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데없이 깻잎 따기 특명이 떨어졌다. 언니네텃밭 무안공동체에 속한 황선숙씨(47)를 취재하러 갔다가 벌어진 일이다. 이 날 소비자들에게 보낼 제철 꾸러미를 배송해야 하는데, 거기 들어갈 깻잎을 아직 다 따지 못했단다.

재촉을 받으며 향한 텃밭 입구에는 시퍼런 풀이 무릎 넘게 자라 있다. 제초제를 쓰지 않고 친환경으로 농사를 짓다 보니 자란 것들이란다. 풀이 무성하니 가끔씩 뱀도 나타나더라는 말에 고랑으로 향하던 발걸음이 멈칫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어느새 깻잎 따는 일에 심취해 서툴게 손을 놀리고 있자니 황씨가 한 마디 한다. “그렇게 깻잎을 삐뚤빼뚤 겹쳐놓으면 다른 언니들한테 혼나요. 소비자들한테 갈 건데 정성이 없어 보인다고요.”

꾸러미 사업은 도시 소비자가 일정 비용을 지불하면 농민이 주기적으로 제철 농산물 꾸러미를 보내주는 도농 직거래 방식의 일종이다. 2005년 충북 오창농협이 꾸러미 사업에 처음 뛰어든 이래 이 사업은 연평균 40.3%의 매출 신장을 보이며 순항 중이다. 현재 꾸러미 사업을 벌이는 업체만 전국에 150여 개로 추산된다. 

ⓒ시사IN 김은남언니네텃밭 무안공동체에 속한 여성 농민들이 소비자에게 보낼 ‘제철꾸러미’를 싸고 있다.

제철 꾸러미-언니네텃밭 무안공동체

이 중에서도 언니네텃밭(www.sisters garden.org)은 가족농·소농을 중심에 둔 꾸러미 사업체라 할 수 있다. 여성 농민들로 이뤄진 17개 생산 공동체가 2000여 명에 이르는 소비자에게 월 10만원을 받고 매주 꾸러미를 보낸다(격주는 월 5만원). 소비자 주문이 늘어날수록 업체 처지에서는 기업농·전업농 위주로 꾸러미를 구성하는 게 유리하다. 좀 더 안정적으로 물량을 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니네텃밭은 2009년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사업단으로 출범한 이래 제철 농사, 텃밭 농사, 친환경 농사, 다품종 소량생산이라는 영농 원칙을 지키는 여성 농민 공동체만을 생산자로 받아들여왔다고 윤정원 사무국장은 말했다. 생산자 1인과 관계 맺는 소비자 수도 일정 한도 내에서 제한한다. ‘생산자 1명이 소비자 10명의 안전한 먹을거리를 책임지고, 소비자 10명은 생산자 1명의 안정적인 생활을 책임지도록 한다’는 것이 언니네텃밭의 설립 목표이기 때문이다.

기자가 찾아간 전남 무안공동체는 지난 4월 꾸러미 사업에 합류한 신생 공동체다. 말이 신생이지 꾸러미 사업에 합류하기 위해 2년 전부터 꾸준히 생산자를 조직하고, 각자 텃밭에 뭘 심을지 작부체계를 꼼꼼히 짜며 준비 작업을 해왔다고 이은자 대표(50)는 말했다. 제철채소가 부족한 겨울철을 대비해 고사리, 토란대 등 나물도 일 년 앞서 말려두었다.

현재 무안에서 꾸러미 사업에 참여하는 여성 농민은 8명. 이들은 매주 화요일 무안여성농업인센터에 모여 꾸러미를 함께 싼다. 8월26일 꾸러미에 담길 농작물은 황씨 밭에서 딴 깻잎 외에 고춧잎, 햇고구마, 햇참깨, 유정란, 얼갈이김치, 송편 등 8가지였다. 명절을 앞두고 메뉴를 고심한 흔적이 역력하다. 다른 지역 꾸러미에서는 보기 힘든 구운 김도 눈길을 끈다. “무안은 바다와 갯벌을 끼고 있는 곳이라 바다 농작물도 꾸러미에 넣는다. 겨울이면 바지락이랑 석화, 감태도 보내려 한다”라고 이 대표는 말했다.

