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 핏줄 아니랄까 봐, ‘초딩’ 3학년 딸이 학급신문을 구상 중이라고 불쑥 말을 꺼냈다. ‘절친’ 한 명과 1학기를 돌아보고 2학기 각오를 다지는 신문을 간단하게 만들어 여름방학식 날 친구들에게 나눠주고 싶다는 것이었다. 고심해서 짜놓은 기획안도 밝혔다. 1학기를 정리하는 지면에는 각종 발표회 소식과 담임 선생님 인터뷰 등을 싣고, 여름방학과 2학기를 위한 지면에는 사서 선생님과 영어 선생님이 추천하는 책 3권씩, 체육 선생님이 권하는 여름나기 운동법, 음악·미술 선생님이 추천하는 가볼 만한 공연과 전시회 등을 소개하겠다고 했다. 만화 잘 그리는 친구에게 만화도 발주했고, 퀴즈 코너도 마련했단다.

그러면서 마지막 지면이 문제라고 고민을 털어놓았다. 쉬는 시간에 빈 도화지를 꺼내놓고 반 친구들에게 ‘여름방학 계획이나 2학기 각오’를 한마디씩 쓰라고 했더니, 제대로 쓰는 친구가 거의 없더라는 것이다. 그나마 “친구들아 여름방학 잘 보내~” “뚱뚱해지지 말고 건강하게 다시 만나자” 정도가 담을 만한 수준이고, 나머지는 ‘낙서’에 가까웠다는 것이다.

그 얘기를 들으니 지난 5월 진행된 〈시사IN〉 리더십 포럼에 참가한 한 학생이 “나는 꿈이 없다. 되고 싶은 게 없으니 어떡하느냐”라며 멘토에게 하소연했다던 기억이 떠올랐다. 당시 강사로 나선 이들은 한결같이 ‘되고 싶은 것’이 아니라 ‘하고 싶은 것’을 꿈으로 삼으라고 조언했다. ‘꿈 기획자’로 불리는 서동효 모티브하우스 대표는 학생들에게 오른쪽에는 꿈을, 왼쪽에는 꿈을 이뤘을 때 하고 싶은 것을 적어보라고 한 뒤, “오른쪽을 가려도 왼쪽에 적은 가치는 이룰 수 있다. 직업이 아닌 삶의 가치를 꿈꾸라”고 격려했다.

이런 ‘꿈 증후군’을 딸 또래 아이들도 벌써부터 겪고 있는 듯하다. ‘계획’이나 ‘각오’라는 단어에 미리부터 주눅이 들어 자기가 여름방학에 무엇을 하고 싶은지, 2학기 생활은 어떻게 하고 싶은지 편하게 떠올리지 못하는 것이다. “이번에는 ○○수영장의 높은 슬라이드를 꼭 타고야 말겠어” “매일 저녁 한 시간씩 아파트 놀이터에서 놀래” “목소리 크게 내는 연습을 해서 새 소식 발표 때마다 자신 있게 하겠다” 수준이면 얼마든지 술술 쓸 수 있지 않을까.

마침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단원고 학생의 부모가 아들이 수첩에 써놓은 ‘버킷리스트’를 발견하고 그걸 이뤄주기 위해 애쓰고 있다는 얘기가 들려왔다(30~32쪽 기사 참조). ‘재즈 피아노로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전교 10등 안에 들어보기’ ‘연예인이랑 결혼하기’ 등 열여섯 살 소년이 빼곡하게 적어놓은 ‘하고 싶은 것들’ 가운데 ‘유명한 뮤지션들 사인 받기’는 최근 아빠 힘으로 완수했다고 한다. 그 일을 아들이 직접 했다면 얼마나 더 기뻐했을까.

내일 아침 딸이 일어나면 이렇게 말해주련다. “친구들에게 ‘각오’나 ‘계획’ 말고 ‘정말 하고 싶은 일’ ‘하면 신날 것 같은 일’을 맘껏 적어보라고 하렴.”

기자명 이숙이 편집국장 다른기사 보기 sook@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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