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은 선거가 없는 해다’라고 기사를 시작하려 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미니 총선급으로 치러진 지난해 7·30 재·보궐 선거 이후 2016년 4월 총선까지는 선거 일정이 없었다. 유례를 찾기 힘든 ‘20개월 무선거 시즌’이 예정돼 있었다. 선거가 없는 만큼 개헌 등 굵직한 이슈가 2015년의 정치 키워드가 되리라고 내다봤다.

그런데 헌법재판소가 정치판을 크게 흔들었다. 지난 12월19일 통합진보당(통진당)에 대한 해산 결정을 내리면서 소속 국회의원 다섯 명이 의원직을 잃었다. 그 가운데 비례대표 두 석은 공석이 되고, 지역구 세 석은 선거를 다시 치른다. 오는 4월29일 수도권 두 곳(서울 관악을·경기 성남 중원)과 호남 한 곳(광주 서구을)에서 보궐선거가 치러진다.

 4월 보선, 새 대표의 어려운 데뷔 무대

새정치민주연합은 2월8일 전당대회를 앞두고 있다. 전당대회에서 선출된 당대표가 2016년 총선을 책임지게 된다. ‘선거가 없는 1년2개월’은 신임 당대표에게 천금 같은 시간이다.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반대 진영에서 리더십을 흔들 만한 계기가 없기 때문이다.
 

ⓒ연합뉴스12월22일 ‘통합진보당 강제 해산에 따른 3차 비상 원탁회의’에 참석한 이정희 전 통합진보당 대표가 무릎을 꿇은 채 사과하고 있다.


그런데 4·29 보선은 당대표 선출 후 80여 일 만에 치러진다. 당직 인선 등 내부 정비에 심혈을 기울여야 할 타이밍에 선거를 치르는 건 신임 당대표에게 큰 부담이다. 첫 번째 공식 시험대가 되는 셈이다.

1차적으로는 누구를 공천하느냐가 문제다. 무리한 ‘전략 공천’을 강행했다가 자칫 7·30 재보선 때 서울 동작을 사태가 재연될 수도 있다. 당대표 출마를 기정사실화한 문재인 의원이 “공천권을 내려놓겠다”라고 공언하고 있지만, 구체적인 방법은 아직 없다. 이 과정에서 ‘흠집’이 커질 경우 ‘분당설’을 흘리는 일부 세력에게 탈당의 명분을 줄 수도 있다.

물론 위기는 기회다. 4·29 보선을 무사히 치를 경우 신임 당대표의 리더십이 탄력을 받을 수 있다. 새정치민주연합 전체로 봐도 4·29 보선이 그리 나쁘지 않은 변수라는 의견도 있다. 그동안 2·8 전당대회를 앞두고 당내에서는 누가 대표가 되든 리더십이 온전하지 못하리라는 걱정이 있었다. 고질적인 친노-비노 갈등이 살아 있는 한 전당대회 직후부터 당대표 흔들기가 노골화되리라는 것이었다. 중립지대에 속한 당 관계자들은 4·29 보선이 이런 당내 갈등의 완충지대가 되어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기도 한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신임 당대표가 보선을 잘 치러야 한다. 공천 과정도 매끄러워야 한다. 문제는 호남은 물론, 수도권 두 곳도 새정치민주연합이 ‘이겨야 본전’인 지역이라는 점이다. 2승1패는 되어야 리더십에 큰 흠집이 나지 않는다. 누가 되든 ‘어려운 데뷔 무대’가 되리라는 것이 당 관계자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 김기춘 의존도 더욱 커지나

박근혜 정권 3년차의 핵심 키워드는 여전히 김기춘과 김무성이다. 청와대 문건 파동을 알고도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김기춘 비서실장을 그냥 두고는 국정 운영에 한계를 느낄 수밖에 없다. 개각 등 어떤 인적 쇄신도 김기춘 비서실장이 건재한 한 묻힐 가능성이 높다. 야당은 물론 여당의 비판 공세도 피하기 어렵다.

