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보면 20대의 하루하루는 결국 납작해지지 않으려는 몸부림이었다. 시시한 미래가 나를 향해 돌진해오고 있으니, 가만히 있다가는 로드킬 당할 게 뻔하니, 뭐라도 해야 했다. 내 토실한 청춘이 납작해져 보기 흉한 얼룩으로 끝장나지 않으려면,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되었던 것이다.

영화 〈프란시스 하〉의 주인공 프란시스(그레타 거윅)도 지금 안간힘을 쓰고 있다. 어느덧 스물일곱 살. 친구들이 하나둘 시시한 어른이 되어가는 나이. 프란시스에게는 아직 꿈이란 게 남아 있다. 그 꿈을 변함없이 응원하는 친구 소피(미키 섬너)와 함께 산다. “프란시스, 우린 세계를 정복할 거야. 너는 유명한 현대무용가로 이름을 날릴 거고 나는 너에 대한 비싼 책을 써서 출판할 거야.” 이렇게 말해주는 친구가 곁에 있어서 프란시스는 참 든든했다.


내 집, 내 남자, 내 직장…. 갖고 싶은 ‘내 것’의 목록을 자꾸 늘려가는 또래들 틈에서 두 사람은 여전히 ‘우리’를 고집하는 20대였다. 살림 합쳐 같이 살자는 애인의 제안도 프란시스는 단칼에 거절했다. 지금처럼 앞으로도 계속, 소피와 함께 ‘우리 집’에 살면서 ‘우리 꿈’에 대해 재잘대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뜻밖의 장애물을 만난다. 소피에게도 갖고 싶은 ‘내 것’의 목록이 생긴 것이다. ‘내 집’과 ‘내 남자’를 선택하며 친구는 미안해했다. 프란시스는 애써 괜찮은 척했다. 실제로도 괜찮을 줄 알았다. 하지만 일도, 사랑도, 우정도, 어느 것 하나 쉽게 풀리지 않는다. 뉴욕이란 도시가 점점 더 그녀에게 쌀쌀맞게 군다. 꿈을 짓누르는 현실의 무게도 점점 더 버거워진다. 자, 우리의 프란시스. 이대로 그냥 납작해지지 않으려면 뭐라도 해야 한다.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영화가 상영되는 86분 동안 프란시스는 정말 잠시도 가만있지 않았다. 웃고 떠들고 춤추고 달리고 넘어지고 다시 일어서서 뛰고 또 뛴다. 그 모습이 그렇게 예뻐 보일 수가 없다. 배우 그레타 거윅의 건강한 미소는 전염성이 강해서 영화 시작 10여 분 만에 보는 이의 입꼬리도 양옆으로 잡아당겨 버린다. “제 직업이요? 설명하기 힘들어요. 진짜 하고 싶은 일이긴 한데, 진짜로 하고 있진 않거든요.” 아직 정식 무용단원이 되지 못한 자신의 초라한 처지를 이런 말로 설명할 때도 그녀는 웃고 있다. 부러웠다. 그 미소가. 그 낙관이. 그 젊음이.

여자의 우정이 근사해 보이는 장면들

가장 부러운 건 그녀와 소피의 우정이었다. “소피, 내가 가장 속상한 건 네게 애인이 생기면 너의 하루 중에 재미있는 일이 생겨도 넌 그 사람한테만 얘기할 거고 난 못 듣는단 거야.” 이렇게 서운해하면서도 결국 ‘그 사람’과 소피의 사랑을 마지막까지 응원하는 건 프란시스다. “각자 다른 사람과 얘기하고 있는 파티에서 눈을 돌리다가 서로의 시선이 마주치는 때”, 낯선 이들 틈에서 자신들만의 우주가 생성되는 그 순간 두 사람이 웃는다.

어쩌면 둘이 남자가 아니라서 가능했을 마법 같은 순간들. 여자들의 우정이 참 근사하고 멋있어 보이던 장면들. “남자들은 단순하지만 여자들은 복잡하잖아.” 영화 속 대사에 고개를 끄덕이며 끝까지 지켜보던 나는 결국 나도 여자였으면, 하고 샘을 내는 지경에 이르렀다.

한때 스물일곱 살이었던 우리 모두에게, 곧 스물일곱 살이 될 모든 20대에게, 그리고 바로 지금 스물일곱 살의 뜨거운 여름을 맞이한 세상의 모든 프란시스에게 이 영화를 권한다. “수많은 복서들이 펀치가 세서 승리를 거두기도 하지만 대부분 맷집으로 이깁니다.” 언젠가 류승완 감독이 젊은 영화감독 지망생들에게 건넨 이 말로 나의, 당신의, 우리 모두의 몸부림과 발버둥을 응원한다. 납작해지지 않으려면 프란시스처럼! 시시한 어른이 되지 않으려면 이 영화처럼!

기자명 김세윤 (영화 칼럼니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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