 중심으로 생각하는 것이 맞았다. 안 그러고 다른 생각을 하면 나중에 더 문제가 될 수 있다. 열흘 이상 같이 고생한 출연자를 없는 셈 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연출의 결단이 필요한 일이다.

단순히 프로그램 성공만으로 연예인을 만족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연예인은 이미지가 중요하기 때문에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 프로그램 안에서 자신이 어떻게 비치는가를 중요시한다.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연예인이 PD를 믿고 간다는 것은 이런 거다. 방송 안에서 내 모습이 대중에게 어떻게 비춰질까를 같이 생각해주고 그걸 끌어내기 위해 열심히 공을 들이는가 하는 부분을 보고 평가한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1박2일〉을 찍을 때 섬에서 한 명을 벌칙으로 낙오시킨 경우가 많았다. 그러면 혼자 섬에서 고군분투한다. 그런데 찍은 걸 보면 방송 분량이 안 나온다. 리액션이 없으니 재미가 없다. 그렇다고 짧게 방송하면 그걸 보고서 출연자는 어떤 생각이 들겠는가? 다음에도 벌칙을 하고 싶겠는가? 재미있는 건 없는데 출연자가 고생은 고생대로 했다. 프로그램에 대한 기여가 있다고 생각하면 어떻게 해서든 살린다. 재미없는 것을 재미있게 해주려면 두 배 세 배 공이 들어간다. 하지만 이럴 때는 공을 들인다. 나중에 이걸 보고 ‘그럴듯하게 내보내주네’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런 것들이 나중에 확산된다.

재미있는 것들만 골라서 보여주는 것이 정답이 아니라는 얘기인가? 〈삼시세끼〉에서도 그런 장면이 많다. 일상에는 단순하고 지루하고 힘만 드는 일이 많다. 이를테면 설거지 같은 거다. 찬물에서 30분 이상 하는 작업을 하루 세 번씩 꼭 해야 한다. 설거지가 재미있을 수 없다. 왜 해야 하지? 하는 생각을 당연히 한다. 하지만 일상성이 중요하다. 이런 부분을 반드시 넣어준다. 그래야 출연자가 다음에도 한다.

논공행상을 명확히 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스태프에 대해서도 비슷한가? 야외 관찰 예능은 팀워크가 중요하다. 스태프들과 끈끈한 신뢰 관계를 확립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 비슷한 작업을 해보며 손을 맞춰본 적이 있느냐 없느냐가 관건이다. 야외 촬영은 시작도 끝도 없다. 일어날 상황을 예측할 수도 없다. 돌발 상황에 자율적으로 대처할 수 있도록 만들어놓아야 한다. 카메라 감독에게 어느 부분이 중요하고 그렇지 않은지를 일일이 설명할 수 없다. PD는 출연자들만 신경 쓸 수 있도록 다른 부분은 자율적으로 진행이 되어야 한다.

협동을 중요시하는 것 같다. 대학 때 연극반을 했다. 같이 뭔가를 해서 성취했을 때 같이 기뻐하고 잘 안 되었을 때 같이 털고 다시 일어서는, 이런 일들에 대한 희열을 굉장히 크게 느꼈다. 방송을 시작한 이유도 그런 느낌을 계속 가지고 싶어서였다.

같이 일하는 사람들을 대할 때 뭔가 특별한 원칙이 있나? 확실한 목표를 설정해두고 있다. 나와 일을 하면 나와 만난 이후의 그 사람이 이전보다 조금은 더 나아져 있기를 바란다. 이서진씨가 우리 프로그램을 통해 더 좋은 이미지의 연예인이 되었으면 하고, 스태프들도 우리 프로그램 이후에 더 인정받고 더 벌이가 좋아지기를 바란다. 나와의 접점을 통해 현재 상황보다 더 나은 단계로 갈 수 있게 만들어주려고 한다. 면대면으로 만나서 장점과 단점을 파악하고, 지금은 어느 위치에 있으니 앞으로 어느 위치로 보내줘야 하는지, 각자에게 솔루션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리더라고 생각한다.

뭔가 가장 같은 느낌이다. 나와 함께 프로그램을 만드는 사람의 절반은 프리랜서다. 내가 피곤하니까 갑자기 쉬겠다고 하면 그 사람들은 오도 가도 못하게 된다. 내가 판단을 내릴 때 그들을 감안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내가 지금 만들고 있는 프로그램이 어쨌든 잘되어야 한다. 그래야 나랑 함께하는 사람들이 직업을 영위해 나갈 수 있다. 정서적·정량적 동기 부여를 늘 하려고 한다. 작은 칭찬부터 금전적인 혜택까지 여러 요소를 고려한다.

나영석 리더십에 대한 정의를 내린다면 ‘관조형 리더십’이 적합해 보인다. 단순한 기다림이 아니라 그 사람의 지금 위치를 알고, 가야 할 위치를 파악한 다음 자연스럽게 발전을 돕는 관조형 리더십. ‘나의 성공’을 ‘모두의 성공’으로 승화시키기 위해 구성원들에게 애정 어린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오늘날 리더에게 요구되는 덕목이 아닐까 싶다.

기자명 고재열 기자 다른기사 보기 scoop@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