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 북한이 대포동 미사일 발사 준비를 한다면 미국은 북한이 미사일을 발사하기 전에 요격·파괴하겠다는 의지를 즉각적이고 분명히 천명해야 한다.’ 빌 클린턴 행정부에서 국방장관을 지낸 윌리엄 페리와 국방차관보를 지낸 애슈턴 카터가 2006년 6월22일자 〈워싱턴 포스트〉에 기고한 글이다. 두 사람은 미국의 대북 선제공격에 대해 ‘미국의 동맹인 남한이 분명히 반대하고 있는 만큼 미국은 남한 영토 밖에서 미군 병력만으로 북한을 공격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당시 조지 W. 부시 행정부가 이들의 주장을 무시하기 전까지, 자칫 제2의 한국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워싱턴 사회에서 큰 반향이 일었다.

이처럼 대북 문제에 관한 한 미국 내 강경론자로 통하는 애슈턴 카터가 지난 12월5일(현지 시각), 차기 국방장관으로 지명되었다. 그는 클린턴 행정부에서 국방부 국제전략 차관보, 오바마 행정부에서 군수 담당 차관에 이어 부장관을 지냈기 때문에, 펜타곤 업무를 잘 아는 인사로 통해 2015년 1월에 열릴 인준 청문회를 무난히 통과할 것으로 보인다. 그는 1차 북핵 위기와 제네바 협상 타결 뒤인 1990년대 말, 평양을 방문한 뒤 페리 전 국방장관과 함께 대북정책 검토 보고서를 낸 바 있어서 한반도 문제에도 정통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는 등 풍부한 군 경험을 가진 척 헤이글 전 국방장관과 달리 군 경험은 전혀 없는 학구파 관료라는 비판이 있다.

ⓒAFP Photo12월5일 오바마 대통령이 차기 국방장관으로 지명한 애슈턴 카터(오른쪽)는 대북 강경론자다.

애슈턴 카터는 예일 대학을 거쳐 옥스퍼드 대학에서 이론물리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는 하버드 대학 부설 국제문제연구센터와 MIT, 록펠러 대학 등 학계와 연구소에서 활동하며 핵무기와 미사일 방어망에 관한 책도 여러 권 냈다. 평생을 책과 함께 지낸 카터는 1993년 클린턴 행정부 1기 때 국방부 차관보에 발탁되면서 공직 생활을 시작했다. 북한과의 ‘악연’은 이때부터 시작됐다.

카터가 국방부 차관보로 취임한 1993년 6월, 한반도 정세는 군사적 긴장이 고조된 상태였다. 북한은 그보다 석 달 전인 3월,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선언했다. 5월에는 일본 열도를 가로지르는 노동 1호를 성공적으로 발사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카터는 북한 문제 해법으로 무력 응징에 치중한 정책을 세우는 데 앞장섰다. 당시 카터가 국가안보회의(NSC) 검토용으로 준비한 보고서에서는 “협상을 통한 북한 핵문제 해결 전망은 극히 비관적”이라고 결론짓고 북한 핵시설들에 대한 공격을 권고했는데, 그 때문에 카터 휘하의 많은 부하들도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실제로 한반도 전문가 리언 시걸이 북핵 위기의 막전막후에 대해 쓴 〈이방인의 무장해제(Disarming Strangers)〉를 보면 카터의 호전적 대북관을 보여주는 대목이 나온다. 시걸은 국방부 관리의 말을 인용해 “카터는 군사적 옵션을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이기를 원했다”라고 밝혔다.

카터의 대북강경론은 북핵 위기가 절정에 달하면서 더욱 힘을 받았다. 1994년 북한이 사용후 핵연료봉에서 무기급 플루토늄을 추출할 움직임을 보이자 카터와 그의 직속상관인 윌리엄 페리 국방장관은 ‘제2의 한국전쟁’을 불러올 수도 있는 대북공격론도 마다하지 않았다. 카터는 2002년 10월 〈워싱턴 포스트〉 기고문에서 ‘1994년 봄, 나와 페리 장관은 북한의 핵시설들을 공격하고 그에 따른 전쟁에 대비해 미군 수십만명을 동원한다는 계획을 준비했다. 정밀 유도폭탄을 통해 방사능 낙진을 일으키지 않고도 영변 핵시설을 파괴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상당한 확신을 가졌다’라고 밝혔다. 이들의 주장을 당시 클린턴 대통령도 수긍한 것으로 알려졌다.