 

그런데 꾸러미가 정말 가족농·소농의 생계에 도움이 되기는 하는 걸까? 꾸러미를 받는 소비자가 50명가량인 현재 무안공동체의 생산자 1인당 수입은 50만~60만원 수준이다. 애초의 기대에는 못 미친다. “무안은 본래 땅이 비옥하고 일거리도 풍부한 편이다. 돈 되는 일 놔두고 뭐 하는 짓이냐고 꾸러미 사업을 한심해하는 동네 어르신도 많다”라고 황선숙씨는 말했다. 
그럼에도 이들이 꾸러미를 싸는 이유는 무엇보다 재미있어서다. 농사를 짓다 몇 번 실패해 김 양식으로 전업했다는 이은자 대표는 “꾸러미 때문에 다시 텃밭 농사를 하게 됐는데, 이것저것 조금씩 기르는 일이 이렇게 재미있었나 싶다”라고 말했다. “내 이름으로 된 통장에 돈이 불어가는 기쁨도 크다”라고 최연심씨(48)는 말했다. 농촌경제연구원 통계에 따르면 여성 농민의 80%는 본인 소유 농지가 없으며, 본인 명의 통장이 없거나 농산물 판매액이 연 120만원 이하인 경우도 36.5%에 달한다.

황선숙씨는 무엇보다 꾸러미를 통해 ‘더는 갈아엎지 않아도 되는 농사’ ‘예측할 수 있는 농사’를 할 수 있게 되기를 꿈꾼다고 말했다.

물론 아직은 갈 길이 멀다. 꾸러미를 싸고 남는 농산물을 어떻게 처리할지는 여전히 풀어야 할 숙제다. 농산물 값이 폭락하면 슬그머니 꾸러미를 끊는 소비자도 불안 요소다. 윤정원 사무국장은 꾸러미야말로 ‘우리는 서로 배신하지 않을 거야’라는 믿음에 기초한 직거래 모델이라고 말한다. 시장가격이 폭등하건 폭락하건 생산자와 소비자가 서로를 지켜주겠다는 '의리'. 꾸러미 사업의 성패는 여기서 갈린다는 얘기다.

농사펀드 1호-조관희 농부

“세상에서 가장 무책임한 펀드.” 대놓고 이렇게 선전하는 펀드가 있다. 이름하여 농사펀드다.

농사펀드의 효시는 2012년 등장한 ‘맨땅에 펀드’다(이 펀드의 진행 과정은 〈시사IN〉에도 ‘지리산 오미동 통신’이라는 이름으로 연재된 바 있다). 그런데 크라우드 펀딩(소셜 미디어나 인터넷 등의 매체를 통해 자금을 모으는 방식)이라는 좀 더 대중적인 방식으로 농사 자금을 모으는 농사펀드(facebook.com/groups/nongsafund)가 지난해 출현한 것이다.

ⓒ시사IN 조남진농사펀드에 투자한 도시 소비자들이 8월24일 충남 부여에서 조관희 농부(맨 왼쪽)의 논에 세울 허수아비를 만들고 있다.
농사펀드는 도시·농촌 간의 지속 가능한 교류 방식을 모색하던 청년 기획자 5명(공기대·김승연·박승범·천재박·한민성)이 제안하면서 만들어졌다. ‘소농·가족농에게 투자하고 안전한 먹을거리로 돌려받는 농촌-도시 교류 펀드’, 이것이 펀드의 기본 얼개다. 투자자가 계좌당 5000원~ 30만원인 펀드를 구매해 특정 농부에게 투자하면 그해 수확한 농산물로 수익을 되돌려 받는 방식이다.