문제는 박근혜 대통령이 김기춘 비서실장을 내칠 상황이 아니라는 점이다. 청와대 문건 파동으로 이른바 ‘문고리 3인방’의 발목이 묶인 상황에서 박 대통령이 믿을 곳은 김기춘 실장밖에 없다. 박근혜 정권의 레임덕이 심각해질수록 김기춘 실장에 대한 의존도가 더욱 커지리라는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

친박근혜계인 새누리당의 한 중진 의원은 청와대 문건 파동 직후 기자에게 “문고리 3인방이 얼마나 힘이 있는지 잘 모르겠다. 확실한 건 그 셋을 합친 것보다 김기춘 실장의 힘이 더 세다는 것이다. 앞으로도 더 세질 것 같다”라고 말했다.

3년차에 접어든 박근혜 대통령에게 김기춘 실장의 쓰임새는 ‘대여 견제용’이다. 3선 국회의원에, 법무부 장관을 지낸 김기춘 실장만이 비박근혜계가 장악한 새누리당 지도부의 공격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검찰총장 출신으로 사정기관에도 인맥이 두텁다. 정치인으로서는 두려운 존재다. “김기춘 실장의 캐비닛 안에 새누리당 유력 정치인들에 관한 X파일이 들어 있다”라는 소문이 여의도에 돌 정도다.

 

 

 

ⓒ연합뉴스11월21일 41개국 보수 정당 대표가 모이는 국제민주연맹 회의에 박근혜 대통령과 김무성 대표(오른쪽)가 참석하고 있다. 김기춘 비서실장(왼쪽)이 뒤를 따랐다.

 


지금도 김기춘 실장은 정기적으로 새누리당 지도부를 만나 대통령의 의중을 전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 실장이 새누리당 지도부와의 사실상 유일한 소통 창구인 셈이다. 김기춘 실장이 없는 청와대는 무게중심을 잃고 거꾸러질 공산이 크다는 이야기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최근 청와대 인적 쇄신 문제에 대해 “지금은 말을 아껴야 할 상황”이라며 피해갔다. 그러나 이를 두고 김무성 대표가 ‘꼬리를 내렸다’고 봐서는 곤란하다. 오히려 청와대를 ‘정밀폭격’하기 위해 뜸을 들이고 있다고 보는 게 정확하다.

상징적인 장면이 있었다. 김무성 대표가 최근 박세일 한반도선진화재단 명예 이사장을 새누리당의 핵심 요직인 여의도연구원장에 임명한 사건이다. 박세일 이사장은 한나라당 시절부터 박근혜 대표와 대립각을 세워온 인물이다. 2012년 총선 때는 보수 정당인 ‘국민생각’을 창당하기도 했다.

친박근혜계 핵심인 서청원 의원이 김무성 대표에게 서류뭉치를 집어던질 정도로 격분했지만, 김무성 대표는 박세일 카드를 밀고 간다는 방침이다. 박세일 이사장 임명과 관련해 새누리당 내부에서 “청와대와 이야기가 됐느냐?”라는 질문이 나오자 김 대표가 “이건 내 결정이다”라는 뉘앙스로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새누리당 관계자들은 공석인 지명직 최고위원 한 석이 누구에게 가느냐에 촉각을 곤두세운다. 김무성 대표가 이 자리에 ‘확실한 비박근혜계 인사’를 심은 뒤 본격적인 기 싸움에 나설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지명직 최고위원에는 아프리카에서 봉사활동을 펼치다 조만간 귀국하는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 거론된다.

 진보 진영, ‘새판’을 짜긴 짜야 하는데…

통진당 해산 결정 이후 주목받는 법이 있다.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집시법) 제5조 1항이다.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따라 해산된 정당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집회 또는 시위를 주최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다. 집회를 선전하거나 선동해서도 안 된다.

이는 통진당 관계자만 문제 삼는 법이 아니다. 진보 진영 전체에 철퇴 같은 법이다. 통진당의 강령이 한반도 평화통일 등 우리 사회 진보 진영의 의제와 일치하기 때문이다. 이 조항을 확대 해석할 경우 전시작전권 환수, 국가보안법 폐지 등을 요구하는 집회는 모조리 불법 집회가 될 수 있다.