클린턴까지 동조한 카터 국방차관보와 페리 국방장관의 북한 핵시설 선제공격론은 당시 한국 김영삼 정부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혔다. 김 대통령이 클린턴 대통령과 33분간 통화하면서 “미국의 대북 공격은 한반도를 피바다로 만들 것이기 때문에 전쟁 시 단 한 명의 한국군도 동참시키지 않을 것”이라고 압박했기 때문이다. 한국 대통령의 반대에도 클린턴은 영변 핵시설에 대한 선제공격을 밀어붙일 태세였다. 하지만 1994년 6월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해 ‘핵활동  동결’이라는 합의를 이끌어내면서 카터와 페리가 주도한 대북 선제공격론은 물거품이 됐다. 그해 10월 이른바 ‘제네바 기본합의문’이 탄생하면서 북핵 위기는 일단락됐다.

ⓒREUTERS1994년 6월 지미 카터 전 대통령(오른쪽)이 방북해 ‘핵활동 동결’ 합의를 이끌어내면서 대북 선제공격론이 무산되었다.
카터는 클린턴 행정부 1기를 끝으로 공직을 떠났지만 그의 호전적 대북관은 변함없었다. 2003년 3월 PBS 방송과 한 인터뷰에서도 그는 북한 영변 핵시설에 대한 정밀 타격이 무산된 데 아쉬움을 드러냈다. “북한이라는 위협을 피하기 위해서는 (핵시설에 대한 정밀 타격)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있었다.” 특히 그는 협상을 통해 북핵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경우 미국의 대응책에 대해 “목적을 이루기 위해 무력 사용을 검토하던 1994년 상황으로 되돌아가 볼 필요가 있다”라고 말했다. 그는 페리 전 장관과 1999년에 펴낸 〈예방적 방어(Preventive Defense)〉를 통해 러시아와 함께 북한을 미국에 위협을 가하는 A급 국가 명단에 포함시켰다.

‘대북 강경파’ 국방장관, 북·미 관계의 새 변수

상황이 이런 터라 카터 국방장관 지명자가 오바마 행정부에서 잘 적응할 수 있을지를 두고 관심이 높아진다. 카터는 오바마 행정부 1기 국방장관을 지낸 로버트 게이츠처럼 유사시 미군의 무력 사용에 적극적이다. 오바마 대통령의 반전 기조와는 거리가 있다. 오바마는 카터를 국방장관으로 지명하면서 “최고의 국가 안보 지도자 중 한 사람”이라고 치켜세웠지만, 속내는 복잡한 것으로 보인다. 카터가 답례에서 “인준을 받으면 대통령에게 가장 솔직한 전략적 충고를 드리고자 한다”라고 말한 데서도 엿볼 수 있듯이 ‘직언’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뜻을 공개적으로 내비쳤기 때문이다.

〈뉴욕 타임스〉는 ‘카터가 과연 오바마의 친위 세력(이너서클)을 파고들어, 대통령의 국가 안보 사안을 공화당 주도의 의회와 잘 조화해내는 정치적 수완을 발휘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지적했다. 오바마의 ‘친위 세력’이란 수전 라이스 국가안보 보좌관과 데니스 맥도너 비서실장 등 대통령에게 수시로 접근할 수 있는 극소수 인사를 말한다.

북한은 2009년 오바마 행정부가 들어선 뒤 3차 핵실험과 장거리 미사일 실험을 단행했다. 이때 오바마 행정부는 미국 단독으로 혹은 유엔을 통한 대북 경제제재에 나서면서도 무력 대응은 피하는 이른바 ‘전략적 인내(strategic patience)’ 노선에 따라 외교적 해법을 모색해왔다. 이런 대북 기조가 지난 5년간 유지될 수 있었던 데는 군사력 사용보다는 외교적 해법을 강조한 오바마의 외교 기조를 국가 안보팀이 적극 뒷받침해서다. 한때 영변 핵시설에 대한 선제공격론을 주장했던 애슈턴 카터도 오바마 안보팀의 이런 분위기를 당분간 의식할 수밖에 없으리라 보인다. 하지만 북한이 향후 장거리 미사일이나 제4차 핵실험 움직임을 보일 경우에는 사정이 달라질 수 있다. 대북 강경파 카터가 오바마에게 어떤 ‘직언’을 할지 북·미 관계에 큰 변수가 생겼다.

기자명 워싱턴∙정재민 편집위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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