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가로서 신해철은, 적어도 초기에는, 자신이 만드는 음악은 그게 활동의 기반이든 추구하는 사운드든 간에 아무튼 새로운 것이어야 한다는, 그러니까 (한국에) 없던 것을 먼저 시도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다고 본다. 방법적으로는 테크놀로지를 적극 수용하는 식으로 발현되거나 시장·유행과는 무관한 포맷을 제시하는 식의 모험을 겁내지 않았고, 심지어 그를 통해 가요계에 자신의 영향력을 명확히 행사할 수도 있었다.

요컨대 넥스트가 결성된 1992년은 이승철, 김종서를 필두로 록밴드의 보컬이 솔로로 데뷔하면서 밴드라는 형태가 가요계의 유행에서 흐릿해지던 때였다. 하지만 그는 역으로 솔로에서 밴드로 활동 기반을 바꾸고 음악적으로, 대중적으로 성공적인 반응을 얻었다. 또한 솔로 2집 〈마이셀프(Myself)〉는 당시 첨단 테크놀로지였던 ‘미디’를 처음부터 끝까지 사용한 최초의 결과물이었고, 윤상과의 프로젝트였던 ‘노땐스’는 당시 한국에서는 댄스용으로만 소비되던 전자음악을 본격적으로 재구성하려는 시도였으며, 영국 유학 뒤에 사용한 ‘크롬’이라는 아이덴티티는 유럽에 불던 테크노 유행을 한국에서 제대로 반영하겠다는 욕망의 산물이기도 했다. 최근 발표한 ‘A.D.D.A’ 또한 아카펠라를 기반으로 1000회 이상의 레이어를 겹쳐서 ‘다른 소리’를 만들어낸 작업이었음을 살핀다면, 그의 소리에 대한 탐구는 믹싱과 마스터링을 해외에서 하는 것 이상의 어떤 근원적인 것에 가깝게 여겨질 정도다.

ⓒ연합뉴스남들이 밴드에서 솔로로 데뷔할 때, 그는 밴드로 돌아갔다. 2008년 넥스트 6집 쇼케이스 무대.

하지만 내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건 그가 쓴 노랫말이다. 1990년대로 한정할 때, 신해철의 노랫말은 전적으로 ‘개인’을 강조했다. 보통 한국의 90년대를 개인주의와 소비주의로 설명한다면, 그 아이콘으로는 주로 서태지가 언급된다. 그런데 나는 신해철이 그와 동등하거나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X세대, 그러니까 ‘90년대의 아이들’이 이전 세대와 의식적·무의식적으로 단절된 상태에서 수용한 가치관은 브랜드 소비를 통한 정체성 확립과 개인주의를 기반으로 삼은 세계 질서의 재구성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나’를 주인공 삼아 ‘세계’와 맞서던 당신

서태지(와 아이들)의 노래 내용은 은연중에 공동체주의를 지향하는 게 많았던 반면 신해철은 꿋꿋이 ‘나’를 주인공으로 삼아 ‘세계’와 비장하게 맞서는 내용이 많았다. 신해철 음악이 LA메탈, 하드록, AOR(Adult Oriented Rock), 프로그레시브 록, 일렉트로니카 등의 장르적 관습보다 존재론으로 환원될 수 있는 건 바로 그 때문이다. 그가 추구한 음악 세계는 이성과 관념이 충돌하는 형이상학적이면서도 유물론적인 세계였다. 이 모순적인 세계의 설계는 실패할 수밖에 없었음에도 그는 이 이상을 지속적으로 추구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진정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

내가 신해철을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는 이 ‘진정성’이 마케팅이나 이미지만으로 전락하지 않는 데다가 심지어 자기 내부의 모순을 껴안으면서 작동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진정성은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보여야 하는 것이기도 했다. 1990년대에 발표한 신해철의 노래에 종종 등장하는 ‘그대’는 여성이라기보다는 초월적인 존재에 가까운데, 이렇게 목격자를 전제로 하는 투쟁은 탐미적인 나르시시즘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

그 점에서 신해철이야말로 ‘90년대 아이들’의 대변자이기도 했다. (일상에서도, 정치에서도) 이 브랜드에서 저 브랜드로 옮겨 다니며 등 비빌 곳, 다시 말해 자기 정체성을 찾아 헤매던 파편화된 ‘90년대의 아이들’은 서태지와 함께 안락한 공동체를 상상하면서도 신해철과 같이 비장한 나르시시즘에 매혹될 수밖에 없었다고 본다.

신해철과 서태지, 그 둘은 닮은 듯 다르고, 그래서 1990년대의 양 축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2014년은 그래서 상징적이라고 생각했다. ‘90년대의 아이들’이 마침내 허리 세대인 30대 후반과 40대 초반에 진입한 시점이자, 90년대의 복잡한 시대정신을 상징하던 신해철과 서태지가 나란히 복귀한 때라는 점에서 그랬다. 내심 나는 그가 서태지와 경쟁하며 지속적으로 뭔가를 만들어내길 기대했던 것이다. 그의 음악은, 혹은 삶은, 나아가 신해철이라는 존재는 곧 내가 속한 세대의 정신을 탐구하는 데 중요한 단서였으므로 그의 복귀가 기뻤다.

나는 이 얘기가 고인에 대해 부정한 뉘앙스로 읽히지 않기를 바란다. 그의 죽음을 접한 날, 차에 앉아 오래 울었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눈물이 그냥 터져나왔다. 그러면서 깨달은 건 그가 내게 얼마나 중요한 존재였는지, 내가 그를 얼마나 오래, 심지어 그 사실도 잊어버린 채 사랑하고 있었는지, 그런 감정의 복잡함이었다. 그는 ‘우리’ 세대의 다른 거울이었다. 나는 이 깨진 조각을 꽉 쥐고, 여기에 비친 자신을 똑바로 봐야겠다고 다짐한다. 그를 통해 ‘우리’를 다시 보는 것이 그에게 보내는 가장 좋은 화답이길 바랄 뿐이다.

기자명 차우진 (음악평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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