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토 다이스케사천 시민단체는 일본의 공식 사과도 없는데 가미카제 특공대원의 위령비를 세울 수 없다고 주장했다.

최근 2차 대전 중 숨진 조선인 가미카제 특공대원 탁경현의 위령비가 경남 사천에 세워질 뻔했다. 사천 지역 시민단체들은 이 사업에 거세게 반대했다. 탁경현이 일본군에 자원 입대한 친일파 장교(소위)라는 게 가장 큰 이유였다. 위령비 건립은 철회됐다. 일본 교도통신 기자 사토 다이스케 씨는 당시 사천에서 위령비 건립 추진 과정과 반대 시위 현장을 취재했다. 그는 〈시사IN〉에 보낸 기고문에서 위령비 건립 의도에 대해 오해가 있었다는 점을 지적했다.

“사천시는 가미카제 특공대원 탁경현 위령비를 철거하고 전국적 수치로 만들어버린 사천 시민의 자존심을 살려내라!” 지난 5월10일, 사천시 교외의 서포면 외구리 체육공원 입구에는, 플래카드를 내건 시민단체 회원 40여 명이 집회를 열었다. 한국 취재진과 일본 기자도 다수 있었다. 주위에는 경찰관이 100명 배치되었다.

공원 안에는 2차 세계대전 때 일본군 가미카제 특공대에 입대해 전사한 사천시 출신의 탁경현씨(사망 당시 24세)를 포함한 조선인 특공대원을 추도하는 ‘귀향 기원 위령비’가 지어지고 있었다.

위령비의 건립을 기획한 일본 유명 배우 구로다 후쿠미 씨는, 사천시의 협력을 받아 지난해 9월부터 준비를 진행했다. 구로다 씨가 위령비를 건립하려고 한 계기는 199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어느 여름날 꿈 속에서 전쟁 중에 죽었다는 키 큰 젊은이가 나타나 말을 걸어왔다. “조선인인데 일본의 이름으로 죽었던 것이 유감이다.” 이 꿈 이야기를 1995년 신문 칼럼에 쓴 구로다 씨는, 실제 조선인 특공대원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탁경현씨는 그 중 한 명으로 1945년 일본 가고시마현 기지에서 출격해, 오키나와현의 바다에서 미쓰야마 아키히로(光山文博)라는 일본 이름으로 전사했다. 구로다 씨는 탁경현씨가 꿈에서 본 젊은이와 닮았다고 느꼈다.

사천시장, 제막식 이틀 전에 ‘행사 중지’ 결정

ⓒ사토 다이스케지난 5월10일 탁경현 위령비 제막식에 참석한 구로다 후쿠미 씨(앞줄 왼쪽 세 번째) 등 일본인이 위령비에 합장하고 있다.
“영혼의 소원대로 본래 이름으로 고향에 돌려주고 싶다”라고 생각한 구로다 씨는, 전쟁 희생자 연구를 하던 홍종필 전 명지대 교수의 협력을 얻어 조사를 시작했다. 탁씨의 고향이 사천시인 것을 밝혀냈고 2004년에는 현지를 방문했다. 처음에는 생가 근처에 작은 위령비를 세울 생각이었지만, 구로다 씨의 뜻에 김수영 사천시장이 찬성해 땅 약 1만㎡를 제공받아 지난 5월2일 높이 약 5m짜리 위령비를 공원에 설치했다.

하지만 위령비 설치 소식을 들은 시민단체 등은 일제히 반발했다. 사천 지역의 시민단체로 구성된 사천진보연합은, 5월6일 기자 회견을 열고, 제막식 중지와 위령비 철거를 요구했다. 5월8일에는, 사천진보연합과 대한광복회 울산·경남지부 간부가 김수영 사천시장과 회담했다. 김수영 시장은 이 자리에서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고 제막식을 중지하겠다고 약속했다.

구로다 씨 등은 5월9일 위령비 건립 반대 측인 이성헌 사천진보연합 집행위원장(시의회 의원)과 대한광복회 관계자 등과 회담했다. 구로다 씨는 국가 차원이 아니라 민간 수준의 교류인 점을 강조하며 “과거 비극을 낳은 것은 일본이며, 그것을 아픔으로 생각해 미안해하는 마음을 담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이에 대해 위령비 건립 반대 측은 △아직 일본으로부터 공식 사과도 없는데 가미카제 대원의 비석이 한국 땅에 세워지는 것이 의문이고 △시의회의 승인이나 주민 합의를 구하지 않고 시장이 독단으로 결정했다는 등의 의견을 말해 타협점은 찾을 수 없었다.

