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제재 나선 ‘이유’ ‘러’ 정말 이럴 거야?
  • 뮌헨·남정호 편집위원
  • 호수 362
  • 승인 2014.08.24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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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가 러시아에 대한 추가 경제제재 조치에 나섰다. 러시아는 보복 제재를 호언했다. 러시아와 밀접하게 얽혀 있는 여러 EU 회원국의 경제적 피해가 크다. 러시아의 내상도 깊어간다.
지지부진하던 유럽연합(EU)의 러시아에 대한 추가 경제제재 조치가 지난 7월31일부터 본격화했다. 제재 대상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측근 권력과 올리가르히(신흥 재벌) 등 72명, 가스프롬 은행을 포함한 5개 국영은행, 기업체 18개로 크게 늘어났다. 우크라이나 분리주의자들이 7월17일 말레이시아 항공 여객기를 격추해 승객과 승무원 298명이 사망한 이후, 이들의 배후 지원국으로 알려진 러시아를 응징하자는 여론 속에 에너지·금융·방산 분야의 추가 제재 조치가 취해진 셈이다.

구체적인 내용을 보면, 푸틴 대통령 측근과 재벌들의 해외 은행 계좌가 동결되고 유럽 여행이 금지된다. EU 회원국의 러시아 투자와 금융거래도 중단된다. 군사·에너지 분야의 기술 이전과 부품 판매 및 협력도 금지된다.

EU 제재에 맞서 러시아도 보복 제재를 호언하고 있다. “EU의 제재 조치는 부메랑으로 되돌아갈 것”이라며 EU 회원국들의 아킬레스건인 천연가스의 가격을 대폭 인상하겠다고 위협한다. 러시아 두마(의회)는 러시아 내 외국인 투자 자산을 동결하고 압수할 수 있는 법안을 준비 중이다. 또 8월4일부터 8일까지 동부 우크라이나 국경지대에서 SU34 전폭기와 미그31 전투기 100여 대를 동원한 대규모 군사훈련을 실시하는 등 힘을 과시했다. 크렘린 사정에 정통한 러시아 사회학자 올가 크리시노브스카야 박사는 “서방 측이 푸틴의 측근과 재벌들의 제재를 통해 그의 정책을 바꿔보려 하지만 이는 환상이다”라고 주장한다. 푸틴의 강경 노선이 어디까지 이어질지 서방 측은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REUTERS</font></div>러시아가 폴란드의 농산물 수입을 중단하자 바르샤바의 청년들이 사과 수레를 끌고 다니며 국산 사과 소비를 권장하고 있다.
러시아에 대한 경제제재를 강화할수록 손해를 보는 쪽은 오히려 EU가 될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대표적인 예가 독일이다. 러시아에는 독일 기업 6300개가 진출해 있다. 투자액만 총 230억 유로(약 31조6050억원)에 달한다. 지난해 러시아와의 무역거래 규모는 900억 유로(약 124조원)이고, 독일 금융기관이 러시아에 대출한 돈은 무려 2350억 유로(약 323조원)다. 매년 910억 유로에 달하는 천연가스·원유·석탄을 러시아에서 수입한다.

러시아에 대한 경제제재 조치가 계속된다면 독일 에너지 회사 EnBW와 러시아 국영 가스회사 가스프롬 간의 60억 유로(약 8조2450억원)에 달하는 가스 수입 계약과 지멘스의 러시아 고속전철 건설공사, 상트페테르부르크 공항 신축공사 같은 대형 공사들이 줄줄이 중단될 가능성이 크다. 방산업체 라인메탈 사의 1억3500만 유로(약 1860억원) 규모 공사는 이미 취소됐다.

