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를 보는 사람은 두 부류로 나뉜다. 4년에 한 번 국가대표팀 경기를 보는 사람과 매주 축구 경기를 찾는 사람. 축덕은 후자다. 그중에서 주말 새벽마다 TV와 인터넷에서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는 종자들이 바로 해축덕(해외 축구 덕후)이다. 아스널 덕후는 그들 중에서도 영원히 고통받는 존재들이다.

비극의 시작은 2008년이었다. 축구란 90분 동안 진행되는 ‘애국심 고취 정신수양’쯤으로 여기던 내게, 아스널은 ‘축구란 90분간 펼쳐지는 엔터테인먼트’라고 웅변했다. 이상적인 축구가 5분이라도 구현되는 것이 꿈이라는 아르센 벵거 감독의 축구 철학은 소름끼치게 아름다웠다. 결과 중심의 세상에 과정의 소중함을, 돈이 전부인 세상에 개성의 힘을! 그의 말이 심장을 관통했다. 지옥행 티켓을 끊는 순간이었다.

덕질에 발을 디딘 2008년은 아스널의 암흑기가 막 시작될 무렵이었다. 과거 1-1-2-1(순위)을 찍었다는 팀이 4-3-4-4(그래도 챔스는 간다)를 찍기 시작했다. 패배의 주말, 탈락의 봄이 반복되자 뭔가 잘못됐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제야 나는 ‘우승을 못하는 프로스포츠 팀’을 응원하는 일이 얼마나 정신 건강에 해로운지 알게 됐다. 라이벌 팀은 계속 스타를 사 모으는데 아스널은 자꾸 베테랑을 팔아치웠다. 하지만 믿는 구석이 있었다. “다른 팀은 스타를 사온다. 아스널은 스타를 만든다”라는 벵거 감독의 말씀을, 기도문처럼 외우고 또 외웠다.

ⓒ이우일 그림

하지만 꿈은 깨지고, 곧 끝난다던 무관의 세월은 8년 동안 이어졌다. 아스널은 스타 선수를 모아 우승에 도전하는 팀에서 스타 선수를 팔아 흑자를 보는 구단으로 변했다. 새 구장을 짓는 데 돈을 너무 많이 썼고, 만수르(맨체스터 시티 구단주이자 아랍에미리트 부총리)로 대표되는 오일머니의 침공이 선수들의 몸값에 기름칠을 더한 탓이다. 그래도 벵거 감독은 빙긋 웃으며 “우리 목표는 우승”이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선거 때마다 정치인에게 속는 유권자처럼, 나는 매년 속았다. 그사이 무관에 지치고 박봉에 질린 선수들은 하나둘 떠나갔다. 시간이 흘러 티에리 앙리는 마루앙 샤막으로, ‘철의 포백’은 주루와 스킬라치로 바뀌어 있었다. 무패 우승 시절의 화려한 멤버는 온데간데없었다. ‘소년 가장’ 세스크가 바르샤(그리고 첼시)로 떠났고 ‘캡틴’ 판 페르시가 다른 팀도 아닌 맨유로 이적하자 나는 진지하게 10만원짜리 레플리카(선수들이 입는 유니폼을 복제한 것)를 불태우고 싶어졌다.

내가 아스널 클럽의 재정지표를 들여다본 까닭

트로피 한번 구경한 적 없는 8년 동안, 아스널을 떠난 선수들은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그사이 우리는 클럽의 재정지표를 구해서 숫자 하나하나를 따져가며 읽었고, 클럽의 장기부채 해소 현황과 주주총회 발언을 실시간 트윗으로 지켜봤다. 정말 돈이 없는 건지 궁금하니까. 어차피 어린 선수만 키우니, 남의 팀 스타플레이어 대신 우리 팀 유소년 하이라이트 영상을 뒤졌다. 그 와중에 또 괜찮은 애들이 나오면 토라진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아무리 동방 덕후가 땅을 치고 발을 굴러도 아스널은 늘 아스널의 방식대로 굴러갔다. 그래도 그 모든 세월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이 이상적인 팀 운영이 사실 현실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목이 빠지도록 기다린 결과 결국 아스널의 재정은 다시 튼튼해졌다. 지극히 현실적인 선택을 반복하되, 불가능한 꿈을 이정표로 삼으며, 주위의 모두가 비웃어도 오직 큰 목표를 위해 옳은 일만을 하는 것. 그러면서도 17년간 팀을 매해 유럽 챔피언스 리그에 진출(4위까지 출전권 부여)시키고, 8년을 버틴 끝에 결국 우승컵을 들어올리고 마는 것(2013-2014 FA컵). 우공이산이 아니고 벵거이산이다.

올 시즌도 순탄치만은 않다. 부상자가 속출했고(왜 부상은 늘 아스널의 몫인가!), 그 탓에 선수단 구멍은 숭숭 뚫려 있다. 8년 절약 끝에 이제는 “우리도 (선수) 쇼핑할 수 있어” 수준으로 회복했지만, 다른 팀도 그만큼 강해졌다(아, 첼시…). 완벽한 축구를 구현하려면 한참 멀었다. 하지만 이번 주도 배신자의 10번 셔츠를 챙겨 입고 아스널의 경기를 기다리련다. 어쩔 수 없다. 바보 같다고? 그렇다면 덕후 동지의 댓글로 대답을 대신할밖에. “북런던 일에는 좀 빠져주시죠.”

기자명 중림동 새우젓 (팀명)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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