문제가 된 것은 탁경현씨의 신분이었다. 김형갑 광복회 지부장은 “탁경현은 일본군에 스스로 자원해 창씨개명한 일본 이름으로 죽어, 야스쿠니 신사에 모셔졌다. 반일 독립운동에 싸운 조상의 자손으로서 그런 인물의 비석을 세우는 일은 도저히 허락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구로다 씨는 위령비가 “병사 한 명을 모시는 것이 아니라, 창씨개명에 의해서 일본인 이름으로 죽은 모든 한국인의 영혼을 위로하는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반대 측은 위령비 옆면에 탁경현의 일본 이름이 적시된 사실을 들며 의도를 비판했다. 

위령비 앞뒤에 적힌 글은 이렇다. (앞면)귀향기원비/태평양전쟁 때/사천에서도 많은 이들이 희생되다/전쟁 때문에 소중한 목숨을 잃은/모든 이들의 명복을 비노니/영혼이나마 영원히/평안하게 잠드소서/ (뒷면)평화스러운 서포에서 태어나/낯선 땅 오키나와에서 생을 마친 탁경현/영혼이나마 그리던 고향 땅 산하로 돌아와/평안하게 잠드소서.

구로다 씨는 ‘일본의 전쟁 책임’ 묻는 사람

특공대원 탁경현.
여기에 위령비 옆면에는 탁경현의 약력이 연도별로 기술되어 있고 ‘탁경현(일본명 光山文博)’이라는 문구가 한 번 나온다. 탁경현씨에 관한 일반 정보를 적시한 것으로 위령비 앞뒷면에 적힌 공식 문구처럼 의미 있는 것은 아니다.

이번 위령비 건립을 둘러싼 오해가 있다. 구로다 씨를 비롯해 위령비 제막식에 참가한 일본인은 태평양전쟁에 대해 일본의 책임을 묻는 사람이라는 점이다. 특히 구로다 씨는 야스쿠니 신사에 일본 정부 관료가 공식 참배하는 일이나, 자위대와 관련한 일본 정부의 헌법 개정에 대해 명확하게 반대 주장을 펼치는 사람이다.

그가 조선인 특공대원 문제에 주목한 것도 전쟁이라고 하는 시대의 거센 파도에 묻어 일본인의 이름으로 죽어버린 청년의 영혼을 위로하고 싶다고 하는 의도에서 비롯했다. 여기에, 민족이나 국가라는 문제는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민족과 국가라는 이름 아래 희생된 사람에 대한 애도의 뜻이 있다.

구로다 씨가 위령비의 이상형으로 생각한 것은 오키나와현에 있는 태평양전쟁 위령비 ‘평화의 주춧돌’이었다. 그 비에는 오키나와 전투에서 희생된 일본 병사나 조선인의 이름이 적혀 있고 심지어 적국인 연합군(미군) 병사 이름까지 모두 새겨졌다. ‘전쟁에는 적이나 아군이 없다’라고 하는 발상이 깔려 있다. 이 오키나와현의 위령비는, 일본 평화운동의 상징이며 야스쿠니 신사와 정반대 위치에 서 있다.  때문에 구로다 씨의 행동을, 최근 일본 자민당 정부나 일본 우파 정치가가 종종 해온 경솔한 발언이나 행동과 같은 수준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안타깝게 느껴졌다. 위령비 건립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구로다 씨의 진심이 무엇인지 물으려 하지 않았다.

위령비는, 구로다 씨 등이 일본에 귀국한 후 5월13일 공원에서 철거되었다. 사천시는 “반대파에게 파괴될 가능성도 있어, 안전을 위해 가까운 절로 옮겼다. 향후 어떻게 될지는 아직 검토 중이다”라고 설명했다. 구로다 씨는 “위령비 소유자는 나인데, 무단으로 철거했다. 납득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기자명 사토 다이스케 (교도통신 기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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