이를 우려한 일부 법학자들은 헌법재판소가 통진당의 ‘숨은 목적’이라고 밝힌 ‘북한식 사회주의 실현’을 목적으로 하는 집회만 금지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해산 판결 이후 통진당 당원 10만여 명에 대한 고발과 관련 단체에 대한 경찰 수사가 이뤄지는 등 공안 정국이 시작됐다는 위기감이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공안 정국이 어디까지 휘몰아치느냐에 따라 진보 정당의 존립 자체가 위태로워질 수 있다.

진보 진영 내에서 “이대로는 안 된다”라며 새판 짜기에 돌입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최근 ‘국민의 눈물을 닦아줄 수 있는 새로운 정치세력의 건설을 촉구하는 국민 모임’(국민모임)이 새로운 진보 정당 건설을 촉구하고 나서면서 불을 지폈다. 이들은 ‘종북’ 이미지와 선을 긋고 ‘평화생태 복지국가’를 만드는 걸 목표로 삼았다.

국민모임에는 김세균 전 서울대 교수, 명진 스님, 정남기 전 한국언론재단 이사장, 이수호 전 민주노총 위원장 등 진보 명망가 100여 명이 참여했다. 여기에 정동영 새정치민주연합 고문이 참여 여부를 긍정적으로 검토 중이라고 알려지면서 신당 창당 논의가 급물살을 탈 것으로 보인다.

 

 

 

 

ⓒ연합뉴스12월24일 ‘국민모임’이 국회 정론관에서 새로운 진보 정당 건설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했다.

 


유일한 원내 진보 정당이 된 정의당은 말을 아끼고 있다. 통진당 논란으로 차기 총선에서 야권 연대가 불가능해지면서 당의 미래가 어둡기 때문이다. 아예 이 기회를 새로 거듭나는 계기로 삼자는 목소리도 나온다. 정의당 관계자는 “내부 여론조사 결과 당원 절반 이상이 진보 정당 재편의 필요성에 동의했다. 알량한 기득권을 내려놓고 제로베이스에서 진보 정당 재편을 주도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인다”라고 말했다.

 이번에는 비례대표 의석 늘릴 수 있을까

올 한 해 지속적으로 정치권을 달굴 정치 이슈는 개헌과 선거구(선거제도) 개편 문제다. 청와대 문건 파동과 복지 공약 축소 논란으로 5년 단임 대통령중심제에 대한 비판이 커지면서 개헌 논의는 더욱 거세질 것으로 보인다.

박근혜 대통령이 개헌은 블랙홀이라며 극구 반대하고 있지만, 정치권에서 개헌 논의는 이미 급물살을 탔다. 특히 강력한 차기 주자가 없는 새누리당이 ‘분권형 대통령제’를 골자로 한 개헌 논의를 세게 밀고 나갈 공산이 크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이미 분권형 대통령제 논의에 불을 댕긴 바 있고, 새정치민주연합 우윤근 원내대표도 개헌 추진 국회의원 모임의 간사를 지낸 대표적 개헌론자다.

선거구 조정 문제도 발등에 떨어진 불이다. 2014년 10월 헌법재판소가 선거구별 인구 편차가 2대1을 넘어서는 안 된다는 결정을 내리면서 전국 246개 국회의원 선거구 가운데 62곳이 조정 대상이 되었다. 인접한 지역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걸 감안하면 파장은 예측 불가다. 늦어도 올해 말까지 조정을 마쳐야 한다. 이참에 아예 선거제도까지 바꾸자는 목소리도 등등하다.

선거제도 개편의 핵심은 비례대표 의원 늘리기다(기승전…계파 갈등 이번엔 끝낼 수 있을까 참조). 현행 246대54인 ‘지역구 대 비례’ 의석 배분을 조정해야 고질적인 지역주의와 양당 구도를 깰 수 있다는 것이다. 학계 전문가들이 그동안 꾸준히 비례 의석 늘리기를 주장해왔지만, 2004년 비례대표 의석을 늘린 이래 10년째 제자리걸음이다. 김문수 새누리당 보수혁신위원장의 경우 오히려 농촌 지역구를 살리기 위해 비례 의석을 줄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선거구제 개편이 개헌보다 몇 배는 어렵다”라는 정치권의 정설이 올해도 되풀이되고 말지 지켜볼 일이다.

 

기자명 이오성 기자 다른기사 보기 dodash@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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