펀드 투자 대상 1호는 충남 부여의 조관희 농부(60). 투자 품목은 이 농부가 충남 부여군 장암면 정암리 수작골 고래실 2975㎡(약 900평) 규모 논에서 우렁이농법으로 재배하는 친환경 쌀이다. 쌀 시장 개방이 예고된 국면에 국산쌀에 투자하는 무모한 펀드인 셈이다. 그뿐 아니다. 농사펀드는 자칫 ‘쪽박’을 찰 수도 있다고 투자자들에게 처음부터 못 박았다. 농사펀드의 큰 위험 요소는 태풍, 가뭄, 고라니, 멧돼지 등. 이런 ‘자연재해’로 농사를 망치게 되면 투자금을 한 푼도 돌려줄 수 없다고 경고한 것이다. ‘예상치 못한, 불가항력의 리스크까지 농부와 도시 소비자가 함께 나누는 것.’ 이것이 농사펀드가 생겨난 배경이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무책임한 펀드’를 사들이는 겁 없는 투자자들이 있더라는 사실이다. 사회적 경제를 지원하는 플랫폼인 ‘오마이컴퍼니’를 통해 진행된 농사펀드 판매율은 2013년 79%, 2014년 171%였다.

한 해 만에 두 배 가까이 판매율이 뛴 비결은 기록적인 펀드 수익률. 지난해 겨울 농사펀드 투자자들은 뜻밖의 택배 선물을 받고 “다들 쓰러졌다”고 한다. 조관희 농부가 고래실 논에서 수확한 친환경 쌀 외에 직접 길러서 짠 참기름과 들기름, 서리태, 무차, 시래기 등이 빼곡하게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모르긴 해도 본인이 낸 투자금의 200% 이상은 회수했을 것”이라며 조씨는 웃었다.

10년 전 귀농했다는 조관희 농부가 펀드 참여를 결심한 것은 “농산물 가격을 농민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구조가 너무 한심해서”다. 생산자 스스로 가격을 매기는 공산품과 달리 농산물 가격을 결정짓는 것은 도매시장 경매사와 농협이다. 정부는 물가 통계라는 미명 아래 농산물 가격을 꽁꽁 묶어두려고만 한다. 관행농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힘겹게 자연농법으로 농사를 짓는 농부들도 가격 결정권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던 차에 ‘우문현답(우리들의 문제는 현장에 답이 있다)’이라는 모임에서 알고 지내던 청년 기획자들이 농사펀드를 제안해온 것이다.

농사펀드로 이룬, ‘월급 받는 농부’의 꿈

올해 조관희 농부에게 투자한 도시 소비자는 157명. 투자 금액은 애초 목표했던 760만원을 훌쩍 뛰어넘은 1299만원이다. 덕분에 조씨는 영농비를 지원받는 것은 물론 인건비로 월 50만원을 받는 호사를 누리고 있다. ‘월급받는 농부’의 꿈을 이룬 셈이다.

조관희 농부의 성공에 힘입어 결성된 농사펀드 기획단은 지난 7월 두 번째 펀드도 선보였다. 충북 괴산의 청년 농부 김성규씨(25)가 부모님과 함께 기른 토종 매실에 투자하는 펀드가 그것이다. 매실값 폭락으로 휘청이는 농가를 위해 긴급 편성된 이 펀드는 애초 목표액(396만원)의 111%인 437만원을 모금하며 마감됐다.

농사펀드 기획단은 올 하반기 조씨나 김씨처럼 자연농법으로 농사짓는 소농들에게 투자하는 독자적인 농사펀드 플랫폼을 선보일 계획이다. 기획단에 속한 박종범씨(우리가총각네 팀장)는 “농사펀드는 소농을 돕는 일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기 위한 길이다”라고 말했다. 소농이야말로 도시 소비자의 건강을 책임질 수 있는 최후의 보루라는 것이다.

농사펀드는 이익과 손해를 함께 나눠질 도시 소비자를 연중 3회 생산 현지에 ‘소환’해 모내기, 벼베기를 거들게 하는 행사도 벌이고 있다.

기자명 김은남 기자 다른기사 보기 ken@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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