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산훈련소에서 걸그룹 SES를 처음 봤다. 눈이 뜨이고 귀가 트이는 경이로운 영적 체험이었다. 그렇다고 사회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1998년 늦겨울이었다. 외환위기로 온 나라가 결딴날 판이었다. 환란을 피해 부랴부랴 군 입대로 도피한 신세였다. 바깥세상은 요정이 날아다니는 지옥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MBC 〈무한도전〉의 ‘토요일 토요일은 가수다’에서 다시 SES를 봤다. 목까지 잠근 셔츠에 통이 넓은 긴바지를 입은 SES의 모습은, 위아래를 입은 건지 벗은 건지 모르겠다 싶은 요즘 아이돌과는 확실히 달랐다. 텔레비전 속에선 다들 그렇게 달랐던 1990년대를 추억하고 있었다. 그들의 노래를 들으며 회상에 잠겼다. ‘난 알아요’를 외쳤던 20대 시절을 추억했다. 군대에서 SES를 처음 접했던 순간도 또렷하게 떠올랐다.

그러다 퍼뜩 정신이 들었다. 이것도 수년째 거듭돼온 1990년대 세대를 상대로 한 추억팔이의 연장이었다. 영화 〈건축학개론〉과 드라마 〈응답하라 1994〉에 이어 이번에는 예능까지 나선 셈이다. 볼 때마다 의문이 들었다. 1990년대가 그렇게 아름다웠을까. 1990년대에 20대를 보낸 세대는 왜 거듭거듭 추억팔이에 열광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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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라면 1987년 민주화 체제는 진행형이었지만 1997년 신자유주의 체제는 아직 도래하기 전의 시기였다. 일종의 한국적 벨에포크(‘좋은 시절’이라는 뜻)였다. 정치적 권위주의가 어느 정도 해소됐고 시장에서의 자유주의 물결은 만연했다. 청년들은 상품과 문화 소비를 통해 개성을 추구하느라 바빴다. 그렇게 1990년대 세대는 민주화 세대가 투쟁으로 쟁취하고 산업화 세대가 노동으로 쌓아 올린 정치와 경제의 과실을 마음껏 누렸다. ‘토토가’에서 울려 퍼졌던 노래들을 들으며 실컷 춤추고 놀았다는 말이다.

1990년대의 벨에포크는 1997년 외환위기로 한순간에 붕괴됐다. 97년 체제가 시작되면서 1990년대의 겉으로는 찬란했지만 실제로는 공허했던 민낯이 드러났다. ‘도금 시대’였다.

1990년대 세대도 도금 세대였다. 시원하게 터보 엔진을 켜고 ‘돌려놔’를 외치며 다녔던 그들은 환란이 닥치자 오합지졸처럼 흩어졌다. 일부는 유학을 갔고 일부는 결혼을 했으며 일부는 군대로 스며들었다. 훈련소에서 SES의 노래를 들으며 은거했다.

정작 그들은 무엇이 끝장났고 무엇에 저항해야 하는지조차 인식하지 못했다. 2000년대 내내 도금 세대는 앞선 세대가 만든 시장질서의 하수인으로 살았다. 30대가 되었어도 2000년대의 신자유주의적 퇴행을 넋 놓고 바라만 봤다. 386 세대나 산업화 세대처럼 자기 시대의 모순과 정면 승부를 벌여서 정치적 자산을 쌓을 기회도 흘려버렸다는 얘기다.

‘도금 세대’를 대상으로 한 추억팔이가 유난한 까닭

이제 도금 세대는 40대가 되었다. 중년으로서 알량한 권력과 부를 쥐게 되었다. 당장 추억팔이부터 시작했다. 물론 추억팔이는 전 세대에 걸쳐서 발견되는 증상이다. 〈국제시장〉이나 〈모래시계〉는 산업화 세대와 민주화 세대를 겨냥한 추억팔이다. 그중에서도 도금 세대를 대상으로 한 추억팔이는 유난하다. 그건 1990년대 세대가 도금 세대라는 또 다른 증거다. 이룬 게 없으니 가진 건 추억밖에 없다.

1987년 체제와 1997년 체제의 부정교합은 2000년대에 더 악화됐다. 2010년대 한국 사회는 끝내 퇴행 상태에 빠져들고 있다. 하필 이때 추억팔이에 한눈팔린 도금 세대가 40대로서 한국 사회의 중추다. 도금 세대가 역사의 과업을 수행하고 산업화 세대·민주화 세대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다. 이제까지와 같다면 별 기대할 것도 없다.

‘토토가’는 어느새 대미를 맞았다. 김건모 차례였다. ‘잘못된 만남’을 열창했다. “그런, 만남이, 어디부터 잘못됐는지, 난 알 수 없는 예감에 조금씩 빠져들고 있을 때쯤.”

기자명 신기주 (〈에스콰이어〉 기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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