사정은 영국도 마찬가지다. 영국 석유회사 BP는 러시아의 로즈네프와 2012년부터 449억 유로에 달하는 공사를 추진 중이다. 런던의 금융 중심가 ‘런던시티’에 약 3000억 유로가 넘는 러시아 기업과 부동산 자금이 몰려 있어 금융가에서는 이 지역을 일명 ‘런던그라드(Londongrad)’라 부를 정도다. 이 자본이 대규모로 빠져나갈 가능성이 있다. 그뿐인가. 영국 명문 축구클럽인 FC 첼시의 구단주 로만 아브라모노비치 같은 재벌들이 런던에 살면서 거액의 세금을 내고 있다. 러시아 재벌들이 런던에 투자한 부동산만 126억 유로가 넘는다. 지난 20년간 영국 금융기관들이 러시아에 빌려준 돈은 800억 유로에 달한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EPA</font></div>러시아는 천연가스 가격 인상으로 EU를 위협했다. 국영 천연가스회사인 가스프롬의 가스계측소.
그 밖에 다른 EU 회원국들도 각각 러시아와 서로 밀접하게 얽혀 있다. 이탈리아는 에너지 회사 Eni와 가스프롬 간의 가스관 설치 협력이 어려워지게 됐다. 오스트리아 금융기관들이 러시아에 대출한 돈은 50억 유로에 달한다. 폴란드는 경제제재 직후 러시아가 사과·채소 등 일부 농산물 수입을 중단해 거대한 수출시장을 잃었다. 키프로스는 2012년 경제가 파탄 직전에 처했을 때 러시아가 25억 유로를 지원해주어 구제되는 은혜를 입었다. 프랑스는 그동안 각종 금융기관이 러시아에 총 520억 유로를 대출했다. 지금까지 EU의 각국 금융기관들이 러시아에 대출한 돈은 총 1770억 유로(약 244조원)에 달한다. 그 가운데 프랑스와 이탈리아가 각각 520억 유로, 305억 유로다. 이런 각국의 경제적 이해관계 때문에 EU는 그동안 러시아에 대한 강력한 제재 조치를 이끌어내는 데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EU만 경제적 피해가 큰 것은 아니다. 러시아의 내상도 깊어지고 있다. 외국 자본의 이탈은 EU의 경제제재 이후 가속화되고 있다. 독일 경제주간지 <비르트샤프츠보헤>는 이미 러시아에서 480억 유로가 빠져나갔다고 보도했다. 러시아는 EU에 천연가스 요금을 인상하겠다고 위협하지만, 독일은 이미 3개월 동안 쓸 수 있는 양을 비축해놓았다. 불가리아·루마니아·라트비아 등 동구권 국가들은 올해 추운 겨울을 각오해야겠지만, 영국·프랑스·아일랜드는 별 영향이 없다. 천연가스 수출 50%를 차지하는 EU에 가스 공급을 중단하면 러시아는 외화 확보에 큰 차질을 본다. 

루블화 폭락 등 러시아 경제 불안의 직격탄을 맞는 러시아 업체도 급증하고 있다. 러시아의 외환보유액은 지난해 4800억 달러에서 올해 4200억 달러로 감소했다. 현재 유가 하락률은 8%. 재정적자를 메우려면 보유 외화를 계속 축내야 할 판이다. 러시아 재벌과 기업들은 오스트리아·영국 등 해외에 투자한 돈 가운데 경제제재를 전후해 이미 약 3000억 유로를 스위스·중동·아시아 등지의 안전한 자본 도피처로 옮겨놓은 것으로 알려졌다.

독-러 비밀 협상으로 출구전략 찾을까

서로가 파멸로 치달을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일까? 영국 일간지 <인디펜던트>는 EU와 러시아 관계가 최악의 상태로 치닫는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 최근 들어 독일과 러시아 사이에 비밀 협상이 진행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EU는 러시아의 크림반도 병합을 인정하고, 우크라이나 정부는 동부 분쟁지역의 자치권을 확대한다. 대신 러시아는 분리주의자들에 대한 군사·경제적 지원을 완전히 중단한다. 우크라이나는 나토에 가입하지 않는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에 천연가스 공급을 보장한다” 따위 내용이다. 독일 정부는 부인하지만, 공존을 위해 양쪽이 도출할 수 있는 최선의 출구전략 중 하나라는 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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