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이 빈 건물을 활용하는 법
  • 정지연 (A-컴퍼니 대표)
  • 호수 369
  • 승인 2014.10.11 12:19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예술은 도시에서 주로 소비되지만 임대료가 비싼 도시에 예술가를 위한 공간은 거의 없다. 특히 작품이 잘 팔리지 않는 예술가 지망생에게 작업 공간의 확보는 먼 나라 얘기다. 실제 먼 나라는 어떨까? 세계 미술 시장의 중심지이자 집값 비싸기로 소문난 런던의 예술가들에게는 어떤 대안이 있을까?

영국 역시 계속되는 경기침체로 영국예술위원회(ACE)의 예산이 삭감되었다. 미술 시장의 특성상 스타 작가 반열에 오르지 못한 대다수 예술가는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며 창작 활동을 한다.

런던은 비어 있는 공간에도 세금을 부과(Empty Property Rates)한다. 유휴 공간에 대한 과세표준액이 2600파운드(약 440만원)로 낮아지면서 실질적인 과세 대상자가 30%에서 95%로 증가했다.

그래서 건물주들은 차라리 빈 공간을 기부하고 세금을 감면받는다. 건물이 매매되거나 세입자가 나타나면 언제든 비워주어야 하는 이 공간을, 자치구는 예술가들이 저렴하게 사용하도록 하고 있다. 사회적 기업 민와일 스페이스(Meanwhile Space)는 그 이름처럼 ‘잠시’ 동안 이러한 공간을 예술가와 연결해 지역을 바꾸는 사업을 펼치고 있는데 지금까지 영국 내 17개 지역에서 24개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정지연 제공〈/font〉〈/div〉영국의 사회적 기업 SFSA는 공장 단지
민와일 스페이스의 사업 지역 가운데 한 곳인 웸블리는 이민자들이 모여 사는 곳으로, 15년 전만 해도 악명 높은 범죄 구역이었다. 하지만 정부의 개입으로 세계 최대 규모의 웸블리 스타디움 단지가 조성되고 상업적 투자를 적극 유치하면서 지금은 지역 재생의 대표 사례로 꼽힌다.

그런데 지역 자치구인 브렌트 카운슬(Brent Council)은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지역 재생 프로젝트를 계속 이어가고 있다. 이 지역에 있는 10개 건축 공간 활용에 대한 리서치를 의뢰받은 민와일 스페이스는 가장 먼저 35년 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공간 ‘코트럴 하우스’에 왕립예술학교(RCA)의 건축학과 학생들을 입주시켜 거점을 마련하고, 지역 커뮤니티와의 협업을 통해 프로젝트가 진행되도록 했다.

웸블리 시민학교(Civic University Wembley) 프로그램 안에서 지역 주민과 학생들이 지역 공간에 대한 토론을 해서 방향을 모색했다. 예를 들면 취약 계층 여성들의 취업을 지원하는 소셜 키친을 운영한다거나, 이민자들의 다양한 화폐를 효율적으로 사용하게 만들 아이디어를 모으는 식이다.

만약 코트럴 하우스가 여전히 비어 있다면 건물주는 월 4000파운드의 세금을 냈어야 한다. 하지만 지난 1년6개월 동안 민와일 프로젝트에 사용됨으로써 세금을 감면받았고 최근에는 건물 매매까지 이루어졌다. 지역 재생 프로세스는 빈 공간을 활용해 예술가와 지역 주민이 참여하는 커뮤니티를 만들고 이를 통해 공간의 가치를 높이는 결과를 가져오고 있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정지연 제공〈/font〉〈/div〉영국의 사회적 기업 SFSA는 공장 단지를, 민와일 스페이스는 35년 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코트럴 하우스를 예술가를 위한 공간으로 사용했다.
커뮤니티로 스며든 예술가가 공유하는 가치

아카바(ACAVA·Association for Cultural Advancement through Visual Art)라는 비영리 단체도 예술가와 지역을 연결해준다. 아카바는 런던 곳곳에 23개 스튜디오를 운영하는데 예술가 600여 명이 작업하고 있다. 예술가가 지불하는 임차료는 시세의 50% 정도다. 아카바는 정부기관의 지원금으로 운영되므로 공익을 위한 공간 활용을 통해 지역 커뮤니티에 기여한다.

