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과 일본 양측이 지난 5월29일 스톡홀름 국장급 회담 결과를 발표할 때만 해도 우리 정부나 전문가들은 회의적이었다. ‘납치 문제는 더 이상 얘기할 게 없다’던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의 유훈을 어기고 김정은 노동당 제1비서가 새로운 해법을 낼 수 있을지, 일본의 외교력이 미국을 넘어설 수 있을지 불투명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난 7월4일 북한이 ‘납치문제 특별조사위원회’ 위원 명단을 일본 측에 넘겨주고, 일본 측이 대북 제재 일부를 해제하자 분위기가 바뀌고 있다. 북측이 북한에 체류 중인 납북자 및 특정 행불자 30여 명의 명단을 일본 측에 이미 전달했다는 〈니혼게이자이 신문〉 보도도 나왔다. 또 이들의 송환이 이뤄질 8월 말이나 9월 초 아베 총리가 방북하리라는 얘기가 나오기도 한다.

한국에 아무리 보수 정권이 들어섰다 해도 북·일 접근에 대해서는 민감하다. 북한에 대결 정책을 펼쳤던 김영삼 정권도 북한과 일본이 쌀 지원 협상을 벌이자 일본을 맹비난하면서 ‘우리가 대신 북한에 쌀을 주겠다’고 나서는 촌극을 벌인 바 있다. 이번에도 북·일 접근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정부 주변 연구소에서 남북 관계를 풀어야 한다는 취지의 보고서가 쇄도하고 있다고 한다. 일부에서는 8월14일 교황 방한 직전 또는 8·15 경축사를 통해 박근혜 대통령이 대북 중대 제안을 하는 방안 등도 거론된다.

7월2일자 〈조선신보〉는 최근 북한이 펼치는 외교전에 대해 “동북아 한복판에서 주변국들이 벌이는 공방전을 다스리며 자기 나라의 핵심 이익을 실현하는 ‘지정학적 요충지론’에 기초하고 있다”라고 강조했다.

ⓒ평양 조선중앙통신김정은 노동당 제1비서(왼쪽)가 조선인민군 제171군부대 포사격 훈련을 지도하고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지난해 초·중반까지의 상황과 그 이후 상황 전개를 보면 북한의 전략 변화가 두드러진다. 지난해 초 핵실험과 정전협정 무효화 선언 등 일련의 벼랑 끝 전술과 함께 중국에 북·미 대화 및 6자회담 주선을 의뢰하던 노선이 전형적인 강대국 중심 전략, 즉 북한판 ‘북·미·중 전략노선’이었다면, 지난해 9월 말 이후 북·러 관계를 시작으로 북·일 관계까지 치고 나오는 것은 지정학적 이해관계를 이용해 약한 고리부터 공략한 후 대마를 잡는 실리적 접근법이다.

우리 근대 역사에서 드러났듯이, 주변 국가들은 모두 한반도를 자신의 ‘국익선’ 외연을 방어하는 ‘이익선’의 개념에서 보고 있다. 즉 다른 강대국이 한반도에 거점을 확보하면 자신의 이익선이 침해당할 것을 우려해 반드시 맞대응에 나서는 것이다. ‘지정학적 요충지론’은 바로 이에 입각한 전략 전술로 보인다. 즉 러시아를 끌어당기면 일본이 맞대응 차원에서 움직인다. 그렇다면 그다음은 누구인가. 과거 김영삼 정부에서 일어났던 촌극에서 보나 현재의 한·일 관계로 보나 남한이 가만있을 수 없으리라는 것은 자명하다.

ⓒ통일부 제공7월17일 남북 대표단이 아시안게임 참여 실무접촉을 위해 만났다.
북한이 최근 대남 관계 돌파에 모든 화력을 집중하는 것 역시 지정학적 요충지론의 일환이다. 7월7일 북한 정부의 성명 발표를 기점으로 북한은 거의 모든 매체를 총동원하다시피 하며 자신들이 제안한 내용을 받아들이라고 연일 촉구하고 있다.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어떻게 되는가를 보여주기 위한 듯, 무력시위 강도는 계속 올라간다. 한·미 합동 군사훈련이 있던 지난 2월21일부터 7월14일까지 모두 15차례에 걸쳐 300㎜ 방사포와 프로그-7 지대지 미사일, 노동·스커드 탄도미사일, 방사포와 해안포 등을 발사해왔는데, 특히 7월 들어서는 비무장지대 인근까지 내려와 탄도미사일·방사포·해안포 등을 잇달아 발사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관계 개선에 대한 성의 표시로, 비록 결렬되기는 했지만 9월 인천에서 열리는 아시안게임에 대규모 선수단과 응원단을 파견하겠다고 나서기도 했다. 즉 지정학적 요충지론에 입각한 북한의 새로운 접근 전략은 지금 대남 관계 돌파라는 3단계에 도달해 있고, 이 3단계의 향방에 따라 다음 절차가 정해질 가능성이 높다.