아카바의 예술가들은 장애인, 약물중독자, 정신질환자들의 재활 프로그램을 돕기 위한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예술가는 이러한 활동에 동의해야만 입주할 수 있는데, 이 과정에서 다른 분야 전문가들과 교류가 일어나며 대중과 소통할 기회도 늘어난다. 게다가 프로젝트 참여로 수입을 올릴 수 있다. 이러한 선순환의 과정은 꼭 상업적으로 성공하지 않더라도 예술가로서 오래 활동하는 데 큰 힘이 된다.

아카바를 만든 덩컨 씨는 예술대학 교수로도 일한다. 그는 “예술이 중요하다면 신진 예술가들에게 공간을 지원하는 것이 필수적이며 이를 위해 정부의 개입이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덩컨 교수는 “정부나 기관이 소유하고 있는 유휴 공간을 예술가가 사용할 수 있게 하는 정책이 마련되어야 한다. 런던 도시계획에 예술가들의 스튜디오 공간도 배정해야 한다”라고 덧붙였다.

한편 SFSA(Second Floor Studo & Arts)는 비어 있던 템스 강변의 공장 단지를 개조해서 대규모 스튜디오를 운영 중이었다. 다양한 나라에서 온 예술가 380명이 입주해 있으며 공간을 계속 늘려가는 중이다. 입주 작가들은 연간 회비 90파운드(약 15만원)와 주변 시세의 40% 정도 월세를 내고 이용한다. SFSA는 정부 지원금에 의존하지 않는 독립적인 기업이다. SFSA의 창립자 매슈 우드 씨는 정부 지원을 받지 않으면서도 운영할 수 있는 비결로 ‘커뮤니티 비즈니스’를 꼽았다.

SFSA는 소속 지역인 그리니치 자치구에 도시계획 프로젝트를 제안했다. 특정 지역에 대한 사회적인 요구를 파악한 후 해결 방법에 대한 논의와 실행까지 예술가와 함께 진행하는 방식인데, ‘웰 런던(Well London)’이 가장 대표적인 프로그램이다. 900명의 지역 주민이 무려 132가지 지방 사투리를 사용하는 곳에서 어린이 프로그램과 다양한 이벤트를 열어 종교·문화적 차이로 인해 단절된 소통의 고리를 찾았다.

매슈 우드 씨는 GLA(Greater London Authority)의 도시계획 자문위원으로서 정치인들에게 문화산업이 얼마나 중요하고, 혁신의 바탕이 되는지 적극적으로 호소했다. 그 결과 런던의 10년 도시계획인 ‘런던 플랜’ 안에 예술가들의 공간 문제가 포함되도록 이슈화하고 있다. 사람 중심의 도시, 녹지와 오픈된 공간을 유지하고 안전하면서도 다양한 도시, 빈곤과 차별이 없는 도시를 만들기 위해 곳곳에 예술과 예술가가 꼭 필요하다는 것이다. 런던 플랜은 국제도시 런던이 겪고 있는 문제를 인구 증가, 경제성장, 환경, 라이프스타일 및 기술 변화로 규정하고 이에 대응하기 위한 도시계획이다.

이런 기관들은 조금씩 다른 특징이 있지만 예술가의 공간 확보를 위해 소속된 자치구·커뮤니티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운영된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이들은 하나같이 지역 재생과 예술가를 연결 지어 이야기하고, 자치구 의회의 의사 결정에 대해 충분히 발언할 기회를 가지고 있었다.

영국에서는 예술가의 창작 환경 문제를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지 않는다. 무명의 지망생들을 예술가로 키우기 위해 작업 공간 문제를 중요하게 인식하고 이를 유휴 공간의 활용과 지역 개발로 연결시킨다. 이러한 토대 위에 예술가가 커뮤니티 안으로 스며들고 자연스럽게 예술의 가치를 공유하는 것이다.

Magazine
최신호 보기 호수별 보기

탐사보도의
후원자가 되어주세요

시사IN 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