북한은 지금 어떠한 대남 관계를 원하는 것일까. 우리 정부의 대응이나 언론 분석 등을 보면 대체로 ‘기존 억지 주장의 반복’ 또는 8월에 있을 ‘한·미 군사훈련에 대한 반발’같이 관성적으로 해석하는 데 그친다. 그러나 북한의 7·7 정부 성명에는 특이한 점이 눈에 띈다.

북한 정부 성명은 남북 관계와 관련해 모두 4가지 요구 사항을 담고 있다. 첫째, ‘사상과 제도가 다르면 덮어놓고 적대시하는 냉전 시대의 관념’을 버리고 북한에 화해와 단합의 길을 열라는 것. 둘째, 외세 의존을 버리고 모든 문제를 우리 민족끼리 하자는 것. 셋째, 새로운 합리적 통일방안으로 연방연합제를 추진하자는 것. 넷째, 비방 중상을 금하자는 것이다.

위 네 가지 중 첫 번째와 두 번째는 핵 문제에 대한 북측의 완강한 태도로 인해, 우리 정부의 해석처럼 ‘기존 억지 주장의 반복’이라는 느낌을 준다. 북한 정부 성명에서는 북한의 핵이 ‘통일의 장애도 북남 관계 개선의 걸림돌도 아니며, 외세의 침략을 억제하고 자주 통일과 민족 만대의 평화와 안전 번영을 위한 확고한 담보’라고 강변한다. 그러나 남쪽에서 볼 때는 북한의 핵이 남북 화해와 단합을 가로막으며, 외세 개입·외세 의존의 원인이 된 게 현실이다. 따라서 핵에 대한 남쪽의 의구심을 해명하고 외세에 개입 명분을 주지 않기 위해서라도 북한이 해야 할 몫이 반드시 있다.

그런데 세 번째의 통일 방안은 이번에 처음 나온 얘기로, 상당히 획기적이다. 김일성 주석 시대의 고려연방제나 김정일 위원장 시대의 ‘낮은 단계 연방제’까지 북한이 연방제를 포기한 적은 없었다. 이번에 비록 연방제를 앞에 붙이긴 했으나 사실상 연합제, 즉 국가 대 국가 관계로 남북 관계를 정립하자고 들고 나온 것이다. ‘연방연합제’는 장기적으로는 연방을 지향하지만 현재는 국가 대 국가의 ‘국가연합제’를 뜻한다. 북한이 정부 성명을 발표한 것은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선언한 지난 1993년과 2003년, 그리고 북·일 관계 방침을 세운 1999년 등 세 차례에 불과하다. 남북 관계에서는 주로 조평통이나 국방위원회 성명으로 갈음했지 국가 대 국가 간 성명을 뜻하는 정부 성명을 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자신들이 제의한 연방연합제에 따라 남북 관계를 국가 대 국가 간의 외교 관계로 보겠다는 의지를 성명 형식에 적용한 것이다.

북 성명 외면한 채 매머드급 통일준비위 발족

이는 곧 박근혜 정부 통일 정책에 대한 북한의 문제의식을 보여준다. 북한 정부 성명은 이에 대해 ‘신뢰 프로세스’니 ‘드레스덴 선언’이니 하는 허울을 쓰고 ‘제도 통일’ ‘흡수 통일’을 추구하는 것은 시대에 역행하는 반민족적 행위라 규정하며 자칫하면 ‘전쟁의 화를 불러올 수 있다’고 경고한다. 최근 군사분계선 가까이까지 내려와 방사포와 해안포를 발사하는 것은 그에 입각한 무력시위인 셈이다. 한마디로 흡수 통일의 야심을 버리고 국가 대 국가 관계로 할지, 긴장 고조로 인한 전쟁의 길로 갈지 양자택일하라는 것이다.

서독 아데나워 총리의 힘에 의한 통일정책과 할슈타인 원칙에 맞서 동독이 베를린 장벽을 높이 세우며 국가 대 국가로의 관계 정립을 요구하던 1960년대 말의 동·서독 상황과 비슷하다. 당시 서독에서는 브란트라는 거인이 혜성같이 등장해 ‘현실을 인정하지 않고 변화시킬 수 없다’라는 유명한 명제와 함께 동독의 요구를 전격 수용했고, 국가 대 국가로 동·서독 관계를 정립했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는 북한의 요구에는 아랑곳없이 7월15일 드레스덴 구상을 구체화하기 위해 대통령 직속의 매머드급 통일준비위를 발족했다.

기자명 남문희 대기자 다른기사 보기 bulgot@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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